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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Asia Times Online [ATO] 2013-10-9 (번역) 크메르의 세계
[자유발언]
베트남의 숨겨진 손 : 캄보디아 정치 교착상태의 배후세력
[SPEAKING FREELY] Vietnam's hidden hand in Cambodia's impasse
기고: 하싼 까셈 (Hassan A. Kasem)
캄보디아가 유엔(UN)이 조직해준 최초의 총선을 통해 내전을 끝낸지 이미 20년이 지났지만, 주권 및 민주주의와 관련해 캄보디아는 이웃국가 베트남의 정치적, 전략적 장악력에서 아직도 더욱 자유를 얻어야만 하는 상태이다.
1979년 베트남의 침공 및 그 이후의 점령기에 손상된 상처들을 복구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캄보디아가 최초의 총선을 치른 후부터 2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그들의 꼭두각시 위성 정당인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을 통해 아직도 은밀하게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부분의 캄보디아 국민들은 현재도 진행 중인 음모의 강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여타 전후 사회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캄보디아인들은 진실에 관해 '무시'하는 편리한 선택을 해버리고 만다.
해외 원조 제공처들을 포함하여 서방국가의 관찰자들은 집권 CPP의 부정부패를 지속적으로 축적시켜주면서 그들의 정권과 타협했다. 이제 그들은 베트남이 아직도 캄보디아에 강력한 명령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에 이전처럼 쉽사리 눈을 닫아서는 안 된다.
서방세계 일각에서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1979년에 자비롭게 해방시킨 존재로 보고 있고, 캄보디아 내 베트남 점령군에 대해서는 자국민을 학살하던 급진적인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으로부터 캄보디아를 구해준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하노이 당국이 캄보디아에 파병한 일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가졌던 베트남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종식시킴으로써, 자국의 곤란한 상황을 지정학적 이익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 이래로 논란이 야기됐던 [캄보디아-베트남] 국경분쟁 문제에 관해 전투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과 점령은 공산혁명의 지도 하에 있었던 20만명의 병력을 통해 이뤄졌고, 베트남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르 둑 토(Lê Đức Thọ 혹은 Le Duc Tho, 黎德壽: 1911~1990)는 공산혁명 전쟁 및 크메르인(캄보디아 주류민족) 대 크메르인 사이의 살상과 파괴를 유도하면서 캄보디아를 더욱 약화시켰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의 초대 총리를 역임한 바 있는] 뻰 소완(Pen Sovann)을 비롯하여 캄보디아의 용기 있는 여러 혁명 지도자들은 하노이 당국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 침공 기간 중 고의적으로 캄보디아의 국보와 부를 약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이 이러한 이들을 숙청한 후] 꼭두각시로 내세운 권력자들 중에는 현 총리인 훈센(Hun Sen)도 포함된다. 이들은 정권을 잡은 후 그러한 절도행위들을 단순히 전쟁 중 발생한 피해 정도로 포장해버렸다.
지금의 통합야당이 당명을 '캄보디아 구국당'(CNRP)으로 정한 일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CNRP 소속 여러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일부 크메르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트남은 훈센 및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과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통해 캄보디아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CNRP의 야당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들은 [여야간] 평화 및 권력 공유를 위해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의 거래를 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느끼고 있다.
가령, 고(故)-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임 국왕은 1990년 초 자신의 동포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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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주권, 존엄이 없다면, 평화를 수용해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다." |
베트남은 1979~1989년 사이에 10년 이상 캄보디아를 점령한 후,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정교한 권력통제 네트워크를 발전시켰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이 1979년에 최초로 수립시켰던 위성정권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었다. PRK를 운영한 주체는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KPRP)으로서, 표면상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에서 철군한 후 KPRP은 1990년대 초에 '캄보디아 인민당'(CPP)이라고 명칭을 바꾸게 된다. KPRP는 1930년대에 결성된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a Communist Party: ICP)의 직계 중 하나이다. ICP를 이끈 이는 베트남의 공산당 지도자인 호찌밍(Hồ Chí Minh 혹은 Ho Chi Minh, 胡志明, 호찌민: 1890~1969)이었다.
