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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호조판서경상도좌병사박공신도비명병서
(贈戶曹判書行慶尙道左兵使朴公神道碑銘幷序)
공은 성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이 의장(毅長)이고 자가 사강(士剛)이며 본관이 무안(務安)이다. 비조(鼻祖)는 고려(高麗) 국학 전주(國學典酒)를 지낸 박진승(朴進昇)이고, 이 이후로 장수와 정승이 된 사람이 10여 대에 걸쳐 서로 이어졌다.
증조 박지몽(朴之蒙)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 박영기(朴榮基)는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박세렴(朴世廉)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남시준(南時俊)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을묘년(1555년, 명종 10)에 영해(寧海) 원고리(元皐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젊어서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나 겨우 약관의 나이에 갑자기 붓을 던져버렸다. 병자년(1576년, 선조 9)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여타 경서도 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청하자 고관(考官)이 의의(疑義)를 물어보고서 감탄하며 말하기를 “문무(文武)의 재주를 온전히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이미 과거에 오른 지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군기시 참봉(軍器寺參奉)에 배수되었다. 부봉사(副奉事)ㆍ봉사(奉事)ㆍ직장(直長)에 전배(轉拜)되고 거듭 광흥창(廣興創)과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진해 현감(鎭海縣監)으로 나가니 온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경인년(1590년, 선조 23)에 경주 판관(慶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동래(東萊)에서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을 따랐다. 이각이 후퇴하여 달아나려 하자 공이 힘써 다투니 이각이 크게 노여워하며 군율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오히려 항언(抗言)하며 굽히지 않자 이각이 잘못을 뉘우치고 술잔을 건네며 사과하였다.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자 이각이 공에게 경주(慶州)의 성지(城池)로 돌아가서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경주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군사와 백성들이 벌써 다 흩어졌고,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이 기계(杞溪)로 출병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공이 그를 따라서 죽장현(竹長縣)에 들어가 점거하고 정예병을 모집하여 밤에는 화산(火山) 꼭대기에 전열(戰列)을 치고 낮에는 성 밖에서 달려 돌격하며 요병(耀兵)하니 적의 위세가 다소 잠잠하였다. 마침내 밤에 낮은 성으로 접근한 뒤 진천포(震天砲)를 발사하여 많은 왜적을 죽였고, 마침내 밤중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참살한 자가 매우 많았다. 경주성에 들어가서 얻은 곡물이 4만여 곡(斛)이 되었는데, 공사(公私)가 이에 도움을 받았다.
계사년(1593년, 선조 26) 2월에 병사를 이끌고 대구(大丘) 파잠(巴岑) 고개에 병사를 매복시켜서 적을 만나 크게 무찌르니 사기가 크게 떨쳐졌다. 이에 앞서 여러 번의 군공(軍功)으로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과 군기시 첨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번 승전의 소식이 알려지자 통정대부에 올라 부윤(府尹)으로 승진되었다.
안팎의 옷감 한 벌을 하사하고 유서(諭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12월에 판서공(判書公)의 병이 심해지자 공이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였으나 끝내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이 평생토록 지극히 애통하게 여긴 일이다. 조정에서 바로 기복출사(起復出仕)를 명하자 마침내 슬픔을 무릅쓰고 임소(任所)로 돌아왔다.
갑오년(1594년, 선조 27) 2월에 양산(梁山)에 머물던 왜적이 경주의 남쪽을 침범하고 5월에는 기장(機張)에 있던 적이 묵장촌(墨場村)으로 침범하였다. 7월에는 적이 또 경주의 동쪽을 침범하였는데, 공이 그때마다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포로로 잡힌 남녀와 소ㆍ말 등을 탈환한 것은 헤아릴 수가 없으며, 이때부터 적들이 감히 다시는 경주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공이 비로소 말미를 받아여차(廬次)로 돌아가 묘소를 살폈다.
을미년(1595년, 선조 28)에 임금께서 하교하여 이르기를 “원균(元均)이 적을 토벌하고 박의장(朴毅長)이 파수(把守)한 것은 다 공로가 무리 중에 뛰어났으니, 각각 한 자급씩 더하라.”라고 하여 마침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9월에 공이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영천(永川)에서 적과 크게 싸웠고, 10월에 또 안강(安康)에서 싸워 크게 패퇴시켰다.
