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군주' 효종의 후손들
현종의 외아들인 숙종(肅宗, 1661~1720)이 재위했을 당시 중인(中人) 출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
가 그토록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효종의 자손이 '단절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경종과 성수(盛壽)라는 두 왕자를 낳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賤)하다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淑嬪 崔氏)가 최고위 후궁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같았다. 자손이 귀하다못해 낳기만하면 당장 신분의 변화를 줄 정도로 남아에 목이 타는 왕실에 영조와 영수(永壽) 그리고 이름도 없이 조졸(早卒)한 세 왕자를 낳아주어 '후궁의 꽃'인 정1품의 빈(嬪)에 승격된 것이다. 숙종은 세 명의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첫 왕비가 공주 두 명을 낳고 죽은 것 이외엔 뒤에 들어온 두 명의 정실(正室) 왕비에겐 자녀가 없다. 후궁에게서만 6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아버지보다 오래 산 자녀는 단 두 사람이다. 경종(景宗, 1688~1724)과 영조(英祖, 1694~1776)로 이들 모두 조선 국왕이 되었다.
숙종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후계자 경종이 두 번의 결혼을 통해서도 자손이 없자, 결국 주변에선 양자(養子)을 들여 후사를 잇게 하려는 시도가 생기는데 이 문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정치적 극한 대립 속에서 고육책(苦肉策)으로 생각해 낸 계략이었다.
바로 노론의 후원을 받는 영조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당시 권력을 쥔 소론의 숨은 계책이었던 것이었다. 이 비밀스러운 계략의 대강을 살펴보자면, 효종의 자손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조보다는 효종보다 대통(大統)이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던 소현세자의 후손 중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종친(宗親)을 데려와 '경종의 후사'로 세우자는 논리였다.
이 비밀스러운 계책에 구체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소현세자의 현손(玄孫)이었던 건석(健錫)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결국 경종이 친척의 자식보다는 이복아우를 선택함으로서 건석은 훗날 영조의 즉위 후 유배되는 비운을 겪게된다. 정치적 논리에 앞서 경종은 최종 후계자로 효종의 유일한 후손으로 남겨진 이복동생을 선택함으로서 영조의 치세가 시작되게 되었다.
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무수리의 아들 '영조'
영조가 형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으로 즉위할 당시 효종의 성년 남자 자손은 영조 뿐이었다. 영조는 평생 정실 부인을 두 명 두었는데 그의 조강지처는 1704년(숙종 30년) 10세 때 맞이한 대구 서씨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였다. 유순하고 천성이 후덕했던 이 왕비는 불행히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영조는 후사를 얻기 위해 왕이 되기 이전부터 여러 측실(側室)을 얻었고, 그 결과 훗날 정빈(靖嬪)에 책봉된 이씨(李氏)에게서 1719년(숙종45년) 아들을 얻게 되는데 당시 숙종에겐 유일한 손자였고 또한 영조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당시 후손이 있는 왕자는 왕위계승에 상당히 유리한 인센티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영조의 희망은 훗날 진종(眞宗, 1719~1728)에 추존되었는데 바로 정조의 양부(養父)이기도 하다. 이름은 행(緈, '실 사'변에 '다행 행'자를 쓴다)으로 영조가 즉위하자 왕자로서 경의군(敬義君)에 책봉되고 이어 1725년 세자(世子)가 되어 양주 조씨 조문명(趙文命)의 딸(훗날 孝純王后)과 혼인하였으나 만9세로 사망함으로서 효장세자(孝章世子)라 시호되었다. 효장세자의 죽음으로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735년(영조11년)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 李氏)가 다시 왕자를 낳는데 이가 바로 장조(莊祖, 1735~1762)였다. 장조는 나중에 추존된 묘호이고 처음 시호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마음 심'변에 '펼 선'을 쓴다)이며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로 영조의 차남에 해당된다.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영조의 기쁨은 극에 달했다.
왕자의 탄생에 흥분한 영조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세 종통(효종, 현종, 숙종을 말함)의 혈맥이 끊어질 뻔하더니,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친히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조(英祖,1694~1776)의 초상화
(영조 초상화)
2남 12녀의 아버지영조와 '사도세자'
태어난 그 다음 해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후궁의 자식이 곤전(坤殿)의 계자로 입양되어 세자로 책봉되는 사례는 숙종이 경종을 인현왕후의 아들로 들여 임명하는 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막 태어난 사도세자도 또한 당시 왕비인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양되어 바로 원자(元子)로서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워낙 자손이 귀하다보니 후궁의 자식이더라도 바로 세자로 봉해지는 파격적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영조도 이 사도세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아들은 얻지 못했다.