베트남은 1989년에 일방적인 철군을 했지만, 그 상징적인 철군과정을 감시하며 지켜보았던 이들은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그들은 --- 만일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지 않는다면 --- 최소 수백 명의 베트남인 "전문가들"을 캄보디아에 남겨두었다. 이러한 베트남인 전문가들은 크메르식(=캄보디아식) 성명을 사용하면서, 정부 내 거의 모든 부처의 요직에 배치되어 계속해서 자신들의 캄보디아인 동지들을 지원했다. 오늘날 누가 베트남인이고 누가 크메르인인지에 관해서는 오직 캄보디아인들끼리만 말하는 정도로 변하고 말았다.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 내에서 그들의 근본적인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집권 CPP 내에 완벽한 동먕세력을 구축해두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관계에는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의 토지, 해상영토의 양허, 베트남 출신 불법 이주민들이 캄보디아에서 방해받지 않고 정착하는 문제 등이 포함된다. 캄보디아의 여당인 CPP의 지도자들 및 고위 관리들은 베트남의 비호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가지지 못했었을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고, 베트남 정부 역시 그 점을 알고 있다.
외국 학자들 역시 현재도 지속 중인 양국의 특수관계에 관해 보다 정교하게 기술한 바 있다. 마이클 벤지(Michael Benge)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포로가 됐던 인물로서, 그는 베트남어는 물론이고 소수민족들의 방언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물이다([역주] 마이클 벤지는 11년간을 베트남에서 보냈음) . 그는 지난 2007년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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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훈센 (Hun Sen)의 [사저로 불리는] '뚜올 끄라상 요새'(Tuol Krassaing fortress)는 프놈펜(Phnom Penh)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따크마오(Takhmau) 읍에 위치한다. 하노이 당국은 훈센의 사저 바로 오른쪽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만들고, 그곳에 약 3천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했다. 이 병력은 특수부대와 정보요원들로 구성된 혼성부대로서, 탱크(전차)와 헬리콥터들까지 보유하고 있다."
[역주] 마이클 벤지가 묘사한 군사기지의 위치를 위성사진으로 분석해보면, 그곳이 바로 현재의 '총리 경호부대'(PMBU 혹은 BHQ) 주둔지임을 알 수 있다. |
캄보디아 내 정보 전문 소식통이 내놓은 보다 확장된 분석에 따르면, 지난 2008년 태국 군과 캄보디아 군대가 국경에서 최초로 교전을 했을 때, 최소 1개 대대 규모의 베트남 정예 부대가 자신들의 캄보디아인 동지들을 돕기 위해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했었다고 한다.
독일 학자인 마르쿠스 카르바움(Markus Karbaum) 박사는 금년 4월 <사우스이스트 아시아 글로브>(Southeast Asia Globe)에 기고한 글을 통해, 크메르루주 정권의 이탈자들이 베트남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1977년 이후부터 베트남 당국이 현재의 캄보디아 집권층이 된 인사들에 관한 개인 기록들을 작성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 동독 정부의 비밀경찰이었던 '슈타지'(=Stasi: Staatssicherheit, 국가안전부)는 해당 기록을 [당시의 우방국이었던] 베트남에서 입수했다.
슈타지 기록 문서들에 따르면, 젊은 훈센의 본명은 '훈 보날'(Hun Bonal)이었고, 그는 하노이 당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스로를 '하이 푹'(Hai Phuc)이라는 베트남식 이름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훈센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대대장 출신이었지만, 크메르루주 군대가 베트남 국경을 넘어들어가 여러 가지 폭력사태를 일으켰던 일에서, 2천명의 병력을 지휘했던 자신의 역할에 관해서는 축소했다.
