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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대전문화유산울림 원문보기 글쓴이: 강춘자
『동구의 산하』동구문화원(1999년)
인동시장
장터: 인동의 인동 4거리 서북쪽으로 지금의 대전상가, 인흥상가, 동대전상가라고 부르는 지역에 5일장이 섰었다. 그리고 이 솟을 장터라고 불렀다. 1940년대부터 한참 동안은 농산물의 통제가 심해서 뜸했으나 그 이전부터 상당한 규모의 장터였다. 큰 장날이면 사람들이 넘쳐서 보문교 너머 문창동쪽 대전천변에 줄지어 농촌에서 나온 아낙네들이 농산물을 펼쳐 놓고 거래하기도 했었다. 보문교 부근에는 음식점이 많았고 넓은 광장도 있었다. 이 광장에는 쌀. 보리. 콩 등 농산물과 고추. 마늘 같은 물건이 거래 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록, 순조27년(1827)의 『임원경제지』에 대전장은 2일과 7일에 선다 하였고 철종 10년(1859)의 기록인 호서읍지에도 2일과 7일이 대전장이 선다 하였다. 그러나 일제때의 기록에는 1일과 6일에 대전장이 선다 하였고 1940년대까지도 1일 6일장이었다.
여기서 고찰해 봐야 할 것은 대전장을 두른 주변의 장터와 장날이다. 유성장은 5일과10일장이고 옥천장과 대전장은 똑 같은 2일과 7일장이었다. 그리고 신탄진장은 3일과 8일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부상들이나 장꾼들이 대개 유성장을 보고 같은 날에 서는 대전장은 거래가 시원치 않아서 바로 큰 장이서는 옥천장을 보고 이어 신탄진장을 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대전장이 서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촌장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인동에 재래식 5일장이 서기 시작한 것도 조선 시대 후기부터가 아닌가 한다.
일제때 기록을 보면 1914년에 대전시장의 확장 공사를 하면서 여기에 또한 1905년에는 대전역과 인동시장 사이에 도로가 개통되고 이어 대전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장도 점점 커지고 해서 유성장과 옥천장 사이에 1일 6일로 장날을 변경하여 이때부터 유성장, 대전장, 옥천장, 신탄진장을 보게 되어 대전장터는 급속히 커졌으며 명실공히 큰 시장으로 부각된 것이다.
일제 초기의 기록을 보면 1900년 초의 대전장터는 장옥만 서 있을뿐 사람들은 살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장터가 생긴 시대도 조선시대의 영조 이후로 보고 일제 때 큰 시장이 되고 한때는 대전 신시가지와 거리가 멀다 하여 억지로 지금의 동구청 부근으로 한때 옮기기도 하였으나 1954년 5월을 기해서 다시 인동의 제자리로 옮겨왔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래식 장터가 거의 폐시 상태에 이르듯 대전 장터도 근대적 상가로 그 면모가 바꾸어지며 재래식 장터는 그 그림자를 감추어 가고 있다.
지금은 대전 공설시장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옛날의 장터 안에 지금은 대전천변 보문교 부근 상가를 대전상가라 하고 인동네거리 북쪽 상가를 인흥상가라고 부른다 한다.
쇠전거리-인동 4거리 서남쪽으로 대전천변에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을 쇠전거리라고 불렀다. 장날 우시장이 섰던 자리라 쇠전거리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나무장터-인동 남쪽으로 효동과 접해 있는 야산 아래에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을 나무장터라고 불렀다. 1930년대만 하여도 인동과 효동이 접해 있는 지역에 길게 장날이면 나무장이 서는데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우마차에 가득 싣고 나오는 나무와 지게꾼들이 지게에 지고 나오는 솔가지, 장작 등이 길을 메우고 그 길 안쪽에 마을이 있었다. 나무장이 서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해서 나무장터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인동의 3.1운동-인동장터는 1919년에 일어났던 3.1운동때 만세 시위가 있었던 곳이다 .대전의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인동시장 가마니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이라고도 하고 또한 3월 27일에 일어난 만세시위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만세 시위가 대전의 3.1운동이었는가 하는데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간다. 그 해 3월 6일이라는 기록은 변평섭의 「한밭승람」의 기록이고 3월 27일이라는 기록은 1959년에 발간된 「3.1운동 비사」의 대전 3.1운동 기록이다.(효동 나무 장터의 3.1운동 참조)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있은 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만세 시위가 여러 곳에서 봉기될 때에 3월 6일 가마니장터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그러나 대전에서의 3.1운동에 따른 큰 시위는 3월 27일 오후 3시경 효동 나무장터에서 봉기되어 인동시장에서 확대되고 대전역을 독립만세 시위 속에 합세하게 했던 것이 가당 큰 시위였다. 인동장터에서는 4월1일에도 만세 시위가 있어서 3월 27일 이후에는 만세시위의 분위기 속에서 잦은 시위가 있었다.