조선 국왕 중 가장 오랜 수를 누렸다는 영조는 여러 후궁을 두어 자녀 수가 2남12녀에 이르나 성년으로 자란 자녀는 극히 적었다. 영조의 후궁으로 제일 먼저 자녀를 낳아준 사람은 진종의 생모인 온희정빈(溫僖靖嬪) 이씨(李氏)로 진종과 옹주 2인을 낳고 일찍 죽었다. 이어서 영조의 후궁으로는 조강지처격으로 대접받은 인물이 바로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昭裕映嬪) 이씨(李氏)로 1남6녀를 낳았다. 나머지 4명의 옹주는 귀인(貴人, 종1품) 조씨와 폐숙의(廢淑儀, 종2품)의 문씨가 낳았는데 조씨가 낳은 옹주들은 모두 일찍 죽었고 문씨가 낳은 두 옹주는 결혼해서 자손을 두었다. 여담이지만 영조의 12명이나 되는 옹주들 중에서 자식을 낳은 옹주는 단 3명 뿐이었다.
영조는 후궁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얼마 안되는 사례의 전형이었다. 경종은 적어도 3년 이상 중전의 자리에 오른 어머니를 두고 있었지만 영조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천(賤)한 신분으로 알려진 여성인지라 수 많은 상층부의 사대부들이 은근히 영조의 출생에 대해 비웃고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영조의 어머니는 궁중에 정식으로 나인으로 뽑혀 온 여인도 아닌 나인들을 돕기 위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점과 평범한 집안출신인 것은 정설인 듯하다.
영조의 생모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오위 사과(五衛 司果)를 지낸 최효원(崔孝元)과 남양홍씨(南陽洪氏)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이 정6품의 직위를 얻은 것은 아마도 최씨가 영조를 낳았기 때문에 예우의 차원에서 받은 관직 같으며 최효원의 선대들은 벼슬한 적이 없는 평범한 인물들로 알려져있다. 훗날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를 우대하면서 조부에게는 영의정을, 증조부에게는 우의정을, 고조부에게는 우찬성을, 외조부에게 좌찬성을 증직해 줌으로서 자신의 신분적 컴플렉스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숙빈 최씨의 선대 중에서 관직을 얻은 사람은 친조모였던 평강장씨(平康張氏)의 부친인 장원(張遠)이란 인물로 '집안의 음직(陰職)'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통덕랑(通德郞, 정5품)을 지낸 것이 전부였다. 모두가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간 조상들을 가진 영조로서는 쟁쟁한 사대부들의 천국인 조선 사회에서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영조가 국왕으로서 사대부들을 누를 수 있는 권리는 아마도 '효종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는 메리트일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권의 실추'를 꼽으라면 세조(世祖, 1417~1468)의 단종(端宗, 1441~1457)으로부터의 왕위를 찬탈한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장자상속(長子相續)'이라는 성리학의 중요한 논리가 여실히 붕괴되는 장면을 사대부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였고, 두 번째로는 성종(成宗, 1457~1494)이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9)을 제치고 즉위하면서 두 번째 폭탄을 맞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적어도 '적자(嫡子)에 의한 왕권의 세습과정'을 무난히 보여주었으나, 마지막 실추의 직격탄을 쏜 것은 바로 선조(宣祖, 1552~1608)의 즉위였다. 명종(明宗, 1534~1567)의 죽음과 함께 조선 왕실은 사대부의 종가(宗家) 세습보다 못한 행태의 가계 계승이 이루어짐으로서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을 야기시켰다.
왕실을 업신여기는 사대부
방계(傍系)중의 한 자손이 들어와 왕실의 대를 잇자 사대부들이 왕실을 보는 눈은 무척 싸늘해졌다. 그 결과, 훗날 선조가 묻히고자 왕릉터를 구할 때 모든 사대부들은 여러 이유를 들면서 더 이상 왕릉(王陵)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선조의 왕릉인 목릉(穆陵)부터 옛 선조들의 왕릉 터에 비집고 들어가 더부살이하는 '왕릉의 군집(群集)'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왕실이 왕릉의 설치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은 그만큼 사대부들이 왕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명종 이전의 군주들의 왕릉지는 현직 영의정의 조부 묘라 할지라도 왕릉이 들어설 자리 근방에 있다면 당장 파서 이장(移葬)해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거기다가 다시 선조의 후궁 출신의 차남이였던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이 이어받자 이제는 누구든지 강력한 정치적인 지지만 받으면 군주가 될 수 있다는 묘한 논리가 생겨, 결국 인조(仁祖, 1595~1649)가 즉위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인조는 광해군보다 정통성 차원에선 더 형편없는 상황이었으나 서인들의 열렬한 지지 덕분에 종계(宗系)의 순서도 무시하고 즉위했던 것이었다. 결국 그 '왕실 정통성 부족문제'를 인조는 후궁출신 왕자였던 부친 정원군(定遠君)에게 원종(元宗)이라는 놀라운 묘호(廟號)를 올리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간신히 메꾸어 나갔다.
