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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나날 / 김종길]
경이로울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나는 요즈음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창밖 화단의 장미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이 영글고,
산책길 길가 소나무엔
새순이 손에 잡힐 듯
쑥쑥 자라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다반으로 보는
이런 것들에 왜 나의 눈길은 새삼 쏠리는가.
세상에 신기할 것이라곤 별로 없는 나이인데도.
아침의 노래
예전에 살던 동네에 낯선 간판이 새로 걸렸습니다. 거기에는 '시인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시를 공부하는 제게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도 미용실이나 통닭집처럼 번쩍이는 간판을 내거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간판을 내건 것으로 보아 상점 같기는 한데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주인이 차린 술집이라고 보기에는 입구가 너무 초라했고, 시인들이 묵는 여관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너무 작았습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시인의 방'은 놀랍게도 점집이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그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 점쟁이는 '철학관이나 '역술원' 따위의 이름 대신 '시인의 방'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던 것일까요? 아마 그곳의 주인이 시인이었을지 모릅니다. 점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시를 쓰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니면 그 주인이 시의 역사에 관해 꽤나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본래 시는 고대의 주술사나 예언자 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라는 종교학자는 샤머니즘에서 접신 직전의 도취 상태가 서정시의 보편적인 원천이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신과 소통하기 위해 주술사들은 일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신과 소통이 이루어지면 신의 언어를 인간에게 들려줍니다. 바로 그 언어가 서정시의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의 모든 시인은 고대 주술사의 후예들이고, 이 시대의 모든 점쟁이는 시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추리는 사실과 동떨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주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점집을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해서 그런 간판을 내걸었을지도 모릅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저는 그 간판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가 우리 일상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시는 시집 속에만 있고, 시집은 도서관이나 서점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를 자신의 삶과 무관하거나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시는 시집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시인이 쓴 것만이 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는 인터넷을 떠돌기도 하고, 신문이나 TV의 짧은 광고 문구에도 시라고 볼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또한 '시인의 방'이 허름한 동네에도 있는 것처럼 우리 주위에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가끔씩 자신도 모르게 시인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사 시집도 잘 읽지 않고 주위에서 시인을 찾기 어렵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시가 될 수 있는 시적인 것들, 시로 담아내기에 충분한 시적인 순간들이 일상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본 것은 누구라도 볼 수 있고, 시인이 느낀 것은 누구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시적인 것을 시로 창작해 시집으로 펴내지는 못하더라도 시적인 것을 느끼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인에게 일상이 시적인 것들로 가득하듯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 또한 시적인 것들로 충만합니다. 우리의 하루가 시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시인처럼 일상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시가 도서관과 서점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가 시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먼저 시를 대하는 시선이 바뀔 것입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을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시를 즐기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론과 공식만을 외우는 식의 수학 공부는 도무지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지만,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수학의 원리를 발견하면 수학 공부도 즐겁고 유익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상에 숨어 있는 시적인 것을 발견하면 시를 읽는 일이 즐거워지고 시를 통해 얻는 것 또한 풍부해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추면 삶이 통째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시집이나 영화에서만 보았던 시적인 순간을 실제로 경험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고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우리 모두 '시인의 방'이라는 간판을 내걸어도 될 것입니다.
아침, 시적인 것들의 향연
하루의 시작은 아침입니다. 또 가장 분주한 것도 아침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등교와 출근 준비로 온 가족이 허둥대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 침착하게 아침을 느낄 겨를도 없고 아침이 얼마나 시적인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아침형 인간이 되면 가능할까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아침형 인간이란 이른 아침에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 아침 시간을 활용함으로써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아침형 인간은 아침을 느끼고 아침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일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아침이 얼마나시적인지 느끼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잠시라도 아침을 응시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 여유가 있을 때 아침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선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아침에 관한 시라면 많은 이들이 박남수의 「아침 이미지 1」을 떠올릴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아침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어둠이 물러가면서 사물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그것을 낳는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둠이 사물을 낳는다'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사물이 어둠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시적인 생각 속에서 사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그것들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어둠이 가시고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죽었던 사물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상식적인 생각 속에서는 매일 같은 모습인 사물이, 시적인 생각 속에서는 매일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적인 생각 속에서 아침은 놀랍고 위대한 순간입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부모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신비에 놀라워하며 무한한 기쁨에 휩싸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도 그러할진대, 모든 사물이 탄생하는 순간은 어떻겠습니까? 