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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8. 23. 16:44
■ 25世 이익(李瀷)
[세 계] 국당공 후 정순공파, 충무공(忠武公) 이수일(李守一)의 조카
[생몰년] 1579년(선조 12)∼1624년(인조 2).
[문 과]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4/34)
[진 사]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9위(49/100)
[생 원]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위(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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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아버지는 판관유일(惟一)이며, 어머니는 참봉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직되었다.
그뒤 사서(司書)· 정언(正言) · 헌납(獻納)·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예조정랑((禮曹正郞 : 正五品)·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성균관 직강(直講-正五品)을 역임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내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사예(司藝)와 장령(掌令) 등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從三品)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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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2012.01.09 . 00:00:00 /표성준기자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1)
권력의 칼자루에 맞서 정의를 묻다.
▲임진왜란 때부터 조정에 전마를 바친 김만일은 의귀리에서 교래리에 걸친 거대한 방목장을 소유한
조선 최고의 말 부자였다. 사진은 탐라순력도 중 산장에서 마필 수를 확인하는 장면을 그린 '산장구마'.
광해군 실정 논한 상소 올려 제주위리안치
제주도 최고 말 부자 김만일과 절묘한 인연
"지금 말라 타들어가는 땅이 천리요,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될 참화가 불행히도 가까워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금 8년이 되었으나 한 번도 경연을 열어 도를 강론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궁첩과 환관들이 얼마나 성상의 마음을 흔들어댈 것이며, 신하들과의 거리가 어찌 천리만 되겠습니까.
궁중이 엄하지 못하여 안팎이 결탁해서 태아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히었고,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줄을 잇는데 다투어 서로 본받아 민생의 곤궁함이 날로 더해지고 있습니다."
1615년(광해군 7년) 5월 간옹 이익(1579~1624)은 광해군의 실정을 논하면서 상소를 올린다. 임진왜란 와중에 세자로 책봉돼 왕좌에 오른 광해군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하고, 영창대군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사간원 정언(정6품)이었던 이익은 군왕의 부도덕함과 외척 전횡을 조목조목 상소해 언관의 직분을 다했지만 사형 위기에 처해진다.
▲조선왕조실록 중 광해군이 이익에 대해 제주 유배형 명령을
내린 사실을 기록한 부분
광해군일기에는 상소문을 접하고 분노한 광해군이 '태아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히었다는 말이 누구의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인지 이익에게 물어서 아뢰라'며 수차례 심문을 요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중국 초나라 보검 '태아(太阿)'는 권력을 뜻하는 것으로 후한시대 역사서 '한서'에는 태아의 칼을 거꾸로 잡고 그 칼자루를 초나라에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이 신하에게 권력을 맡기고 도리어 신하에게 해를 입는 것을 비유하는 내용의 상소를 접한 군왕의 입장에서는 이익에게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광해군의 엄명으로 의금부와 사헌부에서 문초를 받던 이익은 영의정 기자헌이 거듭 상소문을 올려 목숨만은 건지게 된다.
정6품(오늘날의 사무관)에 불과한 이익을 위해 영의정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임금이 이를 받아들인 사실은 그가 그만큼 청렴강직하고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실제 그는 생원·진사시(소과)와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3년 만에 사간원 정언이 된 것으로 전해질 만큼 당대 최고의 수재로 평가받았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이익은 1617년 제주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유배된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위리안치는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키고, 집 주위에는 가시울타리를 둘러 감옥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감금과 격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제주도 제공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김만일의 묘와 묘비. 묘비에는 김만일이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
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음을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과 함께 문인석이 남아있지만 동
자석 2기는 누군가 훔쳐가 아직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기념물 65호로 지정됐다.
▲묘비에는 김만일이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음을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김만일 일가에서는 그가 어떻게 조선 최고의 말 부자가 됐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난한 집 출신에 고아나 다름없던 김만일은 성산읍에 있는 어느 목장에서 말테우리로 일을 하다 주인집 딸과 눈이 맞는다.
딸이 이미 임신해버린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말테우리와 함께 딸을 내쫓으면서 못 이기는 척 말 한 마리를 내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낙담한 김만일이 집을 나온 지 3일 후 종마를 찾아 나선 암말 50마리가 눈앞에 나타난다.
주인집 딸이 평소 눈여겨본 종마의 혓바닥에 일주일 전부터 바늘을 꽂아 여물을 못 먹게 해 아버지가 그 말을 내줄 수 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이익이 제주에서 얻은 여인은 바로 이 부인의 딸이었다.
