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서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도록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선택하여’자기와 교제를 갖도록 ‘부르신’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들' 또는 '성도’들 입니다. 그러므로 ‘선택’, ‘부름’, ‘성도들’ 등은 같이 쓰이는 말이거나 동의어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스스로가 이스라엘의 이상을 실현한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쓴 칭호를 모두 자신들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고린도인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대속과 화해의 제사로 드림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거룩해진’ 또는 '성화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들’이 된 고린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같이 살아서는 안 되고, 자신들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을 진지하게 의식한다면 자연히 그들의 삶에 도덕적 열매가 펑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도덕적 상황은 바울로 하여금 개탄해 마지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편지의 서두에 두 번이나 고린도인의 ‘거록한’ 하나님 백성됨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인간들을 위한 구속의 행위로서, 즉 인간들의 공로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먼저, 그리고 거저 베푸시는 구원의 사랑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근거입니다. (15:10 참고), '평강'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이 누리는 전체적 안락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8:6 참고).
*우리의 구원이 우리 손(우리의 행위, 또는 심지어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셔서 그 구원의 덕을 입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에 달려 있기에 우리는 모든 부족함에도 궁극적 구원에 대해 확신과 안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정론' 의 근본 논리요. 의도인 것입니다.
*인간은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는 지혜를 추구하여 자신의 삶을 풍요롭고 평안하게 하려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그는자연을 관찰하여 이치를 터득하고 자연의 힘 또는 자원들을 이용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생명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는 이 세상을 관찰하면서도 이 세상 만물이 나타내는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는 힘(이성)을 주신,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 채 날로 더 많은 지혜를 얻어 더욱더 풍성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만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혜를 얻어 자신의 구원(곧 아무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삶)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도 제한된 피조물이고 그의 세상, 곧 자연도 제한된 자원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의 지혜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은 제한성 또는 결핍성으로 얼룩진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지혜로 얻는 것(문명)은 삶을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죽음(고난)을 확대하는 변증법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 구원(죽음의 이면이 없는 온전한 삶)은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습니다. 초월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구원의 행위를 하셔야만 인간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하도록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바로 그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이렇게 초월자(무한자)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행위였기에 그것은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에 그것에 대한 선포는 복음입니다. 또 그러기에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아예 '십자가의 말씀'이란 말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대표적으로 헬라인)에게는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가 있습니까? 가장 처절한 패배와 무능력의 상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자를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에 의해 처형된 '죄수' 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위대한 철인이나 영웅호걸이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구원자에게서는 마땅히 기상천외의 이
적이나 경천동지의 행동을 기대하는 종교인(대표적으로 유대인)에게는 메시아 또는 구원자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은 모순을 넘어서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말씀' 이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요 ‘구원의 지혜' 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말씀을 믿는 자들’ 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님 십자가에 달림, 곧 이 세상
의 지혜로 판단할 때 미련한 것' 이요 걸림돌 되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우리 '지혜' 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먼저 작정하고 우리를 믿음에로 '부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21, 24절).
믿는 자들인 우리는 '십자가의 말씀이’ 초월자에 의한, 초월자의
사랑의 시위이기에 구원의 힘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죄, 곧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그 죽음의 증상인 고난을 초래합니다. 사랑만이 치유의 힘을 갖습니다. 초월자의 사랑만이 절대적인 치유의 힘, 곧 구원의 힘을 갖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관점에서야 비로소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연인의 지혜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오묘한 구원 방법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자', 믿음으로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될 구원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말씀’ 또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지혜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같은 생각을 이중 삼중으로 강도를 더 하여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하게 태어난 것’ 아무 존재도 없는 것'을 택하신 것은 인간의 지혜, 능력, 문벌 등을 폐하려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 능력, 문벌 등을 폐하려 하십니까? 그것은 이것이 마치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양 환상을 주어, 인간들로 하여금 이들을 믿고 의지하게 하고, 진정한 구원자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우상이 되어 그것을 소유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감과 자만심을 갖도록 하는 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분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도록 부르시는 분입니다(롬 4:17).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문벌도 없는 고린도의 노예와 천민을 하나님의 고귀한 아들로 창조하시어 자신의 무한한 지혜, 무한한 능력, 거룩한 위엄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가 전혀 없는 죄인이게 의를 주셔서 의인이 되게 하시는(롬 4:5)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입니다. 고로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입니다(고후 5:17 참고), 구원은 인간이 쌓은 지혜나 선행 또는 능력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상 주심도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로서 그의 주권자적 자유와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얼마나 큰 역설입니까? 