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5일 (엡2 하나님의 처소).hwp
2016년 6월 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교회창립 4주년 예배 * 홍지훈 목사
에베소 2: 14-22
하나님의 처소
오늘은 평화목 교회 창립 4주년 되는 날입니다. 주보 오른편 위에 날짜표시를 하는데, 제 5권이라는 말이 이제 5년째라는 뜻입니다. 오늘이 만 4년 되는 날입니다. 매년 예결산 공동의회 때에 그해 새로 나온 교우들 명단을 알려드리는데, 매년 돌아오는 창립주일을 다섯 번 째 겪는 교우들은 우리 평화목교회의 창립과정에 대하여 처음부터 소상히 알고 있는 분들이고, 그 후에 오신 분들은 평화목교회의 정신에 대하여 교회요람에 실어둔 내용으로 이해하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의 정신을 모른다면, 이제라도 요람에 나와 있는 설립 선언문 초안과 평화목교회 정신을 읽고 마음에 합당한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교회에 나와서 함께 신앙생활하실 분이 있다면, 언제나 이런 정신을 먼저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자꾸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교회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로 채워지고, 목사도 그런 풍성함에 도취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략 30여 년 동안 폭발적인 성장 일변도를 달려온 한국교회의 지형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맞고 있고, 이 위기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됨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설교 제목이 그 답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교회는 건물이 되고 맙니다. 건물에 교회라는 이름만 붙여놓으면, 당연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 여기저기에서 교회는 건축물이 아니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세운 건물 안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처소라는 말은 건물에 비유한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명하다보니 교회가 마치 건물처럼 표현된 것일 뿐이지, 그 속뜻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지난 4년간 창립주일 때마다 제가 했던 설교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지난 세 번의 창립주일 설교본문 중 두 번이 에베소서 본문, 한 번이 야고보서 본문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네 번째 본문도 에베소서를 들고 나왔습니다. 지난 번 것을 찾아보기 전에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에베소서가 가장 적합한 가 봅니다. 이러다 보면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교회사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라, 교회에 대하여 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교회사를 강의하다 보면, 지금까지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여 처방전을 쓸 때, 반드시 의학지식과 임상경험이 그 기준이 되듯이, 교회를 진단하고 처방할 때에도 진단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신학과 성서라는 기준입니다.
우리교회가 신학이 있는 교회가 되자는 제 주장은 제가 신학박사이고 신학교수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학은 전문가가 하기도 하지만, 평신도가 할 수도 있는 학문입니다. 학문적 방법론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 방법론으로 할 것인가의 차이 뿐입니다. 신학도 인문학의 일종이어서, 인문학 지식만 있어도 신학적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Science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Science란 과학이라는 뜻도 있지만, 학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과학적인 방법론도 인문학과 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중세 때의 신학자들은 수학자, 물리학자 또는 천문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믿자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하고, 생각할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2장 14절의 첫 마디 말씀이 우리교회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분쟁이고 분열입니다. 함께 있어야 할 것이 갈라져있으면,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부부가 다투다가 맘이 서로 상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말하지 않고 지낸다고 가정해 봅시다. 집안이 조용하겠지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매우 평온해 보일 것이 분명하지만, 그 집 아이들은 죽을 맛일 겁니다.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오늘 겪는 모든 문제도 민족이 분단되어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어 하나 되게 만드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양자사이의 원수 된 것을 없애고, 계명의 율법조문을 없애고, 둘을 하나의 새사람으로 만들고 평화롭게 한 후에, 하나님과 화해시켰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분석해보면, 평화의 목적지가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불편한 분쟁의 관계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셨습니까? 저는 매우 여러 번 경험합니다. 언제 가장 불편한가하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인데, 분명한 일인데, 이렇게 해야 마땅한 일인데, 하나님이 전혀 도와주실 생각을 안 하고 전혀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박국 3장 말씀을 잘 아시지요.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하박국 3:17-18) 복음성가 가사로 바꾼 것을 읽어드렸습니다. 인간의 삶이 아무리 궁핍해도 하나님 때문에 기쁜 것이 바로 하나님과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이 과정을 만들어 가는데 예로 든 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된 것을 허물어 서로 평화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싸움은 오늘날로 치면, 유대와 팔레스타인의 분쟁이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입니다. 바울의 시대에는 율법조문대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가운데 놓고 서로 싸우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친구와 문자로 대화하다가, “세상 방식으로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하길래, “어차피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자유라는 이름의 종착역”이라고 했더니, 답신이 오기를 “우리는 자유역에서 조만간 만날 것 같네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했습니다. “그래요 자유역에서 만나서 함께 평화역이 어디 있나 찾아봅시다!”
저는 우리 평화목 교우님들이 삶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마음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 평화하기 좀 쉽지 않을까요? 종교개혁자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놀라운 평강과 안정이 우리 양심에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인생의 굴레가 정말 불편하고 힘들어서 속상할 때, 조용한 곳에 가서 “하나님!”하고 불러보십시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느낌이 속에서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고,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어서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평화목교회가 이런 교우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교인인가하면 “그리스도가 나의 평화임을 아는 교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의 속뜻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신뢰를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원수 맺고 사는 우리들을 다시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롭지 못하면 그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막힌 담을 허물고, 원수와 화해하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나의 평화라는 사실을 마음에 품어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 중에 원수로 살던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15절) 독특한 표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 안에는 이스라엘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이 나뉘어 있어서 이방인이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 장벽을 허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나가는데, 율법계명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의 새 사람”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쳐서 하나의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의 인격을 한 방향으로 정리하라는 말인지 모릅니다. 로마서 7장 22-24절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절대로 한 방향으로 같이 갈 수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 두 사람이 만나서 화해하듯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갈팡질팡하던 우리 마음도 하나가 되어 새 사람이 되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포로가 되어서 앞에 절벽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힘들더라도 그리스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을 하나가 되도록 흡수하여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일을 기뻐해야합니다.
그렇게 모인 새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이 돌로 하는 교회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가 됩니다. 물리적인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정신이 머무는 우리 마음의 연합을 말합니다.
교우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마음이 평안합니까?
어떤 지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과 평화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느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시는 처소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우리는 평화목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의 평화로 새롭게 태어난 교회입니다.
평화와 화목이 있는 교회, 평화나무로 자라서 인생살이에 지친 세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길목으로써의 교회인 평화목교회가 더 잘 자라서 세상에 작은 소망을 전해주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