이익이 제주에 유배될 당시 제주목사는 후일 인조반정에 참여해 광해군을 폐위시킨 데 이어 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키고 한양까지 점령한 무관 이괄이었다. 그는 제주목관아 서쪽에 이익의 거처를 얻어주고 동몽교관(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종9품)으로 삼아 특별 대우했다.
일반인과 접촉을 금하는 유배인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그가 반정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이익의 작은아버지 이수일(충무공 李守一)가 북병사(병마절도사·종2품)인 데다 사촌이 후에 우의정까지 오른 이완 대장이었으며, 이익의 학식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익에게 배운 제자로는 훗날 과거에 급제해 각각 성균관 전적(정6품)과 참봉(종9품) 벼슬을 받은 고홍진과 김진용 등이 있다.
김만일이 딸을 이익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해군 즉위 후 사복시는 선조 때부터 조정에 말을 바친 김만일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으며, 점마관 양시헌은 왕의 명령을 핑계로 암말 1000필을 뽑아 갔다.
이를 항의하는 김만일과 세 아들에게 형을 가한 양시헌은 임금의 명령으로 파직됐지만 사복시는 앙심을 품었다.
결국 수탈당하느니 헌납하기로 마음을 먹은 김만일은 1620년(광해군 12년) 말 500필을 바쳤으며, 광해군은 그를 불러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부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 실직을 제수해 부임하게 하고, 그의 장남에게는 수령(현감), 차남에게는 당상(정3품 이상), 손자에게는 변장(만호)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도성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부총관 직책은 종실(임금의 친족)이 맡아야 한다며 김만일 일가에 내린 관직 제수 명령을 거두어들이라고 거듭 상소한다. 그들은 김만일을 "바다 밖의 미천한 인간", "섬 속의 일개 말 장사꾼"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결국 김만일은 실관직이 제수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한다.
사관은 당시 임금이 김만일에게 벼슬을 내린 것을 두고 '사람들이 모두 너나없이 수치스럽게 여겼다'고 깎아내렸으며, '출사한 지 며칠 만에 가고 말았다'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중앙 관직을 경험하면서 임금의 실정을 깨닫고, 그 자신이 사간원의 서슬 퍼런 상소를 당해본 데다
왕족 출신 목사들에게도 괄시를 받았던 김만일은 앞날을 대비해 사간원 정언을 지낸 이익을 사위로 맞는다. 그때 이익은 첫 부인이 자식 없이 사망하고, 아들 인실과 딸을 낳은 둘째 부인도 상소문 사건이 나던 해 세상을 떠나 혼자였다. 유배 온 이듬해 김만일의 딸 경주김씨를 배필로 삼은 그는 차남을 낳고 인제(仁濟)라 이름을 짓는다.
일부 관리나 유배객이 제주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나 '영(瀛)', '탐(耽)'자를 쓴 것처럼 인제의 이름에도 제주를 기억하는 '제'를 넣었던 것이다. 인제는 훗날 훈련원(무예 연습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판관(종4품)에 오르기도 한다.
유배가 풀려 귀향한 이익은 제주에서 장가들어 얻은 자식의 존재를 친지들에게 당당히 밝힌다. 영의정 최석정이 지은 이익 묘비명 중 "세 번째 장가들어 훈련원 판관 인제를 낳았는데 이는 유배 때 출생했다"는 글과 이익 손자가 작성한 가장(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 "헌마공신 만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인제를 낳았는데 제주적거 때 출생했다"는 내용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유배가 풀리면 현지에서 만난 여인과 자식까지 버린 상당수 유배인과 달리 그는 아들을 호적에 올렸으며, 이후 김진구와 김춘택 등 제주에 유배 온 지식인들은 그의 후손과 제자들을 찾아가 사제지간을 맺어 이익이 형성한 학맥을 이어갔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3)
제주 최고의 학자"고홍진. 김진용."발굴
2012.01.21. 00:00
▲국어학자인 고 이숭녕 박사가 지은 유허비는 명도암 선생이 유배 중인 이익에게 수학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고홍진(高弘進),1602(선조 35)~1682(숙종 8) / 현존 제주도 읍지 중 最古 '탐라지' 저술
김진용(金晉鎔),1605(선조 38)~1663(현종 4) /귤림서당 전신 장수당 지어 유학자 양성
이익 집안에는 그가 사마시(소과)에 이어 식년(식년시·대과) 을과에 연달아 장원급제해 받은 교지(사령장)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 방목(과거 합격자 명부)에는 그가 조정에서 3년마다 시행하는 문과 정기시험이자 합격 정원이 33명에 불과한 식년시에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익이 제주에 유배되자 목사 이괄은 그를 동몽교관으로 발탁해 후학을 양성하게 한다. 관아에 부속된 학교에서 벼슬아치와 지역 유지들의 자녀 중에서도 뛰어난 영재들을 가르친 이익은 지금까지도 제주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고홍진과 김진용을 발굴해낸다.