이렇게 대제사장이나 빌라도(그리고 그 뒤에서 그들을 조종한 사단의 세력)가 하나님의 '지혜로운 구원의 계획'을 모르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반역하였지만, 하나님은 오묘하며 지혜롭게 그들의 반역을 이용해서라도 만세 전에 정하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고야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 인간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께 대항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적 또는 세상적 지혜의 무지함 (1:21/2:8)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지혜는 승리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움'과 능력,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인간의 반역까지도 이용하며, 자기 뜻을 관철하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고전 1:25/3:19)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믿는 자의 확신과 위안, 곧 이 세상이 사상과 가치와 윤리의 혼돈 속에 있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지혜로운 통치 - 섭리)가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에게 반역하여 이 세상이 온갖 위기 속에 있지만 하나님은 그 반역을 이용해서라도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비관적 역사관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으로 비관을 극복하고 궁극적인 낙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지혜,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의 구원의 계획은 이 세상에 속한 지혜가 아니어서 어떤 인간도 보지 못하고, 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2:6-10)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지혜 개념과는 정반대인 '하나님의 지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메시아, 곧 구원자로 깨닫고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며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미리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의 먼 눈을 띄우시고 우리의 눈에 그 ‘하나님의 지혜’ 즉 구원의 계획을 환히 드러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구원의 계획,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그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으로서 모든 것을 통달하는 분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 즉 하나님의 속마음 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뚫어볼 수 없이 신비스런 하나님의 마음속의 생각(계획)까지도 통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직분관의 두 가지 특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내의 모든 직분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심지어 사도직도 섬김, 디아코니아입니다(롬 11:13, 고전 3: 5. 고후 6:3. 행 20:24/21:19). 둘째는 교회 내의 모든 직분은 모두 디아코니아로서,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디아코니아의 다양한 형태에 있는 것이지(고전 12:5) 권위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아볼로도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 고용되고 임무를 받은 종, 디아코노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종이지만, 복음으로 성도를 섬기도록 위임된 종이기에 성도들의 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고후 4:5).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종말의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고(또는 ‘첫 맛' 을 보았고, 그 구원의 완성을 받을 것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완성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실재입니다. 성령은 그 구원의 첫 열매요, 보증금이며, 이 세상에 서 우리의 구원의 체험은 첫 맛을 보는 것이요, 보증금을 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죄악과 고난의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죄악과 고난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인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이 벌써 하나님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얻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 살면서 하나님 통치에 참여하는 양 착각하고, 그러므로 이 세상의 제약을 초월한 자를 자처했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합니다.
"너희는 이미 배부른 자들이 되었구나 (너희는 벌써 부요한 자들이 되었구나), 우리를 떼어 놓고 너희는 벌써 왕이 되었구나! 실제로 너희가 이미 왕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의 왕 노릇함에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 (개역 성경 번역은 본 절의 후반부의 뜻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에 유의)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모든 죄악을 쓸어내 버리고 순결해져야 한다고 권면합니다(명령형), 이 권면(명령)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미 깨끗케 되었음 (서술형, 벧전 1:2 참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명령형과 서술형의 이러한 조합은 바울의 윤리의 근본 구조입니다(참고: 롬 6. 11-14, 19, 골 2:20-3:14 등),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구원의 사건/ 서술형)이고, 둘째, 오로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죄를 피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구원의 상태/ 서술형)이며, 셋째,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야 한다(윤리적 행위 / 명령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 (서술형)이 없었으면 우리는 윤리적 행위(명령형)를 할 수 없습니다. 전자가 비로소 후자를 가능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인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죄악을 소제해야하는 또 하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가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입니다(요 1:29, 고전 15:3-5, 고후 5:21 참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속죄된 것입니다(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자가 되었음).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 후 그리스도인은 그 제사가 이룬 유월절 구원의 축제 속에 삽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는 묵은 누룩을 쓸어내듯이, 고린도교회도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는 악독함과 사악함이라는 ‘묵은 누룩'을 쓸어내 버리고 즐겨야 합니다.
* 예수께서 하나님나라' 라는 개념과 함께 즐기 쓴 동사(오다, 주
시다. 들어가다, 받다) 중 (유업, 즉 상속으로) '받다' (예 : 마 25:34/55/19.29 참고)라는 동사를 특별히 애용합니다. 이 동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다' 와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나라는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나라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 (성도)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 가 되었으므로 장차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상속 또는 '유업' 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계속 머무르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여기 나열한 것과 같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격되고 종말의 하나님 나라에서 탈락하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벌써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이라도 하는 양 착각하여 영적으로 들떠 온갖 육신적 죄에 대하여 경각심을 잃고 있는 고린도 인이나(1:8-21),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하여 지금 여기서의 윤리적 삶(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과 관계없이 종말의 구원을 보장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른바 '구원파' 사람들에게는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절 '너희 중 몇은 이와 같은 자들이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그러나 씻겼고, 그러나 거룩해졌고, 그러나 의롭게 되었다.