슈타지 기록문서들은 보면, 훈센을 비롯한 여타 현 집권 CPP 지도자들이 베트남에 갔을 때, 먼저 구금시설에 유치된 후 자신들의 생애에 관한 자술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에 충성심을 보이려던 이들에 관한 베트남의 자체적인 평가는 때때로 냉정하기조차 하다. 가령 현재 CPP 당의장(=총재) 겸 상원의장을 맡고 있는 찌어 심(Chea Sim)에 관해서는 "[때때로] 타협적이며, 겁을 먹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서술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CPP 명예당의장이자 국회의장을 맡고 있는 헹 삼린(Heng Samrin)에 관해서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해 말을 잘 하지 못하며, 때때로 열등감 콤플렉스를 보여주며, 정치적 이해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베트남을 등에 업은 집권 CPP 소속 정치인들이 그후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해나간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베트남이 1979년 캄보디아를 침략한 이래 첫번째로 수립시켰던 정권인 현재의 CPP가 어떤 방해도 받지않고 캄보디아를 통치 혹은 공동 통치해온 점을 감안할 때, 위에서 살펴본 정보들의 평가는 주목할만한 것이다.
현재 CPP 소속의 보다 젊은 간부들이나 당원들은 자신들의 정당 지도자들이 언제나 낡은 이름들과 똑같은 얼굴들로 지속되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베트남이 집권 CPP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하면서 자신들의 나이든 파수꾼들에 대한 역사적 유대관계에 연연한다면, 어떠한 세대교체도 복잡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꼭두각시의 조정자 Puppet masters
야당인 CNRP는 집권 CPP를 베트남의 "꼭두각시들"(puppets)이라 부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 타당성이 없는 말이 아니다. 훈센이 28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하면서 하노이에 고두례(kowtowing, 叩頭禮: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예법)를 한 사례는 많이 존재한다.
1986년 2월 26일, 캄보디아가 아직도 베트남 군대의 점령 하에 있을 때, 훈센은 지방 당국들에 자신이 서명한 훈령을 배려보내, 전국의 수많은 베트남인 이주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특히 떤레 삽 호수(Tonle Sap Lake) 지역에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또한 캄보디아와 베트남이 1979, 1982, 1983, 1985년에 체결한 조약 및 2005년에 체결한 부속조약을 통해 캄보디아는 육지 및 해상에서 자국 영토를 베트남에 할양했다. 캄보디아가 가장 마지막에 상실한 영토는 꺼뜨롤(Koh Tral) 섬이다. 꺼뜨롤은 캄보디아의 남부해안과 정면으로 마주한 섬이며, 베트남에서는 푸꾸옥(Phu Quoc)이라 부르는 곳이다. CNRP는 꺼뜨롤이 베트남의 점령기에 베트남 영토가 된 곳이므로, 꺼뜨롤은 아직도 캄보디아 영토로 간주돼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 2010년 베트남의 응웬 떤 중(Nguyen Tan Dung) 총리는 [캄보디아 야당에 의해] 국경분쟁 문제가 부각되며 지속되자 그에 관한 우려를 표시했다. 야당의 삼 랑시(Sam Rainsy, 삼랭시) 총재는 지난 2009년 베트남과의 국경지역인 스와이 리엉(Svay Rieng) 도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 영토를 잠식하기 위해 부당하게 표식을 설치했다며 임시 [목조] 국경표식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글맵 지도 정보도 유포시켰다. 