고홍진(1602~1682)은 1666년(현종 7년) 문과 병과에 급제했으며, 당시 전국 28명의 급제자 중 제주에서는 고홍진과 함께 문영후와 문징후가 포함됐다. 고홍진은 이후 조선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성균관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전적(정6품) 벼슬을 받기도 했다.
고향 제주에 내려와 향교에서 유생들을 교육하는 교수가 된 그는 현존하는 제주도 읍지 중 가장 오랜 '탐라지'를 남긴다.
이원조 목사가 편찬했다는 탐라지의 사실상 저자인 그는 제주의 자연환경에서부터 인물·시문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특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해 17세기 중엽 제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후 제주도에 관한 문헌들은 모두 탐라지를 기초자료로 활용하게 됐다.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명도암 선생 유허비
김진용(1605~1663)은 역사 사마시에 급제한 뒤 숙녕전(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전각) 참봉(종9품)에 제수됐지만 귀향했다. 이후 그는 지금의 제주시 명도암에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교학을 일으켜 사람들이 그가 거주하던 지명을 따 명도암 선생이라 칭송했다.
특히 그는 이괴(1607~1666) 목사에게 선비를 양성하기 위한 학사를 세우자고 제안해 지금의 오현단 자리에 장수당을 건립하게 했다.
이괴는 장수당에 학생 35명을 기숙시키며 학업을 닦게 했는데, 후에 충암사(김정의 사묘)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명실상부한 서원인 귤림서원이 세워지게 됐다.
이괴 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맡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만일가가 감목관직(조선시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종6품 외관직)을 세습하게 된 데에는 비슷한 연배인 이괴와 함께 고홍진, 김진용이 큰 역할을 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당시 조선 최대의 목장이 있었던 제주지방에서는 제주판관과 정의현감, 대정현감이 감목관직을 겸임했다.
이 때문에 김만일가는 사복시의 지휘와 견제를 받으며 계속해서 말을 수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승정원일기에는 제주목장과 관련된 폐단과 사복시의 행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연안이씨의 '존경록(尊敬錄)' 이괴 부분에는 이괴 목사가 말 공납 폐단과 사복시 행패를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해 효종 임금이 그 개선책을 사복시에 걸어두게 한 일과 말에 낙인 찍는 일을 처음으로 시행했다는 내용도 있다.
말 수탈을 피하기 위한 감목관 세습 역시 이괴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 임금에게 요청해 이뤄졌다. 그 사실은 제주 경주김씨의 문헌인 '초대 감목관 김대길의 실록'에 언급되고 있으며, 1800년대 말 남만리가 지은 '탐라지'의 '관풍인물난' 이괴 부분에서도 녹산장 감목관을 주청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2년 1개월의 짧은 목사 재임 기간에 이괴 목사가 사복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김만일가에서 감목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까지 자신과 뜻을 같이해 장수당을 짓고 학자를 양성한 김진용의 조언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고홍진은 자신의 차남인 고상흘이 김만일의 손녀와 결혼해 김만일가와 사돈관계를 맺었으며,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진용의 일가였다.
이익의 제자이면서 당시 제주 최고의 학자였던 고홍진과 김진용이 스승에 대한 보답이자 사돈집안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목사에게 진언해 김만일 집안이 감목관직 세습이라는 특권을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만일의 3남 김대길이 초대 감목관이 된 이래 감목관직을 세습하게 된 김만일가에서는 산마장에서 자유롭게 말을 길러 이후 국가에는 3년마다 200필씩 말을 바치는 일이 정례화됐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4)
얽히고설킨 인척관계 명문가의 재탄생
2012.01.30.00:00
▲이익 제자 중 대표적 인물 고홍진은 풍수지리에 능해 조선 제주의 3대 명인으로 불렸다.
사진 위는 제주시 해안동에 있는 고홍진 부부 묘. 고홍진과 그의 손자 고원·증손 고만첨 묘는 당시
무덤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오른쪽은 고만첨 묘 문인석.