여기서 그러나 라는 표현이 세 번 되풀이되어 각 동사 앞에 나옴
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고린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예: 행2:38) 성령을 선물로 받았는데(12:13), 그때 그들은 죄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앞서 9-10절에 나열된 죄를 저지른 자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받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여 사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된 것입니다(서술형). 그런데 그들의 재판 행위는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서 삶을 살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너희의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으
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실제 삶에서 실증하라‘ (명령형).
* 12절 “모든 것이 내게 허락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내게 허락된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않겠다. '모든 것이 내게 허락된다’ ‘내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또는 ‘내게는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자유주의자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은 이 구호를 여기에 되풀이하여 인용하면서 일단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두 가지 논평으로 대응합니다. 하나는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또 하나는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않겠다'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을 지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자유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그의 자유를 무책임하게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갈 5:13, 벧전 2:16 참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를 자기뿐 아니라 남에게,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유익하게 써야 합니다. (10:23 참고), 오로지 사랑과 사랑에 근거한 행위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8:1).
바울의 두 번째 논평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여야 한
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 이름 아래 방종함은 실제로 자신의 욕망이나 나쁜 버릇의 노예임을 증명하는데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방종은 자유보다 더 큰 것이 아니라 더 작은 것입니다.
*9절 ‘너희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이고 너희의 것이 아닌 줄로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는 성령의 거처,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3:16 참고), 본문에서 바울은 각 그리스도인의 몸이 성령의 거처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그의 몸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 됨과 순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바울은 교회가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도덕성이 위기를 맞을 때 성령이 각 개인 안에 거하심을 상기시켜, 성령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또는 개인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걸으리'는 말은 삶의 길을 가라, 살아가라는 뜻의 유대교식의 숙어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소명)은 우리 각자를 저마다의 은사로 갖추게 해서 저마다 다른 처소에서 주를 섬기도록 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소명)은 사명 또는 직업으로의 부르심(소명)을 내포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소명이 임한 그 처소
에서 주께서 주신 은사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의 혁명적 태도가 바울로 하여금 이 가르침을 주게 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모든 교회에서 똑같이 천명하는 원칙입니다 (17절하).
바울은 당시 두 가지 중요한 신분적 대립 관계에 이 원칙을 적용합니다. 하나는 종교적 대립 관계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대립 관계로서 자유인과 종입니다.
*8장 1절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해서 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강한 자들', 지식 있는 자의 구호가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지식은 우리를 부풀리게 하고,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교회를 세워 올립니다. 바울은 10장 32-33절에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이웃을 사랑함과 교회를 세워 올림을 뜻합니다. 이것은 8장 1절과 짝을 이룹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서로서로의 믿음을 세워 올립니다. 믿음을 세워 올린다는 것은 교회를 세워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8장 1절이 10장 32.33절과 짝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 수미쌍관(雙N, inclusio)이라고 합니다. 8장 3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는 10장 31절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와 짝을 이룹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함의 원칙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는 데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음식을 어떤 계제에 먹는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함에 반하는 것인가를 따져 결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이웃 사랑은, 그 행위가 이웃의 믿음과 삶에 걸림돌이 되는 행위인가, 이웃의 믿음과 삶을 북돋는 행위인가를 따져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마지막에 전체를 요약하면서 바울은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10:33)고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함은 물론,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이웃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교회든 누구든 걸림돌이 되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섬겨서 그들도 구원 받게 하는 방향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세워 올리는 원칙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 3절 ‘그러나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는바 된 자다.’