양만지상회터-인동네거리 북쪽으로 큰길에서 인동사무소로 들어가는 입구쪽에 양만지상화라고 부르는 큰 백화점이 있었다. 1930년대에 호황을 누리던 백화점식 연쇄점으로 당시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던 미나가이(三中)나 도요구니(豊國)와 동등한 백화점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백화점이란 뜻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상점안에는 포목, 신발, 잡화 등이 진열되어 있었으나 상점 현관부터 농기구가 진열되어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상회라는 인상도 갖게 하는 큰 상회였다. 1945년 말에 물자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문을 닫았다.
회덕금융조합터-원동4거리 서족으로 인동 11번지에 일정시대에 세운 회덕금융조합이 있었다. 지금의 효성학원자리이다. 회덕금융조합은 1942년 8월 9일에 창립을 해서 당시 대덕군 8개면을 담당하여 조합원 2,158명을 확보하고 농촌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목적 아래 창립되었으나 일제 말기에 발족하여 제대로 활동도 못한채 전쟁 수행을 위해 가마니 수집 등 전쟁 수행에 동원되어 농민들로부터 가마니조합이란 빈축도 샀던 조합이었다. 1950년 6.25동란때 폭격으로 뼈만 남았다가 그 뒤에 없어진 건물이다.
대전전기주식회사터-인동 철도변 마을 동쪽으로 경부선 선로 옆으로 우뚝 솟아 있는 큰 빨간 벽돌집이 있는데 이 건물이 대전시가지에 처음 전기를 공급하던 전기발전소가 있었던 건물이다. 대전전기 주식회사는 1911년 8월에 창립하여 영국에서 발전기 2대를 도입하여 1912년 1월 1일부터 대전시가지에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업이 번성하여 충주, 청주, 공주까지 전원 사업을 흡수 크게 발전하였으나 1937년 남한합동전기회사에 합병되어 창업 27년간의 막을 내렸다. 사무실은 남쪽에 있었고 뒤에는 발전만 하던 발전소이다. 지금은 한국전력창고라고 부른다.
대전자동차강습소터-인동에 대전에서 처음으로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강습소가 있었다. 1920년대 말기에 세운 강습소로서 충남 대전 지역에서 자동차 운전면허 1호인 문갑동이 운영하던 강습소였다. 뒤에 부사동 보문산 아래로 강습소를 이전했던 그 강습소가 처음 인동에 있었다.
조선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터-원동 네거리 서남쪽으로 네모진 벽돌집이 있는데 여기에 있던 회사는 한국의 토지를 착취하는 회사로 일제 침략과 그 운명을 같이한 회사였다.
한전기술연구소-인동사무소 서북쪽으로 대전천변에 있다. 한전(韓電)이 이 곳에 있다가 용전동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한전기술연구소가 들어섰다.
중동
극장통-중동 지금의 중앙극장이 자리한 길을 극장통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도 극장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대전에서 가장 화려한 길이었다.일제 때 중앙극장은 대전극장이라고 불렀고 그 거리에는 장난감, 모형비행기, 재료점,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가족들이 산책하는 거리였다. 극장이 있다 해서 극장농이라고 부르던 거리였다.
대전어채시장 -중동 산업은행 대전지점 동남쪽으로 중앙극장 뒤쪽으로 대전어채시장이 있었다. 일본인 상인인 光元之가 1914년부터 건물을 세우고 부산, 목포, 멀리는 함경도 원산 등지에서까지 생선과 야채를 운반해와서 판매하던 시장이었다. 대전 부근의 사람들이 生명태를 맛보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인 것 같다.
야채 시장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금산, 공주, 청주까지 어채의 도매를 하였으며 1915년 1년간의 매출고가 33,784원이라는 통계이고 보면 대단한 어채시장이었다. 1945년 8월 15일이후 이곳에 청과물 시장이 생긴 장소이다.
