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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金顯承는 시인인 동시에 고독한 수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마지막 가을 해변에 잠든 산비탈의 생명들보다도
눈 속에 깊이 파묻힌 대지의 씨앗들보다도
난로에서 꺼내오는 매일의 빵들보다도
언제나 변치 안는 온도를 지닌 어머니의 품 안 보다도
더욱 다수운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은혜의 불빛 앞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값없이 부어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 곧 은혜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들어줍니다. 따뜻함의 정도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 어머니의 품속보다 훨씬 더 따뜻합니다.
지금 농부들이 기쁨으로 거두는 땀의 단들보다도
지금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저녁 항구의 배들보다도
지금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택가의 포근한 불빛보다도
더욱 풍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것들을 모두 잃는 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세상 그 어떤 상황보다 풍성합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그Henry W. frost에게 고향으로부터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동시에 그의 영혼에는 흑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좌절감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들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봤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적 침체는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기만 했습니다. 급기야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느 날, 선교 본부를 방문했습니다.
“감사 해보라Try Thanksgiving”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본부 사무실을 드나들 때마다 읽고 그냥 지나쳤던 글이었습니다.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었습니다. 실천해 보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날은 마음에 담았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좋을 때든 나쁠 때든, 일이 잘 풀릴 때든 뒤죽박죽 얽혀 있을 때든, 마음대로 이루어지든 마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든 감사했습니다. 영혼에 구원의 빛이 임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사라지지 도무지 않았던 흑암이 아침 안개처럼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까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받았기에
누렸기에
배불렀기에
감사하지 않는다.
추방에서
맹수와의 싸움에서
낯선 광야에서도
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
첫 열매를 드리었다
진정한 감사는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 무엇인가를 풍성하고 누리고 있을 때,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먹어서 배불렀을 때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환난과 시험의 때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은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했을 때, 굶주린 사나운 맹수의 밥으로 던져졌을 때, 절대 절망과 절대 고독으로 가득 채워진 광야로 내몰렸을 때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피땀을 흘려서 일구고 얻은 첫 번째 열매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서원을 갚았습니다.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허물어진 마을에서
불 없는 방에서
빵 없는 아침에도
가난한 과부들은
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
드리려고 드렸더니
드리기 위하여 드렸더니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
지극히 가난해서 도움을 받아야할 과부들은 아주 조금 남은 것을 자신을 위해서 모아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드리고 싶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3년째 목회 현장에서 만난 성도들은 하나같이 그랬습니다. 제물을 받은 하나님은 입을 닦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형편을 그대로 두고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삶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완전히 바꿔주셨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갚아주셨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복이었습니다.
마음만을 받으시고
그 마음과 마음을 담은 그릇들은
더 많은 금은의 그릇들을 보태어
우리에게 돌려보내신다.
그러한 빈 그릇은 하늘의 곳집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마음만 받으십니다. 마음이 담겨 있는 그릇에는 당신 안에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충만한 복을 채워주십니다. 소중한 물질에 마음을 담아 드린 믿음의 사람들에게 돌려주십니다. “다니엘은 그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둔 자기 다락방에서 전에 항상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단6:10)라는 증거에 따르면, 다니엘은 자신이 오랫동안 굶주린 사자들에게 뜯겨져 죽을 것을 알면서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감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그를 기뻐하셨습니다. 무엇인가가 던져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굶주린 사자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의 본능을 아예 없애 버리셨습니다. 먹잇감이 던져졌음에도 반응하지 않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죽음의 자리로부터 그를 건져내셨습니다. 당신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과감하게 던져버렸던 그가 왕으로부터 더 큰 총애를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더욱 크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다윗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우뚝 섰습니다. 자신이 거하고 있던 왕궁은 화려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모신 장막은 초라했습니다.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선지자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여호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을 통해서 짓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는 그의 마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들들과 후손들을 축복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그의 후손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왕위가 영원히 이어지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생각할 수 없었던 참으로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여호와께서만 계획하실 수 있고 또 완벽하게 이루실 수 있는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기대나 상상을 완벽하게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아니 기대하지 않아도, 알아서 되돌려 주십니다. 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주인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은 물론 목숨까지도 바쳐서 섬겨야할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입니다. “나를 믿는 성도들을 불러 모아라.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로 나와 언약을 맺은 성도들을 불러 모아라.”(시50:5)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도”는 희생제물זֶבַח(제바흐)을 드림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원한다고해서 누구나 다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방법과 길은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절대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여호와께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노아도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여호와께 드릴 희생제물을 거룩하게 구별했습니다. 여호와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삼대 족장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역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한 희생 제물을 올려드렸습니다. 바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성민 이스라엘도 가장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한 희생제물을 올려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 제사를 올려드리셨습니다. 