‘하나님이 아는 자' 라는 말은 구약부터 하나님이 선택해서 자기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자라는 뜻입니다.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오로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도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랑의 관계(연합)를 갖도록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로부터 이웃을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호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의 뜻, 곧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는 고린도의 지식파처럼 교만하고 경거망동하게 하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인 지식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중심적인 사랑의 원리로 풀어 가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위의 이위일체론적인 신앙 고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와 구원의 중보자라는 사상은 구약과 중간사 시대의 지혜신학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약과 유대교의 의인화되고 실체화된 지혜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을 지혜 기독론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바울이 이것을 초대교회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 그리고 사도가 되게 한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의 계시와 관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고후 4:4-6.골 1:15 등)이라고 한 것과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 (롬 10:4)이라고 한 것이 바로 지혜 신학, 곧 지혜 기독론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 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울 서신에만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는 것' 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바울 신학에만 등장하는 카테고리입니다. (롬 8:29. 고후 3:18, 빌 3:21 등), 이것이 바로 다메섹에서 바울이 받은 계시의 체험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범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 기독론이 잘 나타나는 8장 6절의 신앙 고백도 바울이 만든 신앙고백이라고 볼 여지가 많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고, 그가 또 우리 가운데 오셔야 우리에게 구원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보다 크신 분이고 우주 밖에 계셔야 고장 난 우주를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초월성). 우주 속에 포함되는, 그러기에 우주보다 작은 신이 어떻게 고장 난 우주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은 구원의 한 조건입니다. 그러나 그런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슬람의 알라처럼 이 세상에 오지 않고 하늘 꼭대기에 홀로 고고히 앉아 있으면, 어떻게 고장 난 우주가 고침을 받고 우리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가 이 세상에 오셔야, 이 세상에 그의 전능의 손을 내밀어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내재성), 그러기에 하나님의 내재성은 구원의 또 하나의 조건입니다. 초월의 하나님이 그의 딸인 그의 지혜를, 또는 그의 아들인 그의 말씀을 ‘보내셔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사상은 구원의 두 조건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적 수단입니다. 곧 하나님이 초월하시며 전능하시며, 동시에 우리와 함께 내재하시는 분(임마누엘)이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짐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조금이라도 전능하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런 올바른 이해가 있을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안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무책임한 삶과 부도덕함을 조장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로서만, 즉 그의 사랑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그에 대한 신뢰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진정한 '구원의 확신' 은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관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생각과 삶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의지가 내게서 확인되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러 주신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계속 그 관계 속에 지탱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안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지가 약해지거나 흔들릴 때, 우리는 스스로 불신앙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자신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불신앙의 유혹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려는 결단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구원의 관계)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그때 있을 구원의 완성까지 우리의 믿음은 완전할 수 없고, 사단의 세력과 공격에 계속 노출되어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결단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신적 소명은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세속적 직업은 신적 소명이 아닌, 생계유지 수단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 루터가 고린도전서 7장 20절 등에서 깨달아 모든 직업에 신적 소명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각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 각 사람은 그 소명, 곧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그 직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모든 직업은 우리가 이웃에게 사제 역할을 하는 장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바로 우리가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직업은 단지 생계유지 수단의 의미뿐만 아니라, 신적 의미를 가졌으며 우리는 저마다 직업에 충실해서 직업을 이웃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 윤리가 시작됩니다. 이것을 더욱 강화한 인물이 바로 칼뱅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의 구체적인 증명이라고 보고 성실한 직분 수행을 가르쳤습니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바로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루터에 의해서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으로 재발견됨으로써 종교적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면, 루터와 칼뱅에 의한 바울의 소명사상 재발견은 사회 문화적 혁명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은혜의 복음이 값싼 복음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구원의 종말론적 유보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출범하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첫 열매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두 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고후 5:10), 그때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신약 성경에는 구원과 관련해서 세 가지 시제를 사용합니다.
과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미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구원을 받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구원을 받아 가고 있다.
이미 받은 구원은 첫 열매로서, 장차 받을 완성된 구원에 대한 보증금입니다(롬 8:23. 고후 1:22), 그러나 이 보증금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구원의 관계에 서 있을 때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의에는 보다 기본적인 관계론적 측면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의(義)는 기본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으로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이란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관계 속에 있는 양 파트너에게 서로에 대한 의무를 부여합니다. 예컨대, 부자 관계는 아비에게 자식을 잘 부양할 의무를 지우고, 자식에게는 아비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를 지웁니다. 관계 속에 있는 두 파트너가 자기에게 지워진 의무를 다 행하면 그 관계는 원만하게 됩니다. 바로 이 원만한 관계를 '샬롬'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는 관계의 신실함 또는 원만한 관계, 즉 샬롬(화평)을 이루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불의라고 합니다. 불의는 관계를 갈등으로 만듭니다. 불의는 갈등을 초래합니다. 탕자의 비유(눅 15:11-32)는 예수께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이야기를 새롭게 한 것입니다. 아담(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에게 지워진 의무, 즉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자원으로 살겠다고 주장하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멀리 가 버린 비극을 인간의 근본 문제로 설명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무를 다 하지 않은 아담(인간)은 그러니까 불의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불의의 행위(죄)의 대가는 이방인의 종이 되고 결국 굶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었습니다(롬 6:23 참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을 저버렸다 하여 마찬가지로 인간을 저버리시면 하나님도 인간에 대한 의무 (하나님 노릇해 주심, 아비 노릇해 주심)를 다하지 않아 '불의’하게 되는데, 그런 경우 인간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복음' (기쁜, 또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자기 의무를 저버리고 불의해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즉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 피조물에 대한 의무(하나님 노릇해 주심, 아비 노릇해 주심)를 다시는 분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위임을 받고 와서 하나님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결국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죽음을 맞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 주심이며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는 아비 노릇해 주심이다. 이 하나님의 하나님/아비 노릇해 주심에 힘입어 죄인들의 죄가 용서되고(부정적인 표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 (긍정적 표현),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적 결핍성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충만한 부요함을 힘입어 '영생 (신적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미 계시되었기에, 즉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이미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에 힘입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즉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첫 열매인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구원의 완성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론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제 진입한 것을 뜻합니다. 종말론적 유보 상황에서 의인으로 칭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우리에게는 이제 그 관계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것입니다. 그 관계 속에 계속 서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 때까지 계속해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도 넘어질 수도 있다고 바울은 경고합니다. (10:12).
