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최남단 신비의 섬 "여서도(麗瑞島)"
지도에도 없는 완도권 최남단 천혜의 아름다운 섬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까지
완도에는 볼거리가 넘쳐 난다.
특히 완도 선착장에서 배로 세 시간 정도 거리인 완도 최남단의
섬 ‘여서도(麗瑞島)’는 하루에 배가 한 번밖에 닿지 않는 자연의
풍광을 그대로 지닌 섬이다. 긴 세월 거친 바닷바람에 맞서기 위해
담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까지 닿는 이곳은 대자연 속에서 이어 온
인간의 끈질긴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도에도 없는 섬, 여서도는 면적 2.51km2, 해안선 길이 10km로
40여 가구 8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완도에서 남동쪽 41km 거리에
있으며 제주도와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 외딴섬이다. 일제 강점기
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으나 1945년 이후에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에서 여서도로 불리게 됐다. 1950년대에는 최대 240여
가구 1,200명이나 살았고, 1968년도만 해도 여서초등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완도군지』에 따르면 고려 때인 1077년(목종 10) 탐라(제주)
근해에 일주일간 대지진이 지속된 뒤 바닷속에서 큰 산(섬)이
솟았다고 한다. 고려의 ‘려’자와 상서롭다는 ‘서’자를 따 ‘여서(麗瑞)’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여서도에서 발견된 패총이 7,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일 정도로 이 섬의 사람 살이 역사는 길다. 여서도는
외딴섬이라서 그전에는 왜구들의 침범이 심했을 것이다.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90년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 진주 강씨가
여서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다.
‘아름답고 상서롭다’는 뜻의 여서도는 아직까지도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이다. 특히 30~40m 깊이의
바닷속이 훤히 보일만큼 맑아서 “여서도로 시집가던 새색시의
앞섶이 풀어지며 옷고름이 바닷물에 빠져 황급히 들어 보았더니
옥색으로 물들어 있더라”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물이 깨끗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어종과 동식물은 보호할 가치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특산물인 자리돔(생이리)이 완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잡히고 있다. 주민들의 생계 수단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쌀·보리·콩·참깨 등이 소량
생산된다. 근해에서는 도미·숭어·도다리 등이 잡히며, 자연산
돌미역·해삼·전복 등이 채취된다. 여서도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것은 미역·소라·전복·해삼 등. 특히 여서도의 자연산 돌김·김·톳·미역·
파래는 육지 가까운 데서 양식한 것과는 색깔과 맛이 다르다
. 그리고 여서도의 자연산 해초는 최상급으로 그중에서도 봄에
처음 따는 미역인 초각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서도는 완도 섬들 가운데 남쪽으로 가장 바깥쪽에 청산도와
제주 추자도 중간에 있다. 직선거리로 제주까지 약 40km이며
완도까지는 41km,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km이다. 지금 이
섬에는 제주도 출신 아낙네들이 몇 명 있다. 여서도와 제주도가
가깝다 보니 이곳으로 물질을 왔다가 여서도 총각과 눈이 맞은
것이다. 제주도 해녀들이 한번 물질을 오면 계약 기간 때문에 오랜
기간 머물러야 했다. 또 돌아가고 싶어도 여객선도 없고
지금처럼 빨리 달리는 배가 아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출처:(한국의 섬 - 전남 완도군, 2011. 7. 25., 아름다운사람들)
여서도
故鄕에 찾아와도
고려성 작사
이재호 작곡
최갑석 노래
1.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두견화 피는 언덕에 누워
풀피리 맞춰 불던 옛 동무여
흰 구름 종달새에 그려보던 청운의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새우다 가느냐
2.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실버들 향기 가슴에 안고
배 띄워 노래하던 옛 동무여
흘러간 굽이굽이 적셔보던 야릇한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새우다 가느냐
2016-05-2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