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월지 주차장을 거쳐 반월성을 한 바퀴 돌고 계림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월지 주차장을 지나면서 본 반월성 동쪽 성벽입니다.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여 성곽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이곳도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왕궁의 핵심 구역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월성 동쪽의 동궁(안압지)과 남궁(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사이의 건물지로 주로 왕궁을 지키는 군사들이 주둔하거나 훈련하는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궁궐이 확장되기 전에는 이곳이 시장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소지왕 12년(490년)에 월성 동쪽에 동시(東市)를 개설하였다고 했는데 아마 이곳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본 월지와 동궁. 과거에는 안압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신라의 대표적인 원지(정원 안에 조성한 못)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서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와 꽃을 키웠다고 합니다. 못 안에는 삼심산을 의미하는 세 개의 산을 조성하고, 연못 주위는 신선이 사는 무산 십이곡을 본떠서 언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연못이 모두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지를 바다에 비유하여 여기에 전각을 짓고 임해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월지 발굴 작업시 출토된 주령구. 주령구는 연회를 할 때 사용한 술과 관련된 놀이기구입니다. 육각면 8개와 정사각면 6개가 서로 맞물려 있는데 육각이나 사각이 면적이 거의 같아서 한 면이 나올 확률이 비슷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주령구는 1975년 안압지 발굴 작업 과정에서 출토되었는데 복원하는 과정에서 전자레인지의 전기 조절 장치가 고장이 나서 진품은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복제품만 남아 있습니다. 주령구 각 면에 적힌 술에 관한 명령은 당시의 술자리문화를 짐작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월지는 야경이 멋있어 사람들이 저녁에 많이 찾습니다. 월지는 그 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 되면서 호안 석축이 무너지고 연못은 토사물이 퇴적되어 옛날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1974년에 준설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이외로 신라의 유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준설 작업을 중단하고 정식으로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따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월지와 동궁은 오늘의 답사 코스가 아니므로 스쳐 지나가고 월성 동문지로 올라 섭니다. 월성의 동문지는 1979년부터 1980까지 발굴 조사하여 정면 1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문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성 밖 해자(垓子 성 주위에 방어를 목적으로 둘러 판 못이나 물길)의 일부가 확인되었었습니다. 이 동문을 통하여 황룡사나 임해전 등으로 출입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월성은 191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처음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뒤 계속 미뤄져 왔습니다.
↑월성 해자는 그후 1984년부터 지난해 2014년까지 지속적으로 조사 발굴 복원되었습니다. 원래는 자연적인 늪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수혈식(웅덩이식) 해자였으나 그 후 석축을 쌓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것도 몇 차례 걸쳐서 개축되었습니다. 월성해자는 통일신라 이후 궁성의 영역이 확장하면서 군사적 방어 기능에서 원지(苑池 )의 기능으로 옮겨 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반월성 발굴 현장. '신라 왕경 핵심 유적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 월성에는 발굴 조사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4년 12월 부터 2025년까지 2,700억원을 들여 이 지역을 조사 발굴하고 신라의 궁성을 복원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러나 사실 복원이라고 하는 것은 좀 무리인 듯합니다. 복원이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것인데 아직 신라 궁궐의 모습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월성에 도착하여 동쪽 성곽으로 오릅니다. 성곽은 일정한 공간을 군사적인 방어 목적으로 돌이나 흙으로 둘러싼 것을 말합니다. 월성의 성곽은 돌과 흙을 함께 써서 축조하였습니다. 성곽에 오르면 큰 돌들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토성 위에서 본 반월성 숲. 이렇듯 숲이 우거졌지만 월성지구 정비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이곳에는 민가와 논밭이 있었습니다. 민가가 철거되고 경작이 금지 되면서 이 월성 주위에는 많은 나무들이 식재되었습니다. 만약 성곽과 궁궐을 복원한다면 이 숲은 모두 사라져야 할 판입니다. 이곳은 참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도토리를 주으려 주민들이 많이 다녀갑니다. 2007년부터 1년간 진행된 월성 지하 레이다 탐사 작업에 의하면 저 곳이 건물이 가장 밀집된 곳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9월이라 아직도 날이 따갑습니다. 아이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숨이 가뿐지 쓰러진 나무 등걸을 의자 삼아 앉아 쉬면서 저기 아래를 내려다 봅니다. 정민이와 진욱이는 성 안쪽을 바라보고 앉습니다. 아이들 등 뒤로 월성과 동궁을 가로지르는 원화로가 보입니다. 월성이 본격적으로 복원되려면 저 도로부터 폐기되고 우회도로가 개설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윤석이는 지금 성 바깥쪽을 보고 있군요. 윤석이 등 뒤로 보이는 곳이 월성의 가장 동쪽 돌출부 지역입니다.