인조가 서인들의 반정(反正)에 의한 무력(武力) 변동으로 대통을 계승한 이후, 인조의 자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지만 다시 인조가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자손들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차남인 효종을 사자(嗣子)로 정함으로서 성리학에서 보는 정당성의 확보 싸움이 훗날 상복(喪服)을 입는 문제에서 발생하여 정치판에선 격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까지 펼쳐지게 된다.
예송의 논쟁 뒷면에는 왕실이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가계(家系)'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을 확인받는 차원 문제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현종과 숙종은 효종이 숙제로 남긴 '왕권의 정당성 확보'에 예송논쟁의 결과물들로 내놓았던 것이다.
이런 위태로운 정치 상황의 연속 속에서 효종의 후손 군주들은 강력한 사대부 가문들과의 신경전적인 물밑 전투를 벌려가면서 왕권 확립에 심휼을 기울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남자 자손의 수가 극소수에 이름에 따라 왕손의 탄생에 목마른 갈증에 시달리는 이중고(二重苦)를 겪는 것이었다.
명문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컴플렉스 타개
영조는 자신의 자녀들은 쟁쟁한 가문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고 하나같이 노론의 명문가문과 연결을 맺는데 특히 사도세자의 혼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국혼(國婚)이었다. 먼저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영빈(昭裕映嬪) 이씨(李氏)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보다는 훨씬 나은 가문에서 태어난 후궁이었다. 영빈의 부친인 이유번(李楡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내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별제(別提, 정6품)를 지낸 무반(武班)출신이었다. 영빈의 외가는 예천김씨(醴泉金氏)로 외조부가 오위 부호군(五衛 副護軍, 종4품)을 지내어 그나마 반가(班家)의 체면을 지녔던 가문이었다고 한다.
외아들의 외가마져 그다지 이름 높은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조는 며느리는 훌륭한 가문에서 골라야겠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결국 사도세자가 10살 되던 해, 풍산홍씨(豊山洪氏)의 가문에서 세자빈(世子嬪)을 들이게 된다. 당시 생원(生員)이었던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딸을 간택하게 되는데 이 집안은 상당히 혈통적으로 무게감을 지니는 노론(老論)의 명문이었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년 12월 17일 (음력 11월 6일) ~ 1718년 4월 9일 (음력 3월 9일)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21대 왕 영조(英祖)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서 1670년 태어났다.[1]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흔히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다만 숙빈 최씨의 출신에 대한 이설 중의 하나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설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있는데 숙빈 최씨가 7살에 궐에 입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7살은 보통 궁녀들이 궁궐에 입궁하는 평균 연령대이고, 그녀가 7살에 입궁했다는 기록자체가 남아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침방 나인으로 있었다는 설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고 희빈 장씨(禧嬪 張氏)가 왕비가 된다. 이후 숙빈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받고 1693년 4월에 숙원(淑媛)이 된다. 숙종 19년(1693년)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9월 13일, 최씨는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이는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같은해인 1694년 최씨는 숙의(淑儀)가 된다. 최씨는 숙종 21년(1695년)에 귀인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淑嬪)으로 봉해졌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희빈 장씨가 중전일 때는 그녀에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인현왕후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자 평상을 되찾았다고 전한다. 인현왕후의 사후 숙종에게 장희빈의 저주굿을 발고하였다. 