적들이 울산(蔚山)으로 물러나 주둔하면서 성(城)을 쌓아서 스스로를 지켰다. 무술년(1598년, 선조 31)에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공이 경주에 있으면서 판관(判官)은 2년, 부윤(府尹)은 7년 동안 있었다. 모친상을 당하고부터 매번 피눈물을 흘리며 사직을 고하였으나 명을 받지 못하였다.
기해년(1599년, 선조 32)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겸 방어사(防禦使)로 이배(移拜)되었다. 경자년(1600년, 선조 33)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고 겨울에 풍비(風痺)에 걸려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무신년(1608년, 선조 41)에 선조가 승하하자 공이 병을 무릅쓰고 대궐로 들어갔다. 8월에 본도의 좌병사에 제수되었고, 숨어있던 좀도둑과 간교한 자들을 일시에 제거하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박이장(朴而章)이 일찍이 영해 부사(寧海府使)가 되어 호족(豪族)을 무고하였다는 혐의로 공의 벼슬을 삭탈하였는데,노경임(盧景任)이 영해 부사가 되어 공의 무고를 신원하였다. 사람들이 두 사람의 현부(賢否)는 공이 무고를 받고 공이 청빈하고 검약함이 이처럼 많은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박이장이 또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고 파직시키자 군민(軍民)들이 조당(朝堂)으로 달려가 하소연하였지만 임금의 명을 받지 못하였고, 성 밖에 비석을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표시하였다.
신해년(1611년, 광해군 3)에 인동 부사(仁同府使)에 제수되었고, 임자년(1612년, 광해군 4)에 다시 좌병사(左兵使)에 배수되었다. 박이장이 또 대관(臺官)을 부추겨 탄핵하였는데, 군민(軍民)들이 하소연하자 바로 서용(敍用)하라 명하고 공홍도 수사(公洪道水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공이 어머니가 연로한 일로 사직하자 본도(本道경상 수사)로 바꾸라고 허락하였다. 공이 또 어머니가 연로한 일로 사직을 청하자 평시대로순력(巡歷)하며 형편에 따라 근친(覲親)하라고 명하였으니 특별한 예우였다. 이미 감영에 돌아와 다시 풍비(風痹)에 걸려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을묘년(1615년, 광해군 7) 10월이었다. 예관(禮官)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하였다. 4월에 영해부(寧海府) 서쪽 오현(烏峴)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의 충의(忠義)와 담략(膽略)은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으니, 경주 판관에 있을 때 큰 난리를 당하여 조치하고 계획한 것이 한 고을에만 국한되어 병략(兵略)을 크게 펼칠 수 없었지만, 오히려 빈 시위를 당기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며 팔을 흔들고 한바탕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도 성 전체를 마침내 수복하고 요충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뚝이 남도(南都경주(慶州))의 철벽(鐵壁)이 되고 마침내 왜적을 꺾어 소탕하는 공적을 세웠으면서도기린각(麒麟閣)에 초상을 걸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평소에 자신을 단속함이 매우 엄격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에도 청렴하고 삼갔다.
큰아들 유(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장에서 따라다녔지만 일자반급(一資半級)도 얻지 못하였고, 서자 무(珷)는 군액(軍額)을 면할 수 없어서 숙부(叔父) 첨지공(僉知公)에게 아뢰어 각각 건장한 종을 내어 대오(隊伍)에 충당하였다. 재물과 이익에는 또 단칼에 두 동강 내듯이 하여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다.
