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年未完의 꿈 운주사(雲住寺)를 찾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里 천불산(千佛山)소재-
가을이 되면 보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는 건 나이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병인가 싶다.
이미 만날 약속이 정해져 있는 사람마저 애틋하게 보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일일까.
푸른 하늘 마주할 때도, 잠시 눈만 감아도, 쌀쌀한 바람 스치는 오솔길을 걸어갈 때도,
떠나는 버스 뒷모습에도 마음이 일렁이며 자꾸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병중에도 重病이 분명한데 의사는 처방할 약이 없다는 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어느 한적한 시골기차역 찻집 앞을 지나는데 오디오에서 나직한 목소리와
단정한 기타선율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동안 멈춰 서서 노래를 들었다.
가수 김민기가 부르는“가을편지”였다.
종이에 손 글씨로 뭔가를 쓰는 일이 요즘은 무척이나 어색해져버린 지금,
왠지 따스하고 정겨우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같이 햇살 좋은날이면 혼자서 가까운 山寺에 들려 스님의 독경소리라도 들었으면,
인간번뇌와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으련만,
무작정 차를 몰고 운주寺를 찾았다.
운주寺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里에 있는 조용한 절이다.
화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2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태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개천寺, 서쪽에는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末寺)이다.
배를 운전한다는 뜻의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하는데 창건에 관한 이야기로는,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說,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說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 윤동, 김 여수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채, 종각 등이 남아있다.
1942년까지는 石佛 213좌, 石塔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21기,
석불 93좌만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塔과 굴 미륵석불, 9층 석탑(보물: 제796호),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부부와불(夫婦臥佛) 등이 있다.
내가 찾아갈 곳이 청산이냐, 세상이냐 어느 것이 옳을까 하며 시비를 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비록 내가 세속에 머물러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봄볕을 비추는 곳을 찾아가고
있다면 그곳이 어디건 꽃이 필 것이 아니겠는가.
내 몸이 비록 청산을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봄볕을 향한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꽃이 피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내 마음엔 그때 그 무렵 내가 순례하였던 그 청산들과 그 산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과 암자들의 모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고 있다.
요즘도 눈을 뜨면 나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고 싶다.
조그만 암자 속으로 들어가 온전한 내 모습과 싸우며 죽기를 각오하고 생사를 초탈하고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다. (최인호 수상록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중에서)
나는 태어나면서 부터 운명적으로 외로움이라는 배내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유, 소년기나 청년기를 거치면서도 벗어버리지 못한 체 내 몸 위에 덧 입혀져
지금껏 그대로 있는 것이다.
늘 슬픈 고독이 주변을 맴돌고 상주하며 끝없이 번지는 고뇌와 번민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청춘을 나약하게 살아왔다.
뽑아도, 뽑아도 사라지지 않고 억세게 되살아나는 끈질긴 잡초와 같은 想念들로
길 없는 길 위에서서, 나는 오랜 시간 서성이고 방황하고 있었다.
“나도 한 때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고교시절 눈보라 휘몰아치던 겨울밤 길을 잃고 해매다 찾아간 추월山의 암자와 스님,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지만 운명은 나를 산속에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못했다.
“세속의 인연도 끊어야하거늘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인연을 맺으려하느냐?” 하는
스님의 말씀도 뿌리치고 속세로 도망쳐 나왔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화순운주사는 지역적으로 광주와 가깝기 때문에 여러 번 다녀온 사찰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 산악훈련의 일환으로 천태山을 묶어 행군을 한 적도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추어탕을 먹으로 갔다가 들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1984년 이후 4차례 발굴과 석조불감 해체복원, 원형다층석탑 보수, 일주문 신축,
보제각 신축을 했으며 1997년에는 부부와불 진입路를 정비하였다.
그때만 해도 공사 때문에 도로도 협소했고 주차장도 없었으며 요사채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찰경내에 석탑 21기, 석불 93좌가 보존되어 있다.
아스콘으로 포장된 넓은 주차장 있고,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입장료도 받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그리고 스님들과 신도들의 생활 및 휴식 공간인 요사채도 필요한 만큼
있었으며 차(茶)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사찰경내의 많은 석불, 석탑은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정교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는데.
조성연대가 고려 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되며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한다.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小佛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매우 다양하였으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었다.
운주寺의 천불천탑은,
우리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嶺南보다
山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는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異座”란 기록이 있어
현존하는 석불석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가 있다.
또한 잘 알려진 운주사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인데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千年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했는데,
도선國師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은 童子 僧 한명이 “꼬끼오”하고 닭 우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올라가버려 결국 와불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곳이 서울이 된다고 전해오고 있다.
운주寺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긴 골자기를 이루고 있는 맨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은 높지 않아 언덕처럼 생겼으나 몇 년 전에 산불이 나서 숲은 별로 없었다.
사찰 뒤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 부부와불로 내려 올수 있는 산책로가 만들어져있고
필요한 곳에는 목제계단도 설치되어 있었다.
일반관람객은 별로 없었으나 보성에서 남녀 중학생들이 소풍을 와서 사찰이
시끌벅적하기도 했고,
석불세척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석불에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닦고 있기도 했다.
운주사 석조불감은
높이 5.0m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팔작지붕 형태로 그 안에 석불좌상 이체(二體)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는데 오늘은 작업을 하려는지 천막으로
가려져있었다.
운주사 원형다층석탑은
높이 4.7m의 고려시대 탑으로 이 석탑은 지대석, 기단부분부터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기단중석만은 10각인데 이 10각도 원에 가까우므로 이 석탑의 명칭을
원형다층석탑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 있어 이색적인 것으로서 고려시대에 이르러 많이
나타난 특이型 석탑이란다.
운주사 9層석탑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며 석탑 옆면의 꽃문양이 이색적이었다.
사찰 내 찻집에서 원두커피를 한잔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곡里에서 “우리 밀 팥 칼국수”를 먹고 왔다.
(2010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