응웬 떤 중 총리의 우려에 대해 훈센은 삼 랑시에게 징역 10년형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훈센과 집권 CPP는 모든 선거 때마다 최소 300만명 이상에 달할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에 의지했고, 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집권 CPP의 선거 승리를 보증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금년 7월28일 실시된 총선에서, 훈센이 이끄는 집권 CPP는 언제나 획득하곤 했던 압승을 거두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자각되고 보다 대담해진 유권자들이 도전을 했고, 그들은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여당이 선거 승리를 위해 불법 유권자들을 활용하고, 유권자 매수와 협박을 일삼는다는 것을 폭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CPP는 선거결과까지 조작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NEC)가 발표한 공식적인 최종 선거결과를에 따르면, 훈센의 집권 CPP가 68석을 획득하여 55석을 획득한 야당 CNRP를 누르고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삼 랑시는 야당이 다수당이 될 의석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국회등원 거부를 결정하고 대규모 인파를 동원하는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번 선거의 결과가 보여주는 바는 캄보디아가 앞으로도 최소한 5년간은 여전히 베트남의 이익에 종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훈센의 CPP 정권 하에서, 베트남 기업들은 캄보디아 북부 및 북동부에서 고무농장 개발을 위한 경제적 토지 양허권(ELC: 국유지의 장기 임대권)을 보장받아 캄보디아 땅을 대규모로 확보했다. 이들 베트남 기업들은 캄보디아 전역에서 고급목재의 대규모 벌목에도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지속가능한 것이 못되며, 크메르인들(=캄보디아인들)에게는 약간의 이익만 있거나 전혀 이익이 못되는 일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는 더욱 더 많은 베트남 이주민들이 새로운 주거용 건축물을 임대하거나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 지은 럭셔리한 아파트와 콘도미니움도 포함되며, 그들은 베트남 정부 소유의 은행을 통해 금융 대출을 받아 이러한 부동산들을 소유한다.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 경제를 풀뿌리 차원에서부터 통제한다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국영 기업의 자회사들을 활용하고 있어서, 베트남인 공동체와 사업체들은 캄보디아 내에서 활발한 성장을 하고 있다.
훈센과 집권 CPP는 자신들의 공식 연설문에서 "크마에"(Khmer, 크메르: [역주] 캄보디아 주류민족이 자신들의 국가나 민족을 일컫는 말)라는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캄보디아 국민"(the people of Kampuchea)을 의미하는 "쁘러찌어쫀 껌뿌찌어"(prajia jun Kampuchea)라는 말을 사용한다.
게다가 크메르계 시민들은 자신들의 동쪽 이웃국가 사람들에 대해 "요운"(yuon)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요운'이란 말은 단순히 '베트남인'을 가리키는 캄보디아 낱말이다. 이 말 속에는 원래 베트남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종적 의미는 들어있지 않았다. 정치적 관점에서 정확히 말한다면, 크메르인들은 베트남인들을 공식적으로 "쫀찌엇 비엣남"(junjiat Vietnam)이라고 부르도록 하는 친-하노이 노선을 따르도록 강요당해 왔다. 크메르어에서 '쫀찌엇 비엣남'이란 말은 "베트남 민족 혹은 베트남 종족"을 가리킨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PRK: 1979~1989) 시대 및 '캄보디아국[國]'(State of Cambodia: 1989~1992) 시대의 정권은 베트남계 사람들을 지칭할 때 "벙빠오운 위엣남"(bang pa-aun Vietnam)이란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베트남 형제 자매"(elder-younger [siblings] Vietnam)란 의미이다.
크메르어에는 베트남인들을 비하하거나 경멸하고 인종차별적으로 경멸하는 다른 낱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요운'이란 말을 그렇지 않다. '요운'이란 말은 오직 1979년 이후부터 민감한 용어가 되었다. 1993년, ['캄보디아 국제연합 과도행정기구'(UNTAC)의] 서양인들은 이 용어가 인종차별적 비속어라는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베트남의 편을 들어주었다.
