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4. 11. 17:22
■초평면 용정리 양촌(陽村) 마을
뉴스일자: 2009년03월17일 11시40분
초평은 산의 형국이 와우형(臥牛形), 즉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초평(草坪)이라는 지명 자체도 이 지형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소가 길게 누워있는 모습이니 당연히 풀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명명된 것이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6만대군을 거느리고 이 땅을 밟았던 이여송이 싸움에서 패하자 함께 데리고 왔던 지사 두사충(地師 杜師忠)의 참수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벽오공(碧梧公)이 두사충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이여송을 설득해 두사충은 참수를 면하게 되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벽오공의 묘터를 물색하게 되는데 이곳 초평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앉아 “이 곳은 와우형(臥牛形)으로 여기에 터를 잡으면 불농불상 삼백년기지(不農不商 三百年基地)라, 자손들이 번성할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 이유인지 이곳에 거성했던 경주이씨의 후손 중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인 양촌의 후면에는 쌍오정이 지어졌고 소의 가슴 부분은 가장 풍요로운 자리로 벽오공의 묘가 자리잡게 되었다.
소가 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건너편 마을은 풀밭을 뜻하는 지전(芝田)이라 이름짓고 햇볕으로 풀을 잘 키우라는 뜻으로 지금의 양촌(陽村)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양지 바른 구릉 위의 자연부락
82가구에 274명이 거주하고 있는 양촌마을은 제법 큰 자연부락이다. 이름만큼이나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구릉 위에 형성된 마을로 그 옛날 100여 채의 기와집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을 만큼 역사도 오래 되었다. 초평저수지를 조성하던 시기에 그쪽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고향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가까운 이곳에 많이 정착해 살고 있다.
●이름난 효자효부의 마을
지금은 벼농사를 주로 짓고 있지만 예로부터 이곳은 마늘산지로 이름 높던 곳이어서 이맘때쯤 이곳으로 시집오는 새댁들은 제일 먼저 푸른 언덕을 눈에 담고 마을로 들어섰다. 한참 마늘 밭의 일이 많을 때는 외지에서 300여명씩 들어와 마늘을 캐고 엮는 작업을 할 만큼 분주한 마을이었다.
고령화가 진행되다 보니 일손도 부족하고 10년 전 마늘가격이 지금도 그대로니 자연스럽게 마늘농사를 접게 되었다고 한다.
봄내 풍부한 햇볕을 머금고 알이 굵어진 마늘은 아낙들의 머리에 이워져 진천장이나 증평장으로 팔려 나가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출가시키는 밑천이 되었다. 그 고생을 아는지 자손들이 부모를 극진히 여겨 효자효부가 많은 마을로도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다.
●교육열 높아 수많은 인재 배출
언제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 마을에는 우스갯소리로 대통령 빼고는 다 나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인재가 많다.
가까이 유영훈 진천군수가 이 마을 출신이고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이렇게 인재가 많은 배경에는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유별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양촌교가 생기기 이전 장마가 지면 여지없이 다리가 떠내려가 어머니들이 아침마다 아이들을 업어서 물을 건네 등교시켰다 한다.
동네가 커 아이들도 많았던지라 한 아이를 건네고 나면 다른 아이가 줄서 있고, 또 그 아이를 건네면 다른 아이들이 줄서 있어 등교 시간이 지나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조속한 토지문제 해결로 심리적 안착 고대
이 지역의 경작지는 예전 청원농조의 소유로 지금은 농촌공사에서 그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 농사짓고 살아온 주민들은 토지의 분양이나 양도 등의 대책을 원하고 있으나 농촌공사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고 있어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고 한다. 하루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어 더 이상 심리적인 부담 없이 안착할 수 있기를 주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마을유적지
쌍오정터(雙梧亭址)
조선중기의 문신 이시발(李時發)의 후손 이인엽(李寅燁)이 지은 정자의 터로 초평천이 흐르는 양촌마을385번지인 양촌교 입구의 벼랑에 위치해 있다. 쌍오정이라 이름한 것은 이인엽의 조부인 이시발의 호가 벽오(碧梧)이고, 증조부인 이대건(李大建)의 호가 오촌(梧村)이었던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인엽은 이 정자를 지은 후에 천여권의 책을 모아 서고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쌍오정터
출처 : 이 뉴스클리핑은 http://jcjachi.com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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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면 용정리 양촌(陽村) 마을
용정리 양촌마을은 초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국도 34호선을 따라가거나 초평천 건너 지전마을을 통하여 갈 수 있다. 관련 유적으로 지전마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인 진천 이시발 신도비(李時發 神道碑)를 비롯하여 이대건 신도비(李大建 神道碑), 이대건·이시발·이경연·이인환의 묘소가 있다.
양촌마을 마을 입구 다리 북쪽에는 쌍오정 터가 있고 그 아래에 ‘청령대’ 각자가 있다. 마을 가운데에는 완위각 터가 있다.
이시발 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세운 것으로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이정영(李正英)이 전(篆)하였다.
조선 명종 대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인 이대건과 이대건의 아들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시득이 제천에서 청주 오근장으로 이거하였다가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400년간 세거해 오고 있다.
이시발은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경상감사를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서 전후 복구에 힘썼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한때 고향인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로 낙향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다시 탄핵을 받자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1626년(인조 4) 남한산성 수축을 감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초평면 용정리 지전마을에 있는 아버지 이대건의 묘소 아래에 있다.
이시발의 둘째 아들 이경휘(李慶徽,1617~1669)는 1644년(인조 22)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시발의 셋째 아들 이경억(李慶億,1620~1673)은 164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672년(현종 13)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다.
이시발의 넷째 아들 이경충(李慶忠)은 무과에 급제한 뒤 아버지 이시발을 도와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이등공신이 되었고 찰방을 지냈다. 이시발의 다섯째 아들 이경선(李慶善, 1599~1636)은 1632년(인조 10)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다 광주 검천(檢川)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경휘의 아들로 큰아버지 이경연(李慶衍)에게 출계한 이인환(李寅煥,1633~1699)은 1665년(현종 6) 문과에 급제한 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미움을 사 외직을 전전하다가 1679년(숙종 5)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다시 기용되었고,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이후 고향에 은거하였다가 1694년(숙종 20) 다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인환의 아우 이인혁(李寅爀, 1634~1701)은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형과 함께 진퇴를 거듭하였고, 1694년 갑술환국 이후 61세에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1708년(숙종 3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는 데 힘을 기울였다. 1718년경 장서 10,000여 권을 모아 완위각(宛委閣)이라는 서재를 열었다.
완위각은 달리 만권루(萬卷樓)라고도 하는데, 20세기 초까지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 연구에 정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학산(學山) 정인표(鄭寅杓),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은 초평면 금곡리에 거주하며 완위각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