조선시대 제주 삼대 명인 고홍진 집안과도 사돈
동계 정온과 주고 받은 시문 '간옹유고'에 전해
모든 유배인이 유배생활 중 혼인을 하거나 혹은 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리안치 유배형은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킨 감금조치였기 때문에 상당수 유배인 들이 독신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제주에 유배 온 사대부 중 반역죄를 저지른 유배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자를 얻어서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익 역시 유배 중인데도 김만일의 딸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를 잃어 홀아비 신세였기도 했지만 제주목사 이괄이 그를 동몽교관으로 삼을 만큼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익이 당시 제주에 먼저 유배와 있던 동계 정온과 주고받은 시에는 정온 또한 제주에서 첩을 얻어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져 유배인의 혼인과 축첩이 흔한 일이었음을 알려준다.
"가엾어라 그대의 아들 잃은 눈물, 더구나 어린 양과 같은 재롱둥이였지. 자애출천(慈愛出天)은 비통하지만 상심이 지나쳐 병이 생겨서도 안 되는 일이거늘. 손을 들어 바라보는 백성들도 슬퍼하니 귀중한 몸 잘 보호하소서." 정온이 제주에서 얻은 어린 아들이 죽자 이익이 정온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이 시는 '간옹유고'를 통해 전해진다.
동몽교관에 임명된 이익은 언제 풀릴지 모르는 귀양살이 속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 혼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 중 대표적 인물인 고홍진과 김진용은 마침 이익이 유배 오면서 데리고 온 장남 이인실과 비슷한 나이여서 서로 자극을 주며 학업에 정진한 결과 문과 급제 등의 성과를 일궈냈다고 할 수 있다.
이익 입장에서는 유배생활 중에 유학자로서 학문의 목적이자 큰 보람이라 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이라는 결실을 맺은 셈이다.
제자 중에서도 성균관 전적 벼슬을 받아 고전적이라 불리는 고홍진은 남다른 기행 때문에 많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제주도가 지난 1985년 발간한 '제주도 전설지'에도 그의 이야기들이 실렸다.
유학자이면서도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고홍진은 어렸을 때 자신이 공부하러 다녔던 서당 훈장이 세상을 떠난 뒤 명당자리를 봐달라는 후손들의 간청에 명당 대신 험지를 지정해 묻게 한다.
이를 알게 된 암행어사가 꾸짖자 고홍진은 스승이 쇠꼬챙이로 찌르면서 학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원수를 갚으려 했다고 답변한다.
고홍진은 의술에 능한 좌수 진국태, 주역으로 유명한 현감 문영후와 더불어 제주가 낳은 삼대 명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익이 제주에서 키운 제자들은 이후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도 이익과 김만일의 후손들과 인연을 맺으며 인맥과 학맥을 이어갔다.
그렇게 맺어진 대표적 인물인 고홍진은 그의 차남 고상흘이 김만일의 손녀와 결혼하고, 고상흘의 아들 고원은 이익이 제주에서 낳은 아들 이인제의 사위여서 인척이 다시 사돈이 되기도 했다.
고원 부부 입장에서 보면 고원의 어머니는 김만일의 손녀이고, 고원의 장인은 김만일의 외손이어서 증손끼리의 혼인이니 외가 쪽으로 6촌간 결혼이다. 이처럼 김만일 집안인 경주김씨, 이익 집안인 경주이씨, 고홍진 집안인 제주 고씨는 한 집안으로 엮어지게 됐다.
이익이 유배가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제주에 남아 있던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다시 사제지간과 사돈지간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중심에는 이익의 부인인 경주김씨가 있었다. 또한 이러한 결혼의 형태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에다 혼인으로 맺어진 양가의 결속력을 더욱 다져 제주의 명문가를 만들어 갔다.
이익 후손인 경주이씨 집안에는 산마장 감목관을 세습하게 해준 보답으로 김만일가가 김만일의 외손이자 이익의 후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줬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서귀포 하논 논밭을 비롯해 지금의 서귀포시와 남원읍 일대에 산재한 농토와 임야, 묘터가 그렇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풍수에 능했던 고홍진의 묘는 현재 제주시 해안마을 남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손자 고원과 증손 고만첨의 묘는 서귀포시 남성동에 남아 있다. 모두 원형이 잘 보존돼 조선 중기 제주지역의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5)
학풍과 기개 제주후손들에게 이어져
2012.01.06. 00:00
▲간옹 이익의 제주 유배지. 현재 관덕정 북쪽 골목길에 표석을 세워 놨다.