성품이 검소하여 귀인(貴人)의 복식(服飾)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나 의용(儀容)이 준수하고 미목(眉目)이 그림 같아서 갑(甲)이 보면 훤걸찬 무부(武夫)였고, 을(乙)이 보면 신실한 서생이었다. 하늘이 걸출한 분을 낸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그러나 수명은 오래하지 못하고 쓰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부인 정부인(貞夫人)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이지영(李之英)의 따님으로 법도 있는 가문에서 나고 자라 행실이 맑았다. 시부모를 섬기고 종족(宗族)을 대우하며 종들을 부림에 모두 알맞게 하였다. 가정(嘉靖) 갑인년(1554년, 명종 9)에 태어나서 숭정(崇禎) 기사년(1629년, 인조 7)에 임종하였다. 처음에 공의 묘소에부장(祔葬)하였다가 뒤에 개장(改葬)하여 영해부 서쪽 집희암(集喜巖) 진향(震向)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아들은 넷이다. 장남 유(瑜)는 현령(縣令)을 지냈고 둘째는 위(瑋)이고 셋째 륵(玏)은 도총 경력(都摠經歷)을 지냈고 넷째 선(璿)은 교관(敎官)을 지내고 공의 행장을 지었다. 딸 셋은 충의위(忠義衛) 손로(孫魯), 진사 박종무(朴樅茂), 사인 이시형(李時亨)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아들로 무(珷)가 있다.
장남 유(瑜)는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문립(文立)과 문기(文起)이고 딸은 참봉(參奉) 이주(李皗)ㆍ문과 급제자 이영구(李榮久)ㆍ사인 유원정(柳元定)ㆍ황중헌(黃中憲)에게 시집갔다. 둘째 위(瑋)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문도(文度)이다.
셋째 륵(玏)은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문약(文約)이고, 딸은 참봉 이휘일(李徽逸)ㆍ사인 이현일(李玄逸)ㆍ성용하(成用夏)에게 시집갔다. 넷째 선(璿)은 문기(文起)를 후사로 삼았고 두 딸은 조원윤(趙元胤)과 노이흥(盧以興)에게 시집갔다.
사위 손로(孫魯)는 광계(光啓)를 후사로 삼았고, 딸 다섯은 사인 권기(權炁)ㆍ목사(牧使) 정호인(鄭好仁)ㆍ참봉 정성(鄭聖)ㆍ사인 이령(李皊)ㆍ서임달(徐任達)에게 시집갔다. 사위 박종무(朴樅茂)는 합(烚)을 후사로 삼았고, 딸 하나는 사인 신상청(申尙淸)에게 시집갔다. 사위 이시형(李時亨)은 부일(傅逸)을 후사로 삼았다.
문립(文立)은 2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순(洵)과 초(濋)이고 딸은 사인 이채(李埰)에게 시집갔다. 문도(文度)는 2남 7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휴(㳜)와 어린 남동생이 있고 딸은 사인 신후석(申厚錫)ㆍ권강(權堈)ㆍ허련(許堜)ㆍ장우천(張羽天)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문기(文起)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호(滈)로 진사이다. 내외(內外)의 증손과 현손이 매우 번성하였다.
아! 공의 공덕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기에 이제 막 향사(鄕社)에 정사(精祠)를 마련하여 세운다. 공의(公議)가 사라지지 않고 비방하고 중상하는 자들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흑룡(黑龍)의 해에 / 在黑龍歲
나라가 전란으로 쪼개지고 / 國刳於兵
삼경을 지키지 못하여 / 三京不守
어가가 서쪽으로 행차하였네/ 玉輦西行
거센 물결이 위태할 때/ 洪流板蕩
여러 고을에 대장부가 없었지만 / 列郡無男
공께서 당시 쓰임에 응하여 / 公應時須
영남에서 우뚝하였네 / 挺生嶺南
피를 뿜고 울음을 삼키며 / 沫血飮泣
임금의 치욕에 죽음을 맹세하고 / 誓死主辱
팔뚝 걷고 언덕에 오르자 / 奮臂登埤
흉포한 적이 자취를 감추었네 / 鯨鯢屛跡
경주를 철벽같이 지켜서 / 鐵壁南都
나라를 수호하였고 / 捍蔽一國
금구가 손상되지 않음은/ 金甌罔缺
진실로요새에 힘입었네 / 寔賴鎖鑰
공적이 월굴처럼 높았으나 / 功高月窟
화상이 기린각에 걸리지 않았고 / 圖不麟閣
개미가 나무 흔듦 우습지만/ 蚍蜉樹撼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이네/ 衆口金鑠
몇 칸의 정사를 지음은 / 精祠數椽
한 줄기 공의를 따름이니 / 公議一脈
벼슬하는 관리들은 / 凡百有位
이 비석의 명을 보라 / 視此銘石
[脚註]
[주01] 이각(李珏):
?~1592년(선조 25).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1592년 임진왜란 개전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였다. 울산 북쪽 병영에 주둔했지
만, 부산진 전투에는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고, 동래성 전투에는 성 수비를 동래부사 송상현에 맡겨 탈출하였다.