↑월성 동쪽 성곽에서 내려다본 황룡사지. 그 건너편으로 낭산과 명활산이 보입니다. 월성은 동쪽과 북쪽이 높고 남쪽과 서쪽이 낮은 구릉지입니다. 남쪽으로는 문천(남천)이 흐르면서 자연적인 절벽이 이루어져 인공적인 성벽을 쌓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월성은 동서의 길이 860m, 남북의 길이 250m, 성곽 둘레 1,840m, 성내 면적은 5만 9천 평으로 6만 평에 약간 못 미칩니다. 최근에 실측한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수는 뭘 그리 심각하게 보고 있을까?
↑저기 월지와 동궁이 보입니다. 동궁과 이곳은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신라 시대에는 같은 궁궐의 권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동문을 통하여 동궁으로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의 궁궐은 처음에는 이곳 월성이 아니라 금성이었습니다.
금성이 어딘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박혁거세가 처음 궁을 세운 창림사 일대라는 설과, '금성의 동남쪽에 월성이 있다'라는 기록에 의하여 지금의 첨성대와 대릉원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라는 설과, '금성 서쪽에 계림이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낭산 기슭이 아닌가 하는 학설 등이 있습니다. 경주읍성 안에 있던 문화고등학교가 충효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명사마을이 들어서면서 신라시대 유물이 적지 않게 출토되어 그곳이 금성일 것이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현재로서는 확인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성 위에서 본 해자. 최근의 발굴 작업으로 이 월성 주위에는 자연 늪지가 많았던 것으로 밝혀 졌습니다. 신라 건국 초기의 월성은 늪지에 둘러싸인 조그만 언덕이거나 얕은 산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궁궐이 이 월성에 한정되어 있다가 국력이 커지면서 점차로 월성 주위로 궁성이 확대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궁궐이 이곳에 한정되어 있었을 때는 저 해자가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궐이 확장되면서 북천과 남천, 그리고 서천이 그 역할을 하게 되고 해자는 조경의 기능이 중시되었을 것입니다.
↑태풍으로 인하여 넘어진 나무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쉴 수 있는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남천(문내)로 이어지는 월성 성곽. 금성에서 월성으로 궁궐을 옮긴 것은 파사왕 22년(AD101년)이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월성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몇년을 제외하고는 신라의 궁궐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처음 월성은 호공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집터를 고르던 중 이곳이 살만한 곳이라 여겨 호공 몰래 숯과 숫돌을 묻어 놓고 자기네 조상이 살던 곳이라고 우겨 집터를 빼앗았습니다. 후에 탈해는 왕이 되고 석씨의 시조가 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조선 철종 때 이곳에 석탈해 사당이 건립됩니다. 광무 10년 1906년에는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습니다. 1980년 월성 안에 있는 민가가 철거되면서 숭신전은 동천동 금강산 아래 탈해왕릉 옆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위는 숭신전이 있던 자리입니다.
↑숭신전이 있던 자리에 신라 월성의 우물이 있습니다.
↑월성 동남부 토성이 나무 사이로 보입니다. 이곳에 건물이 밀집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지하 레이다 탐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동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입니다. 이곳을 통하여 남궁(현재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출입하였을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월성을 한 바뀌 돕니다. 숲 사이로 남천이 보이고 시내 건너 남산이 보입니다. 월성을 남쪽 지역을 흐르는 남천은 문내라고도 부르는데 북천과는 달라 물길이 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 시내는 모래가 아주 곱습니다. 문내를 건너면 인용사지가 있고 도당산과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월성 남쪽에서 본 남천. 남천은 구정동에서 발원하여 불국동 앞으로 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이 월성 앞에서 물길을 서쪽으로 틀어 오릉 북쪽으로 흘러서 서천과 합류합니다. 월정교는 남천 남쪽 언덕과 북쪽 언덕을 잇는 다리입니다. 월정교 옆으로 보이는 것이 월성 남문지입니다. 월성의 남문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월성 남문지. 지금 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서문 발굴 조사 현장. 이 서문을 통하여 월정교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서쪽 귀정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북쪽에 귀정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월성에는 현재까지 모두 9 군데의 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월성의 문은 모두 12개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월성의 지표 조사 결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약간 차이가 납니다. 삼국사기에는 성곽의 길이가 1.8Km라고 했는데 지표 조사 결과에서는 2.4Km에 약간 못 미칩니다. 물론 성곽의 길이와 월성 전체의 둘레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석빙고에서 본 월성 발굴 작업 현장. 지금 월성에는 당시의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 그 흔적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진덕왕(진덕여왕)조에 조원전에서 왕이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는 기록과 또 효소왕 조에 일본국 사신을 맞아들여 숭례전에서 접견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조원전을 정전으로 하는 궁궐의 체제가 일찍부터 완비되지 않았나 추측할 뿐입니다. 이외도 편전이나 침전으로 추정되는 내황전, 왕비의 침전으로 추정되는 서란전 등이 월성 내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를 보여주는 안내판이 발굴 현장 앞에 서 있습니다. 3호 건물지에서는 정면 11칸 측면 2칸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습니다. 3호 건물지에 있던 건물은 그 규모가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주위에 담장이 둘러쳐진 것을 보면 매우 중요한 건물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곳은 레이다 탐사에서 대규모의 건물지가 있는 곳으로 추정된 곳입니다.