대전도매시장-대전역 삼거리 서남쪽에 자리한 상가를 대전도매시장이라고 부른다. 상품을 도매, 소매하는 상가이다. 일제때에도 주로 일본인 상인들이 자리를 정하고 상점이 즐비했던 곳이다. 6.25동란 후에는 목판에 상품을 늘어놓고 어렵게 고비를 넘긴 상가이다. 지금은 완전히 쇄신되어 도매 시장으로 부각되었다 하여 대전도매시장이락 부른다.
목척다리-중동에서 선화동으로 대전천을 건너 다니는 다리를 목척교 또는 목척다리라고 부른다. 지금은 복개되어 양쪽으로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세워지고 그 자리에 다리가 있었다.
옛날에는 대전을 상징하는 다리였다. 목척교의 처음은 징검다리부터 시작된다. 1908년 이전에는 대전천을 건너다니기 위해 돌로 징검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그때 아침마다 소금이나 젓갈을 지게에 지고 팔러 다니던 장사꾼 한 사람이 매일 이 곳을 지나가는데 꼭 징검다리 중앙쯤 와서는 지게를 받쳐 놓고 쉬는데 그 모습이 나무자처럼 정확했다. 풀이 해서 쉬는 시각도 매일 똑같고 비가 올 때는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는가 하는 가부도 알아 볼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시계가 구하기 어려울 때 아침이면 소금장수 또는 젓갈 장수로 점치기도 하고 비가 오면 소금장수가 지나나 물어보고 도강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소금장수가 쉬어 가는 정확한 나무자의 띠눈과 같다 해서 목척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후 1908년에 나무다리로 가교가 놓아지자 징검다리의 이름을 따서 목척교라고 불렀다. 1912년에는 다리의 폭이 2칸으로 좁아서 3칸으로 폭을 넓히고 1924년에는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도록 다리를 개축하고는 대전교하고 다리 입구 양쪽에 새겼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목척교라고 불러온 다리이다. 6.25 이후 1970년대에는 전쟁의 상처를 혹독하게 입은 대전의 당시 생활상이라고 말하듯 목척교를 주제로 하는 노래인 “대전 부루스”와 함께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리던 다리이다. 1940년초에는 다리 위에 전깃불을 밝히고 야시(夜市)도 섰던 다리로 대전의 동맥 같은 다리였는데 아주 없애 버렸다.
먹자 골목-중동 중앙극장 뒤쪽으로 홍명상가를 이어지는 길을 속칭 먹자골목이라고 부른다. 여러 음식점이 즐비하게 있어서 식욕을 돋구는 식당 골목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1980년대만 하여도 화식집인 화월(花月)을 비롯하여 갈비집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태평회관 등이 있었으나 서민층이 많은 대전에서는 지금 먹자골목이 판을 친다. 쇠머리국밥집, 닭튀김집, 순대집, 구탕, 냉면집이 즐비하게 서있는 거리이다.
대전의 서점-대전의 서점은 중동에 밀집되어 있었다. 지금의 대전도매시장 역전쪽으로 스스끼서점(鈴木書店)이 있었고 대전역 맞은편 스스끼서점에서 도청으로 통하는 큰 길 우측으로 빨간 벽돌집에 문방당(文房堂)이 그리고 지금으 제일은행 대전지점 자리에 공문당(公文堂)이라는 서점도 있었다. 스스끼서점은 1910년대부터 문을 연 서점으로 교과서 총판과 일반 서적을 취급하였으며 문방당은 책의 도매 소매를 하는 큰 서점이었다. 그러나 일본 서적을 주로 판매하였으며 공문당에 가면 우리나라 고대 소설이나 이광수의 소설 등을 볼 수 있었다 문방당은 1920년대에 공문당도 그 때 등장하여 해방전까지 서점이 있었다.
풍국백화점-중동도매시장 남쪽으로 백화점 풍국(豊國)이 있었다. 당시 대전에서는 미나가이(三中井) 다음 가는 큰 백화점이었다.
러시아 양복점-중동도매시장 앞으로 길 건너에 백계 러시아인이 경영하던 양복점이 있었다. 소련 혁명으로 고국을 떠난 백러시아인이 경영하던 양복점으로 당시 유행하던 양복을 잘 만든다 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양복점이었다. 양복 값도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양복점보다 배나 비쌌지만 바삐 돌아가는 양복점이었다. 당시 부잣집 귀공자들이 많이 드나들어 화제가 되었으며 그 양복점 주인은 외출을 않기로도 유명했다.
대전 건어물 시장-중동 신도극장 뒤편에 있다. 중앙시장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건어물을 취급하는 도매 겸 소매시장이다.