숙종이 장희빈을 처형하기 전에 후궁에서 왕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죽기 전부터 서인 세력은 숙빈 최씨를 왕후로 추대하려고 하였지만 숙종이 후궁은 중전이 되지 못한다는 비망기를 내려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대하려던 일은 시행되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숙빈의 출신을 문제삼은 세력도 적지 않아 왕비가 될수 있는지에 대한 정통성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숙종 스스로도 희빈 장씨의 아들인 세자 윤을 지키기 위해 희빈 장씨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숙빈을 쉽게 왕비로 책봉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숙빈 최씨가 신분, 국법을 극복하고 왕비가 되었다면 연잉군(영조)도 적자가 되어 연잉대군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많은 대신들은 연산군과 같은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 이미 사사당한 희빈 장씨의 아들 윤을 폐위하고 연잉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렇게 되면 세자 균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세자 윤을 지켜주려고 했던 숙종의 의도와는 상당히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이유를 보더라도 숙빈 최씨가 왕비가 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숙종의 후궁 중에서는 명문가 서인집안에서 태어난 귀인 김씨가 있었기 때문에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되지 못한다는 국법을 안만들었다고 해도 다음 왕비후보는 귀인 김씨 였다. 더군다나 귀인 김씨는 인현왕후가 직접 간택한 후궁인데다 자녀까지 없어 이미 영조를 낳아 기르고 있는 숙빈보다는 오히려 귀인김씨가 왕비가 되기 쉬웠을 것이다. 숙빈 최씨, 귀인 김씨 모두 서인 세력이었고 서인에게 다시 정권이 돌아갔기 때문에 굳이 왕비가 되어야 사람이라면 자녀도 없고 명문가 출신인 귀인 김씨가 오히려 강력한 다음 왕비 후보였을 것이다. 그 후에 들어온 인원왕후 역시 서인집안 사람이기 때문이다. 귀인 김씨는 희빈 장씨가 죽은 다음 해인 1702년 숙종으로부터 정1품인 영빈에 봉해진다.
국법은 다시 바꾸면 되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영조도 재위 52년 동안 천한 어머니를 소생으로 두어 평생동안 신분 컴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숙빈을 왕후로 추존하려고 하였지만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에 성공했던 것과 광해군이 어머니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했던 것과는 달리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를 결국 왕후로 추존하지 못했다. 물론 제헌왕후와 공성왕후는 아들들이 폐위후 다시 원래 신분을 되찾았지만 당시 연산군,광해군이 임금의 신분에 있을때에는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할 정도로 왕권과 대의명분이 있었는데 비해 영조는 국법을 다시 바꾼다고 해도 어머니인 최씨 만큼은 왕비로 추존하기에는 대의명분이 부족했을 것이다. 국법도 국법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천한 핏줄의 임금을 두는 것도 모자라 천한 핏줄의 왕후까지는 종묘에 모실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신분 컴플렉스를 벗어나 기 위해 자녀 2남 7녀를 모두 명문가와 혼사를 맺었는데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도 당시 명문가였다.
숙종은 희빈 장씨 사사 후 1702년 9월 순안 현령 김주신의 딸(인원왕후)을 세번째 계비로 간택하여 책봉하고 김씨가 입궁하기전인 1702년 5월 숙빈을 궁 밖 숙빈방(이현궁)으로 출궁 시켜버린다. 이후 1711년 연잉군이 사제(창의궁)를 지어 출궁하자 그녀가 머물고 있던 이현궁을 환수 조치하고[3][4] 아들과 동거해서 살기를 명한다. 결국 숙빈은 희빈 사사후에 말년을 숙종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지내다 1718년 3월 9일 아들 연잉군의 사제(창의궁)에서 49세의 나이로 병사하게 된다.
선원록(선원계보기략) 등에 의하면 장남 영수와 영조의 아래에도 1698년에 조졸한 왕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숙빈최씨의 장례에 대한 숙종의 처사는 실로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1718년 3월9일 그녀가 연잉군 사제에서 병사하자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 않았다.(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다) 또한 그녀의 장지로 거론된곳이 공주들의 묘역 옆산이라는 이유로 감히 공주들의 묘역인 청룡의 터를 침범하려 했다며 그말을 전한 내관을 파직할 정도로 화를 내었다.[5] 이어 두번째로 거론된 장지에 대해서도 왕실 능 부근은 백성이 장사를 지낼수 없는데 최씨를 그곳에 장사 지내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왕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이었던 최씨를 일반인과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실록 기록이 있다.[6] 현재 숙빈의 묘역은 숙종이 정해준것이 아니라 영조(당시 연잉군)가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 목호룡을 대동하고 둘이 직접 고른곳이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그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또한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결국 왕후로 추존하는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에 대한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였다.
부 : 증 영의정 최효원. 모 : 증 정경부인 홍씨 (홍계남의 딸)
남편 : 조선 제19대 왕 숙종.
1남 : 영수(永壽, 조졸)[8]
2남 : 조선 제21대 왕 영조
손자 : 진종
손자 : 장조
종손자 : 조선 제22대 왕 정조
3남 : ?(조졸).
파주군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高嶺山)자락에 있는 소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