그러므로 우리는 옛 아담의 죄를 되풀이하지 말고, 하나님과 회복한 그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으로써 서 있어야 합니다.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우리 쪽의 의무 -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 - 를 다하여 그 관계 속에 계속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모두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모두는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는 '의인' 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 신학을 보면 두 가지 측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그와의 올바른 구원의 관계에 진입시키시고 끝까지 그 속에 지탱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를 다함으로써만 그 관계에 계속 서 있게 되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아담의 범죄를 되풀이하게 되어 구원의 관계에서 스스로 퇴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 안도함을 주고, 후자는 우리에게 성화의 노력을 촉구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 두 가르침의 논리적 대립보다는 그것이 각각 가진 의도적 측면에서 통일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논리적 긴장 가운데 함께 유지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입니다. 전자가 주는 구원의 확신과 안도를 즐기면서, 동시에 이 안도함이 지나쳐서 방탕함으로 흐르지 않을까 늘 하나님 앞에서 자성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성화 또는 제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진정으로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으로 가르치신 것은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혼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형태의 우상 숭배를 가장 크게 경계하셨는가요? 바로 맘몬 재물이었습니다(마 6:24, 눅 16:13), 탐욕은 맘몬에 대한 우상 숭배(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사랑의 거부)에서 나오는 죄악이고, 증오심이나 음란함은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죄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심장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거스르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하나님,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기도 합니다. (롬 8:9-17, 갈 4:6),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신앙 고백만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님의 주권을 체험하게도 하고, 그 주권에 따르는 삶을 살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령의 현상 /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예수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체의 행위 (‘예수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그것이 아무리 신비스럽고, 황홀케 하는 것이라도 성령의 현상/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의의 길과 다른 행위와, 주 예수께서 도모하시는 구원과 상반되는 어떤 사상이나 가치나 행위도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항상 의와 사랑, 화평, 해방, 치유가 도모되지, 죄악이나 증오, 갈등, 억압, 상처 등이 도모되지 않습니다(갈 5:16-26 참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의를 행할 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 예수의 주권에 순종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악을 저지르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주 예수의 영으로서 주 예수의 주권을 드러내는 존재인데, 예수께서는 누구에게도 죄악을 저지르라고 하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 그는 최후의 만찬의 극과 말씀을 볼 때 예수도 자신의 죽음을 이사야서 53장의 예언에 따라 해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가령 로마서 4장 25절( 우리 주 예수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넘겨졌다. 그리고 우리의 의인됨을 위해서 일으켜졌다 )의 '넘겨졌다' 는 전형적인 셈족(히브리어/아람어) 어법임을 지적하며, 본문 3절하도 원래 게바와 야고보 등 아람어를 쓰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그리스도는 우리 죄로 인하여 넘겨졌다' 라고 한 것을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고린도인에게 헬라적 어법으로 고쳐 전승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아들을 넘겨주셨다'는 이른바 '넘겨줌의 형식’은 신약 성경의 한 중요한 복음 선포 양식입니다(예: 요 3:16. 롬 8:32, 갈 2:20), 이 넘겨줌의 형식은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인자가 넘겨질 것이다' 라는 문장 형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곤 한 것 (막 9:31 /10:33/14:21)에 상응하여, 그의 부활 후 아람어를 쓰던 초대교회가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넘겨졌다' 라는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유다에 의해 유대와 로마의 관원들에게 넘겨짐을 뜻하지만(막 14: 20-21, 44 참고), 보다 깊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사로 ’넘겨주심'을 신적 수동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롬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