야당인 CNRP가 베트남인들이 보호를 받는 동안 크메르계 국민들이 체계적으로 희생당했다고 주장하자, 일부 캄보디아 정부 관리들과 해외 원조제공처들은 장차 베트남계 이주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지나 않을지 우려했다. 또한 야당이 선거부정 및 투표사기에 항의하여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를 주창하자, 많은 이들은 친야 성향의 시위대가 이러한 기회를 베트남계 인구에 대한 복수의 기회로 활용할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베트남군 병력 선발대가 8월15일 바삭 강(Bassac River)을 통해 캄보디아 영토 인접지역까지 배를 타고 왔다는 보도가 나왔고, 베트남 해군 전함들이 메콩 강(Mekong River)을 거슬러 프놈펜 방향으로 향하면서 무력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투표권을 상실한 사람이나 강제철거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쫒겨났던 빈곤층들이 주력인 크메르계 [야당 지지] 시위대는 중무장한 보안군 병력과 대치해야만 했다. 보안군 병력은 자신들의 뒤에서 고구경 기관총과 전차들, 그리고 장갑차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또한 최근 몇주 사이에 친야 성향 시위대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외국 기자들까지도 친여 세력으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풀뿌리 국민들이 조작된 선거에 대한 시위에 나서자, 서방의 여러 논평가들은 집권에 대한 CPP의 불법적 주장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캄보디아의 정치적 교착상태와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성장에 미칠 파장 같은 협소한 쟁점들에만 초점을 맞췄다.
결론적으로 분석해보면, 야당인 CNRP는 집권 CPP가 이끄는 정부에 결국 참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유세계의 어떠한 국가들도 베트남이 훈센과 CPP를 후원했던 방식으로 캄보디아 야당의 민주적 집권 권리 확보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야당인 CNRP가 현 정권의 정부에 참여하게 된다면, 정치적 변화 및 참다운 주권 회복을 위해 야당에 투표했던 수백만 명의 캄보디아인들로부터 지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진행 중인 일은 국제적 감시를 정당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의 정치적 교착상태가 오직 크메르인 대 크메르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평화와 안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1991년의 파리평화협정> 서명 당사국들이 동 협정 제5조에서 규정한 바대로 "이러한 참여가 존중받도록 보장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단계들을 채택하도록 하는 관점을 견지하여 즉각적으로 자문에 참여"해야만 한다.
국제사회는 <1991년의 파리평화협정>에서 캄보디아의 평화, 독립, 주권, 민주주의를 약속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캄보디아 정치에 현재도 계속해서 개입하고 있는 것은 <파리평화협정>의 비전과도 불일치하며, 그 핵심 원칙들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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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내)
본 매체의 '자유발언'(Speaking Freely) 코너는 외부 필자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를 개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고에 관심을 가진 이는 여기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우리의 모든 독자들은 '자유발언' 코너에 기고하는 일이 허용되며, 정기적인 기고자와는 달리 본 매체(ATO)의 편집방침에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된다.
(필자소개)
하싼 까셈(Hassan A Kasem) 씨는 지난 33년 동안 미국에 거주했다. 그는 과거 워싱턴 DC에 본사를 둔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14년간 근무했고, 현재는 '크메르 므짜 스록'(Khmer M'Chas Srok: KMS)의 미주 대표를 맡고 있다. KMS는 크메르인(=캄보디아 주류민족)의 합법적 권리를 대변하고, <1991년 체결 파리평화협정>의 정신을 보존하는 비영리 무정파 NGO이다. 하싼 씨는 과거 캄보디아 공군의 헬리콥터 조종사였다. 그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의 구치소 생존자이고, 1979년에 캄보디아를 떠나기 전까지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대항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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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마도 하싼 까셈 씨의 관점이
캄보디아 민족주의 진영의 가장 전형적인 관점인 동시에
현재 캄보디아 야당이 가진 시각에 가장 부합할 듯 합니다.
상당히 참조할만한 내용들이 많아서
이번에 "캄보디아-베트남 관계 특집"으로 넣어서 다뤄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러시아 학자의 논문 한편을 더 살펴볼 예정입니다만..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의 동향을 잘 살펴보면..
향후 우리가 베트남 및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해
여러가지 시시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의 공산당 운동 역사를 상세히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한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