↑정문인 북문으로 추정되는 자리입니다. 당시 신라의 왕성은 당나라의 수도인 서안(장안)을 모범으로 하여 조성되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당시 장안에는 황성 남문인 주작문에서 외성 남문인 명덕문에이르는 넓이 155m, 길이 5020m인 주작대로 도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만호가 살았다는 신라의 왕경에도 주작대로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상상하여 왕경도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월성의 주작대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주작대로가 있었다면 여기서부터 북천 성동동 전랑지까지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석빙고 석비입니다. 석빙고의 축조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육안으로 식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석빙고. 환기구 세 개가 나란히 보입니다. 이 석빙고는 신라시대의 것이 아니라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된 것입니다. 원래는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100m 되는 지점에 목조를 건물을 지었으나 4년 뒤인 1741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때 왕이 얼음을 저장하라고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석빙고가 신라시대 석빙고를 개축한 것인가 아니면 조선시대에 전혀 새롭게 조성한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석빙고 입구. 석빙고는 얼음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겨울에 강에서 얼음을 캐어서 여름까지 보존하는 곳입니다. 과거에 왕실에서는 여름이 얼음이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특히 왕이나 왕비, 대비가 승하하였을 시에 장례 기간이 몇 달이 지속되기 때문에 시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많은 얼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얼음이 왕실의 소용보다 많기 때문에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석빙고 내부. 북쪽 벽 끝에 배수구가 보입니다. 저곳으로 얼음이 녹은 물은 흘러내려가 월성 밖으로 빠져 나가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는 여러 군데 있지만 그 가운데 경주의 석빙고가 가장 규모있게 축조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 6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빙고 앞 발굴 현장. 그 앞으로 우리가 돌아나온 월성 동쪽 성곽이 보입니다. 지금은 울창한 수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곽에 나무가 크게 자라면 나무 뿌리에 의하여 성곽이 자연적으로 손상되게 됩니다.
↑월성 북쪽 성곽입니다. 여기가 성곽 가운데 가장 높은 곳입니다. 이곳에 망루가 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여기는 평지에 흙과 돌을 쌓아 높였는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조그만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토성을 쌓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월성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동문지로 내려 옵니다. 계림으로 들어서는 길 입새에 신라왕궁영상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매시 정시와 30분에 디지털로 복원된 신라 왕궁 영상을 상영합니다. 상영 시간은 17분 정도입니다. 디지털 영상 자료 제작비가 5억원 이상이 투입되었습니다.
↑서쪽 벽에는 디지털로 복원한 신라 왕경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경주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신라 왕경 상상도. 도시가 북천을 넘어 소금강산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가운데 큰 도로가 주작대로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주작대로가 있었다는 추정은 좀더 시간을 두고 검증을 해 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황룡사 주변을 확대하여 보겠습니다. 우리가 온 북천이며 분황사, 황룡사지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월성 북쪽 성곽 바깥 해자도 지금 복원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물도 채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월성의 해자는 형태가 아주 독특합니다. 이는 하천을 통하여 물이 공급되지 않고, 또 월성의 지형이 동북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아 물이 빠져 나가면 채워지지 않으므로 연못의 형태로 물을 가두어 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궁성이 확장되면서 해자의 군사적 목적보다 미관이 중시되었거나 생활용수 공급 기능이 고려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못과 연못은 도랑으로 연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것을 해자라 부르지 말고 구지(溝池 도랑과 못)라 불러야 된다는 주장도 제기합니다. 이 해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없고 유일하게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진위 논란이 지금도 계속되는데 이 해자에 대한 기록과 포석정에 대한 기록이 위작이 아님을 주장하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화랑세기에서는 해자라 하지 않고 구지라고 표기하였습니다.
↑계림으로 가는 길. 과거 궁궐의 전각이 있거나 관아가 있었을 자리에 꽃밭을 조성하고 목화를 심었습니다.
↑목화밭을 가로 질러 계림으로 갑니다. 이 월성 앞 목화밭은 궁궐의 전각이 있었거나 아니면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오른편으로 첨성대가 보입니다.
↑옛날과 달리 첨성대 담을 철거하니 훨씬 더 경관이 산뜻해 졌습니다. 첨성대는 오늘 답사 코스가 아니어서 멀리서 그냥 보고 지나갑니다.
↑정민이 자전거 타는 자세가 아주 멋집니다.
↑아이들에게 목화밭이라고 하니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입니다. 목화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면 나중에 열매가 벌어져 하얀 솜이 나온다고 해도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지난 11월 5일 가서 찍은 목화밭 사진입니다. 열매가 터져서 솜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솜을 타서 무명옷을 지어 입습니다.
↑자, 진욱이 출발!!
↑마지막으로 희주가 출발하였습니다.
↑계림에서 월성으로 출입하는 곳 왼쪽 성터입니다. 돌과 흙으로 성을 쌓은 흔적이 선명합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뿌리가 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일단 점심을 먹고 계림을 답사하기로 합니다.
↑점심은 김밥 도시락 하나이지만 아이들은 시장한지 맛있게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