이익이 제주에 유배 중이던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인목대비 어머니 노씨를 제주 관비로 유배 보내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인조가 궁궐을 점령할 때 대장으로 나선 이가 이익을 동몽교관으로 발탁한 제주목사 출신 이괄이다. 반정이 성공하자 이익은 다른 유배인 들과 마찬가지로 유배에서 풀려 사헌부 장령(정4품) 직에 제수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생명을 구해준 영의정 기자헌 역시 유배에서 풀려도 '불사이군'을 내세워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제주시 오라동에 남아 있는 이익 부인 경주김씨의 묘. 사진은 원형이 바뀌기 전의 모습으로 지
금은 화려한 비석과 구조물로 장식돼 있다.
이후 조정에선 김류와 이귀 등 공신이 권세를 잡고, 반정 대장을 맡았던 이괄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밀려난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괄은 의금부도사가 모반을 꾀한 혐의로 아들을 잡으러 오자 반란을 일으켜 1624년 1월 한양으로 쳐들어온다.
우리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반란군에게 수도를 뺏긴 이괄의 난이다. 결국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대신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데 이익은 행재소(임금이 궁을 떠나 잠시 머무는 곳)에 늦게 나타났다는 이유로 삭탈관직 된다.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 1624년 4월 충주 고향집에 머물던 이익은 말발굽에 치어 마흔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4년 6개월 동안의 유배에서 풀려 돌아간 지 11개월 만의 일이다. 당시 경주김씨와 제주에서 낳은 아들 인제는 제주에 살고 있었다.
인제가 네 살밖에 되지 않아 경주김씨와 인제는 이익이 정착한 후일 상경을 기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유배인들 역시 유배지에서 생긴 가족은 보통 유배가 풀리고 나서 1년 혹은 3~4년 정도 지나서 데려갔다.
이익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인제는 형 인실과 교류하고, 무과에 급제해 서울에 올라가 훈련원 판관(종5품)까지 지내게 된다.
자식을 제주도에 잡아두지 않은 어머니의 용단과 그 영향력은 오래도록 이어져 한말 의병장 최익현도 제주 유배 때 이익 후손 이기온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감목관이라는 친정의 명성과 경제적 부, 남편이 가졌던 중앙정계에서의 입지와 명예, 남편이 유배 중 가르친 총명한 제자들의 영향력을 모두 아우르는 처신을 아들을 위해 슬기롭게 구사한 덕분이다.
이익 집안은 임진왜란 이후 명가로 자리 잡아 이익과 장남 인실의 묘갈명(묘비명)은 각각 영의정 최석정과 우의정 윤증이 지어준다.
숙종 임금의 손위 처남 김진구도 이후 제주에 유배 왔을 때 이익 손자 이윤과 벗으로 사귀어 가깝게 지낸다.
▲북헌 김춘택이 지은 이익 손자 이윤의 묘비
이윤의 아들 중발과 중성 형제는 김진구 밑에서 유학을 공부했으며, 중발은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과 교분을 맺기도 한다.
이윤이 죽자 중발은 뛰어난 문장가였던 김춘택에게 부친의 비명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현재 서귀포시 효돈동 월라봉 정상에는 김춘택이 지어준 묘비가 남아 있다.
이윤에 관한 내용은 김춘택의 '북헌집'에도 기록돼 있다. "이군의 이름은 윤이다. 즉 고(故) 장령인 익(瀷)의 후손이다.
장령은 광해군 때 절개를 세워 제주에 유배되어 살았다고 한다. 윤은 무과 출신이나 실은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같은 나이인데 주교로서 천총을 역임하고 별장이 되었다.
이씨가 우리에게 집안끼리 정들게 한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김진구)가 유배를 오면서 시작되었는데 윤은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그 아들이 중발인데 중발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배워 유생들 가운데서 이름이 났다."
이처럼 이익이 제주에 학풍을 진작시키고 그 후손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맥을 이어가게 된 것 역시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자식을 혼자 양육한 경주김씨를 빼놓곤 설명할 수 없다.
이익의 후광도 있었지만 그가 숨진 후에도 인제가 어느 정도 자라자 서울로 보내 전 부인의 자식인 인실과의 연결고리를 튼실하게 한 경주김씨의 원대한 포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익이 숨지고 42년 후인 1666년 사망하기까지 제주목 산지에 살았던 이 여인의 지혜와 기개는 제주 선비들에게 간옹의 이름을 면면히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이익 문집과 이익 본가의 족보에는 김만일의 딸 경주김씨에 대한 기록이 올라 있지만 제주도의 경주김씨 족보에는 이익에 관한 기록이 없다. 현재 제주시 오라동에 남아 있는 경주김씨의 묘소에서 그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끝>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