경주성 전투 전엔 임지와 군을 버리고 달아난 죄를 추궁 받았다. 한성부 함락 이후엔 임진강에 주둔한 도원수 김명원의 진중으로 도
주하다 체포되어 음력 5월 14일에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이각을 참수시켰다.
[주02] 윤인함(尹仁涵):
1531년(중종 26)~1597년(선조 30).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양숙(養叔), 호는 죽재(竹齋)ㆍ죽당(竹堂)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1년(명종 16) 병조ㆍ이조의 좌랑을 지낼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8년(선조 11) 사복시 정, 1581년 황주 목사를 지내고 1584년(선조 17)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ㆍ호조의 참의에 올랐
다. 경주 부윤ㆍ호조 참의를 지냈으며, 1596년 형조 참판이 되었다. 저서로《죽재집(竹齋集)》이 있다.
[주03] 요병(耀兵):
병기(兵器)를 번쩍이면서 위엄을 보이며 시위하는 것을 말한다.
[주04] 여차(廬次):
상중(喪中)에 복인(服人)이 임시로 기거하도록 만든 여막을 말한다.
[주05] 원균(元均):
1540년(중종 33)~1597년(선조 30).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평중(平仲)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ㆍ합포해전ㆍ당포
해전ㆍ당항포해전ㆍ율포해전ㆍ한산도대첩ㆍ안골포해전ㆍ부산포해전 등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고, 1593년 이순신
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자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가 이순신이 파직당한 후 그의 자리를 이었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 작전에 말려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후에 선무 공신 1등에 책록되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 원릉군(原陵君)에 추증되었다.
[주06] 풍비(風痺):
중풍으로, 풍사(風邪)가 침입하여 몸과 팔다리가 마비되고 감각과 동작이 자유롭지 못한 병증이다.
[주07] 박이장(朴而章):
1547년(명종 2)~1622년(광해 14).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ㆍ도천(道川)이다. 조식의 문인이다.
1572년(선조5) 향시에, 이듬해 회시에 합격하였다. 대사간ㆍ대사성 등을 지냈다. 1605년 붕당의 폐단을 논하다가 시의(時議)를
거슬러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좌천되었다. ■저서로《용담집》이 있다.
[주08] 노경임(盧景任):
1569년(선조 2)~1620년(광해 12). 본관은 안강(安康),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이다. 1607년(선조 40) 6월에 영해 부
사가 되었다.
[주09] 순력(巡歷):
감사(監司)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일이다.
[주10] 기린각(麒麟閣):
한나라 때의 전각의 이름인데, 선제(宣帝) 때에 곽광(霍光) 등 공신 11명의 화상을 그곳에 그려 놓았다고 한다. 후세에서는 공신이
되었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주11] 일자반급(一資半級):
보잘것없이 조그마한 벼슬을 이르는 말이다.
[주12] 부장(祔葬):
전장(前葬이미 묘소를 만든 곳)에 다른 영구를 함께 붙여 묻는 것이다.
[주13] 흑룡(黑龍)의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을 가리킨다. 간지(干支)에서 임(壬)은 북방으로 흑색을 상징하고 진(辰)이 용을
뜻하기 때문에 임진(壬辰)을 흑룡이라 말한 것이다.
[주-D014] 삼경(三京):
조선 시대 한성(漢城,서울)과 중경(中京,개성)ㆍ서경(西京,평양)을 말한다.
[주15]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행차하였네:
원문의 옥련(玉輦)은 옥으로 장식한 화려하게 꾸민 임금의 수레를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파천(播
遷)한 것을 말한다.