제사 곧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민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주일이면 빼놓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너의 죄상을 밝히리라. 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바친 제물을 두고 탓하지 않는다. 너희는 거르지 않고 내 앞에 번제를 드렸다.”(사50:7-8)라고 이어지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제사 때마다 바치고 있는 희생제물 곧 예배 때마다 드리고 있는 물질이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너희 집 소를 앗아가지 않으며, 너희 우리에서 염소를 앗아가지 아니하리라. 숲 속의 뭇 짐승이 다 내 것이요, 산 위의 많은 가축들이 다 내 것이 아니냐? 공중의 저 새들도 다 내 마음에 새겨져 있고, 들에서 우글거리는 생명들도 다 내 손안에 있다. 이 땅이 내 것이요 땅에 가득한 것도 내 것인데, 내가 배고픈들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내가 쇠고기를 먹겠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50:9-13)라는 증거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호와께 무엇인가를 바친다고 해서, 자신의 전부를 모두 다 구별해서 바친다고 해서 여호와가 더 부유해지거나 풍요로워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다.”(시50:14a)라는 증거를 통해서,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의 결여”입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할 감사하는 마음이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제물을 바친 것으로 여호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는 하루가 다르게 형식적으로 변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드립니다. 거룩하신 여호와를 비렁뱅이 취급합니다.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이 조금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여호와로부터 왔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내놓았으니 하나님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내놓은 것보다 훨씬 많은 30배, 60배, 100배로 뻥 튀겨서 내놓아야한다고 겁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삼천 배, 육천 배, 만 배까지 뻥 튀겨서 내놓아야한다고 으르고 협박합니다. 놀랍게도 여호와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거룩한 교회로 구별된 저와 여러분이 양심에 조금도 꺼리지 않고 행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겠으나 구원해 줄자가 없으리라.”(시50:22)라는 증거에 따르면, 여호와를 잊어버린 이들은 어느 때보다 부유한 생활 속에서도 상대적 빈곤에 시달립니다. 도무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불만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합니다. 좋다는 방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동원해 보지만 해결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화됩니다.
그들을 향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자, 나를 높이 받드는 자이니,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시50:23)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구원יֶשַׁע(예샤)”은 “(죄나 악으로부터) 구출, 구조 또는 안전, 복리, 번영, 승리” 등의 뜻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평안을 가리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여호와를 높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첩경捷徑입니다. 오직 여호와만 허락해주실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지난 한 해 동안 값없이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돌아보며 추수 감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어떤 희생제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시는 평안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고 있습니까? 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a)라고 외쳤습니다. “범사ἐν παντί”는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모든 영역들과 모든 상황들”을 가리킵니다. 좋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나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서 어렵게 결정한 그대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어렵게 결정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영역과 상황 너머에 있는 결과를 볼 수 없는 저와 여러분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렇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모든 영역과 모든 상황의 1차적 곧 궁극적 원인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나고 있는 모든 영역과 상황을 계획하셨습니다. 허락하셨습니다. 결과가 어떨지도 구체적으로 알고 계십니다. 완벽한 선입니다. 저와 여러분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어렵다고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생각하라...”(시50:22)라는 구절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는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Matthew Henry는 저명한 설교가인 동시에 탁월한 성서학자입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 몸이 피투성이였습니다.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크게 놀라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서재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무릎 꿇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제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저를 때린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아니라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제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Warner Sallman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임파선 결핵”이라는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길어야 석 달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통지했습니다. 절대 절망이었습니다. 임신 중이었던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때 아내는 삼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삼 개월이나 되는 기간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은 삼 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지극히 작은 일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Head Of Christ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초상화를 완성할 때까지 잠시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말했던 시한부 기간이 지났습니다. 놀랍게도 몸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훨씬 더 건강해졌습니다. 병원 진료를 받은 결과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담당 의사는 깜짝 놀라며 도대체 지난 삼 개월 동안 무슨 약을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다른 약을 먹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굳이 먹은 약이 있다면 아내가 제안한 감사하는 약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담겨 있는 그림책은 1940년에만 무려 500만부 이상 인쇄되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입니다. 최고의 해독제입니다. 최고의 치료제입니다. 명약 중의 명약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과 혼과 육을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게 합니다. 지난 한해, 부족하기만 한 저를 지지해 주시고 위해서 기도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딱딱한 설교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들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중에도 중국과 북한 선교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동참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죄인 중에서도 가장 악한 괴수인 저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고 마음까지도 약해지며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리다 보면 문제가 너무나 크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능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헤아려 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을 선물로 받아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당면한 문제까지도 넉넉히 참고 견디며 마침내 이길 수 있는 복된 삶은 물론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켜보시며 필요까지도 채워주시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