마치 그것은 신이 우주를 창조한 순간처럼 위대하고 황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낳는다'라는 말을 통해 평범한 아침 풍경을 우주가 창조되던 순간에 비견할 만한 시적인 순간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면서 태어난 사물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사물들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이 말을 통해 노동에 관한 상식적인 생각을 비틀어 버립니다. 대개 사람들은 노동이라고 하면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노동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활개를 펴며 꼼지락거리기도 합니다. 아마도 아기에게는 그것도 노동일 테지만, 그 노동은 결코, 괴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위한 노동이자 우주의 순리에 화답하는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을 맞은 사물의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우주의 탄생을 위한 잔치를 맞아 즐기는 춤처럼 기쁨의 노동입니다. 이렇게 보면 등교나 출근을 위한 준비 또한 즐거운 노동에 속할 것입니다. 인간 또한 그러한 노동을 통해 새로운 우주의 탄생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을 맞아 벌이는 잔치에 태양이 빠질 리 없습니다. 시인은 그러한 태양의 모습을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라는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합니다.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 이미지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표현을 통해 시인은 우주 탄생이라는 잔치의 순간을 더 실감나게 재현합니다. 공감각적 이미지는 멋들어진 표현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잔치에 참여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잔치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시각과 청각 등 여러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감각들이 한꺼번에 느껴지기 때문에 잔치에서 느낀 감각을 따로 분리하고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감각만으로 잔치의 분위기를 온전히 재현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공감각적 이미지입니다. 공감각적 이미지는 여러 감각을 한꺼번에 제시함으로써 온갖 감각이 한데 어울려 있던 순간을 재현하기에 적합합니다. 흔히 소중한 것을 황금에 비유합니다. 또 여러 문화에서 황금은 태양이나 성스럽고 영원한 것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태양은 마치 신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개벽, 즉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고 난 후에 지상을 굽어살피는 신처럼 태양은 지상의 잔치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침이면 한바탕 잔치가 열립니다. 몸과 마음을 깨어나게 만드는 이미지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그러한 잔치와 향연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아침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을 '아침의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침의 인간은 아침형 인간과 다릅니다. 아침형 인간이 일찍 일어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아침의 인간은 아침을 느끼고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침의 인간에게 언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침의 인간에게 아침은 그것이 몇 시이든 눈을 뜬 순간이고,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입니다.
경이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지만, 새해가 되면 누구나 탄생과 출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오세영 시인의 「새해 아침」은 그러한 특별한 아침의 분위기와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하늘은 이미 어제의 하늘이 아니다", "들은 이미 어제의 들이 아니다", "바다는 이미 어제의 바다는 아니다”처럼 '어제의 ~는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시인은 그러한 반복을 통해 하늘과 들과 바다가 새롭게 탄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내일이 오늘인 이 아침"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내일을 꿈꿉니다. 내일이 오늘보다는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꿈꾸는 그러한 변화가 바로 새해 아침인 오늘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아침이 되면 괜스레 마음이 설레고, 알 수 없는 먼 항구를 향해 배를 띄울 만큼 희망을 품습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새해 아침을 맞아 세상이 새롭게 탈바꿈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아침 이미지 1」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세상은 매일 아침 새로운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1월 1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세상이 새롭게 태어나는 시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침의 인간은 그러한 사람을 말합니다. 모든 아침을 새해 아침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 매일 아침마다 희망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침의 인간이자 시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침의 인간에게는 정확히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아침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첫머리에 소개한 「경이로운 나날」에서 시인은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경이(異)란 놀랍고 신기한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아침마다 장미가 꽃피고 소나무 새순이 자라는 것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아침 이미지 1」에서 '즐거운 노동'과 '지상의 잔치'로 묘사한 것들이 이 작품에서는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이 항다반(恒茶飯)으로 보던 것들, 즉 밥과 차처럼 늘 익숙한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눈길이 쏠린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시인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펴낸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여든이면 세상의 갖은 풍파를 견뎌 낸 나이입니다. 맞이한 아침만 해도 수만 번이 넘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나이가 되어서야 아침이 경이롭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여든이 넘어서야 그는 아침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경이로울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나는 요즈음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는 구절에서 '아침'을 점심이나 저녁으로 바꾸어도 시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다 보니 잠들고 일어나는 시간도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정오쯤에 깨어나 이른바 '아점'을 먹는 사람도 있고, 야간 일을 마치고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야 잠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침을 느낄 겨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아침이 있고, 그들 또한 아침의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아침이라는 시어를 점심이나 저녁으로 바꾸어도 상관없는 것은, 아침을 아침이게 하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경이를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점심에도 장미꽃은 피어 있고, 저녁에도 소나무 새순은 자랍니다. 장미꽃과 새순을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는 순간, 즉 '즐거운 노동'과 ‘지상의 잔치'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 아침입니다.
오늘은 내일이 되고, 또다시 아침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주가 탄생하는 시적인 순간이, 이 글에서 소개한 세 편의 시가 여러분을 둘러싸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등교나 출근 준비를 멈추고 잠깐이라도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즐거움과 설렘과 경이를 만끽하시기를.
소래섭 교수와 함께 읽는 일상 속 이야기
『우리 앞에 시적인 순간』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