[주16] 거센 …… 때: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것을 이른다. 원문의 판탕(板蕩)은《시경》 대아(大雅)의〈판(板)〉과〈탕
(蕩)〉두 편을 병칭한 것으로, 두 시는 모두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무도(無道)하여 나라가 혼란한 일을 풍자하였으므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주17] 흉포(凶暴)한 적:
거대한 고래의 수컷과 암컷을 경예(鯨鯢)라고 하는데, 모두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므로 악인의 괴수에 비유된다. 여기서는 임진왜
란을 일으킨 왜적을 가리킨다.《춘추좌씨전》선공(宣公) 20년에 “옛날에 밝은 임금이 불경스러운 자들을 정벌하고 그 우두머리를
죽여 큰 무덤을 만든 뒤 대대적으로 주륙을 행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18] 금구(金甌)가 손상되지 않음은:
금구는 금사발로, 국가가 손상됨이 없이 안전함을 말한 것이다. 남조 시대 동위(東魏)의 후경(侯景)이 동위를 배반하여 13개 주(州)
를 가지고 양(梁)나라에 귀순하겠다고 청하자, 무제는 동위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말하기를 “우리 국가가 금구와 같아
한 곳도 손상되거나 이지러진 곳이 없는데, 지금 갑자기 후경의 땅을 받아들인다면 어찌 마땅한 일이겠는가? 혹시라도 분란을 불러
온다면 후회막급이다.[我國家如金甌, 無一傷缺, 今忽受景地, 詎是事宜? 脱致紛紜, 悔之何及.]”라고 하였다.《梁書 武帝紀》
[주19] 요새(要塞):
원문의 ‘쇄약(鎖鑰)’은 본래 문을 잠그는 자물쇠란 뜻인데, 인신(引伸)하여 변방을 지키는 견고한 요새란 뜻으로 쓰인다.
[주20] 개미가 …… 우습지만:
한유(韓愈)의〈조장적(調張籍)〉시에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고 하니, 자기 역량 모르는 게 가소롭구나.[蚍蜉撼大樹, 可笑不自
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1] 사람들의 …… 녹이네:
“깃털도 많이 실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쌓이면 수레바퀴의 굴대를 부러뜨리고, 사람들이 말이 많으면 쇠도 녹이
는 법이다.[積羽沈舟 群輕折軸 衆口鑠金]”라는 말이《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1에 나온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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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戶曹判書行慶尙道左兵使朴公神道碑銘幷序
