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신보>와 「뎐씨 애국가」
김동수 (시인.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일제강점기 상해,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이 시가들은 1996년 필자가 미국 U.C. Berkeley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수집·정리한 자료들이다. 당시 국내에서 발간된 친일문학들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되리라 본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U. C. 버클리 대학에는 한국학에 관한 자료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그곳 동아시아도서관 (East Asian Library)에는 학계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희귀한 고전문학 자료가 아사미(Asami) 문고를 비롯한 한국학 자료실에 다량 수집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일제침략기 미주를 비롯한 해외 동포들의 문학작품들을 수집했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서 발간된 <공립신보→신한민보>(1905-1986)와 <태평양주보> (1930~),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대동공보>(1908-1910)와 <선봉>(1923-1937) 그리고 중국 상해와 만주 북간도 등지에서 발간된 30여 종에 달하는 신문·잡지 등에서 아직 알려져 있지 않는 항일민족 시가들을 1000여 편이나 발굴하게 되었다.
물론 이 중에는 국내문학에 비해 작품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볼 땐 미흡한데가 있었다. 하지만 한 시대의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선 작품의 예술적 가치 못지않게 그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시대정신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날 한민족이 참혹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참모습을 후세에 남기고자 본 자료를 공개한다.
Ⅰ. 미국 <공립신보→신한민보>
(1905.11.4.-1945.8.15.)
<공립신보(共立新報)>는 1905년 11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교포 단체인 ‘공립협회’가 발간한 신문이다. 당시 우리 교포들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감귤 농장의 노동자로 취업하면서 어려운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안창호 씨가 한국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유학을 포기한 채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11월 샌프란시스코 패시픽가에 회관을 설립하면서 교포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하여 회원들이 등사하여 매주 1회씩 발행하였으나 성금을 각출하여 1907년 4월 26일(제2권 1호)에 와서는 활자 인쇄로 신문을 발행하여 국권회복을 사시(社是)로 내세운 <공립신보>는 신문 간행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논설에서 밝히고 있다.
광무 11년(1907년) 4월 26일에 활자로 제2권 제1호를 출간하여 면목이 일층 새로워 보이는 점 군자의 마음을 신선케 하니 어찌 본보의 행복이 아니리오.. 이에 다시 강개한 말로 제위 동포에게 고하노니, 이제 국세를 돌아보건대 모든 권리를 다 외인에게 빼앗긴 바 되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어육의 박활을 당하니 신민된 자 누가 통탄치 아니하리오, 오늘부터 새 활판에 새로 출간 하는 새 신문을 새로 보고 새 지식을 발달하며 새 사상을 활발하며 동종상보하는 마음을 일백 번 꺾여도 돌리지 말며 일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말고 용맹 있게 전진하여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의 복 누리기를 천만 축수하노라.
- <공립신보>-제2권 1호- 1907년 4월 26일자 논설
이후 <공립신보>의 성격은, 국내 ‘신민회’에서 발간한 항일 민족기관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해외 대변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던 1909년 2월 10일부터 ‘공립협회’가 다른 여러 교민 단체들과 합쳐 ‘국민회’로 통합되면서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국민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2. 전명운 의사 스티븐스 저격하다
‘뎐씨 애국가’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교포신문 <공립신보>에 실린 시가이다. 이 작품은 1908.3.23 유학차 미국에 온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총독부 외교고문이며 친일파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후 어깨에 총상을 입고도 병상에서 쓴 애국가이다.
어화 우리 동포들아/ 일심 애국 힘을 써셔
四千년의 신성동방/ 신셰계에 빗내보셰
사농공샹 동력하면/ 대한뎨국 자연부강
자유독립하고 보면/ 세계상에 뎨일일셰
닛지말아 닛지말아/ 충군애국 닛지말아
일심하셰 일심하세/ 나라위해 일심하셰
건곤감리 태극기를/ 디구샹에 놉히날려
만세만세 만만세로/ 대한독립 어셔하셰
-전명운, 「뎐씨 애국가」, 1908. 4. 1. <공립신보>
전명운은 188년(고종21) 평안도 출신으로 블리디보스톡에 건너갔다가 1905년 하와이로 이주, 이듬 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철도 공사장과 알라스카 어장 에서 막노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조국 독립에 관한 관심이 많아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1908년 3월 20일 친일의 앞잡이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조선에 유리하며, 오히려 조선의 농민들과 백성들이 원하고 있다’라며 일본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명운이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를 찾아가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자 격투를 벌였다. 그러자 장인환이 나타나 권총 3발을 발사, 복부를 관통시켰다.
전명운과 장인환의 이러한 의거는 대한인의 울분과 기개 그리고 그 부당성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주 지역에서 숨죽이고 있던 8천여 한인들의 애국심과 국권회복 운동에 불을 지피는 전환점이 되었다.
첫댓글 하하하하하하하하! 이언 교수님께서 아주 큰 일을 하셨네요.
그 당시 독립을 고취하는 신문이 있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거기에 <-전명운, 「뎐씨 애국가」, 1908. 4. 1. <공립신보> 같은 것은
가사문학에도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지키시어 우리 덕화만발 가족에게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