公姓朴。諱毅長。字士剛。務安人。鼻祖高麗國學典酒諱進昇以下。相繼爲將相者凡十餘代。曾祖諱之蒙。贈司僕寺正。祖諱榮基。贈工曹參議。考諱世廉。贈兵曹判書。妣貞夫人英陽南氏。贈通政諱時俊之女。以嘉靖乙卯。生公于寧海元皐里第。少力學通經史。纔弱冠。遽投筆。赴丙子武科。自請講餘經。考官問以疑義。歎曰。文武全才也。旣登第十年。始拜軍器參奉。轉副奉事奉事直長。荐拜廣興軍器主簿。出爲鎭海縣監。一境大治。庚寅。除慶州判官。壬辰南亂作。引兵從兵使李珏于東萊。珏欲退遁。公力爭之。珏大怒。欲加以軍律。公猶抗言不撓。珏悔悟。引巵酒謝之。釜山陷報至。珏命公歸治慶州城池。旣至。軍民已盡散。府尹尹仁涵。出駐杞溪。公從之。入據竹長縣。募精勇。夜則列火山頭。晝則馳突城外以耀兵。賊勢稍戢。遂夜薄城。放震天砲。賊多死。遂夜遁。追斬甚衆。乃入據州城。得穀四萬餘斛。公私賴焉。癸巳二月。引兵設伏大丘巴岑峴。遇賊鏖之。軍聲大振。先是。累以軍功授繕工副正軍器僉正。至是捷奏。陞通政爲府尹。賜表裏一襲。下書褒之。十二月。判書公病革。公晝夜兼程。終不得末訣。此公平生至痛也。朝廷卽命起復。遂冒哀還任所。甲午二月。梁山賊犯州南。五月。機張賊犯墨場村。七月。賊又犯州東。公輒擊走之。奪還被虜男婦牛馬無算。自是賊不敢復犯州境。公始受由歸省廬次。乙未。上下敎曰。元均之討賊。朴毅長之把守。皆功出等夷。其各加一資。遂陞嘉善。九月。公率諸將。與賊大戰于永川。十月。又戰于安康。大敗之。賊退屯蔚山。築城以自保。戊戌。遂撤歸。公在慶州。爲判官二年。爲府尹七年。自遭內艱。每瀝血控辭而不得命。己亥。移拜星州兼防禦使。庚子。拜左道兵使。冬。中風痹輿歸。戊申。宣廟賓天。公力疾入臨。八月。拜本道左兵使。宿蠹藏奸。一時剗除。軍情大悅。朴而章嘗爲寧海。因嫌誣以豪右削公爵。逮盧侯景任爲府使。伸其誣。人以二公賢否。知公之受誣。而多公之淸約如此。至是。朴又嗾臺官劾罷。軍民等赴訴朝堂。不得命。立碑城外以寓慕。辛亥。除仁同。壬子。復拜左兵使。朴又嗾臺官論劾。因軍民號訴。卽命敍用。爲公洪水使。公以親老辭。許換本道。公又以親老辭。命依平時巡歷。以便省覲。異數也。旣還營。再中風痹。遂卒。乙卯十月也。命遣禮官祭之。贈資憲戶曹判書。四月。葬府西烏峴。嗚呼。公之忠義膽略。足以濟時。處府幕當大亂。其規爲措畫。局於一州。不得大施韜鈐。而猶能張空弮冒白刃。奮臂一呼。全城遂復。控扼咽喉。屹然爲南都之鐵壁。終致摧陷廓淸之功。而不得圖形麟閣。惜哉。平生律己甚嚴。居官淸謹。長子瑜。始終從征。而不得一資半級。庶子珷。未免軍額。而白于叔父僉知公。各出壯奴克隊伍。臨財利。又一刀兩段。若將浼己。性儉素。不以貴人服飾加體。而儀容秀拔。眉目如畫。甲視之則糾糾然武夫也。乙視之則恂恂如書生也。天挺英豪。夫豈偶然。而壽不永而用未究。命矣。配貞夫人永川李氏。諱之英之女。生長法家。有淑行。事舅姑遇宗族御婢僕。咸得其宜。生嘉靖甲寅。歿崇禎己巳。初祔葬公之墓。後遷厝合窆于府西集喜巖震向原。男四。長瑜縣令。次瑋。次玏都摠經歷。次璿敎官。狀公之行。女三。忠義孫魯,進士朴樅茂,士人李時亨。側室子曰珷,瑜。二男。文立,文起。四女。參奉李皗,及第李榮久,士人柳元定,黃中憲。瑋一子。文度。玏一子。文約。三女。參奉李徽逸,士人李玄逸,成用夏。璿以文起後。二女。趙元胤,盧以興。孫魯以光啓後。五女。士人權炁,牧使鄭好仁,參奉鄭聖,士人李皊,徐任達。朴樅茂以烚後。一女士人申尙淸。李時亨以傅逸後。文立二子。洵,濋。一女。士人李埰。文度二子。㳜。一幼。七女。士人申厚錫,權堈,許堜,張羽天。餘幼。文起一子滈。進士。內外曾玄孫男女甚繁衍。噫。公之功德。在人耳目。方營立精祠于鄕社。可見公議之未泯。而謗傷者之不自量也。銘曰。
在黑龍歲。國刳於兵。三京不守。玉輦西行。洪流板蕩。列郡無男。公應時須。挺生嶺南。沫血飮泣。誓死主辱。奮臂登埤。
鯨鯢屛跡。鐵壁南都。捍蔽一國。金甌罔缺。寔賴鎖鑰。功高月窟。圖不麟閣。蚍蜉樹撼。衆口金鑠。精祠數椽。公議一脈。
凡百有位。視此銘石。<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