대전 지하 상가-대전지하상가는 대전역전부터 시작되어 서쪽에 이르러서는 대전천 앞에서 끊기고 다시 대전천을 피해 서쪽 대전천변에서 선화동 도청 앞까지 중앙로 지하에 조성된 상가를 말한다. 지하상가는 상가 중앙통에 휴게시설로 마련했으며 빈 틈 없이 상점이 들어서서 대전의 명물로 등장한 상가이다. 1981년 6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문화관광호텔-
홍명상가-중앙극장 서쪽으로 대전천을 복개한 위에 세워졌다.
중앙데파트-신도극장 서남쪽으로 대전천을 복개하고 세운 상가를 중앙데파트라고 부른다.
삼남일보터-중동에 대전에서 처음 탄생한 신문사터가 있다. 지금의 신도극당 뒤편이다. 대전에 신문사가 처음 생긴 것은 1909년 7월에 창간한 삼남일보(三南日報)이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대전신보(大田新報)가 창간되었으나 뒤에 삼남신보(三南日報)라 다시 제호를 바꾸었다. 그 후 1912년 6월에 삼남신보는 다시 호남일보(湖南日報)라 다시 제호를 고치고 지금의 신도극장 자리에 사옥을 세웠다. 호남일보는 1930년에 다시 조선중앙신문(朝鮮中央新聞)이라 바꾸고 1932년에는 중선일보(中鮮日報)라 다시 제호를 바꾸고 사옥을 국민은행대전지점 옆으로 옮기고 1945년 8월 15일까지 발간을 했다.
천만좌터(天滿座跡)-중동 지금의 대전도매시장 서족으로 천만좌라고 부르는 소극장이 있었다. 1910년대 후기에 문을 연 극장으로 대전에서는 최초의 극장인 셈이다. 1908년에 부호 김갑순이 지금의 은행동 가구점 거리안쪽에 연희장(演戱場)으로 창고를 개량하여 만든 그 연희장보다 창설 연도가 빠르다. 좌석은 300석 정도로서 관객의 수용이 가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대전시민의 추세로 보아 적다고만 볼 수 없는 극장이었다. 기록을 보면 끊기지 않고 흥행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대전의 유일한 극장이았다.
대전좌터-중동 중앙극장 서쪽으로 대전좌(大田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대전에서는 소극장 천만좌 뒤에 생긴 극장으로 일본식인 극장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관객을 600명 정도 수용 할 수 있는 극장이라 하였고 흥행이 끊이지 않는다 했다. 그러나 대규모의 설비가 완전한 극장이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극장의 시설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15년에 등장한 극장으로 대전의 소방대에서 관여한 극장이라 한다. 극장 안에는 다다미(자리)를 깔고 입장할 때는 신발을 벗고 신발주머니에 넣고 들어갔다 한다.
중교(中橋)-중동에서 은행동으로 건너 다니는 다리가 있었다. 1923년 3월에 준공을 하고 그 후 6.25때 폭격으로 없어졌으나 바로 가교를 놓고 건너다니다가 홍명상가가 들어서면서 그 남쪽 부분에 있었던 다리이다. 다리 밑에는 닭전, 염소전 등 가축시장도 섰었다.
중앙극장-산업은행대전지점 뒤쪽(남쪽)으로 중앙극장이 있다. 중앙극장은 천만좌 대전좌에 이어 1933년에 부호 김갑순이 극장 경심관(警心館=현대전극장)을 세운 후 1935년 일본인 도스까 소소(戶場壯)가 세운 극장으로 처음에는 대전극장이라고 불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시공관(市公館)이라하여 대전시에서 직영하는 극장이 되었다가 6.25동란 후에 중앙극장이 되어 오늘에 이르는 극장이다.
원동
대전에 근대 도시가 시작 되던 그때 가옥이 처음 들어선 곳이기도 하고 이어 상가가 조성되고 1910년에는 대전군청이 들어서서 1934년까지 사실상 대전군의 행정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904년전에는 모래 언덕의 초원이었다 한다. 그래서 비가 올때마다 대전천이 범람하여 침수가 심한 황무지였으나 1904년 6월 대전역이 문을 열면서 침략해 오는 일본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기 시작하여 그들이 개간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일본 경찰이 들어 서고 일본 헌병이 들어서고 그들 나름대로 거류민회를 조직하고 그들이 사는 구역을 6개구로 나누어 거류민회에서 구장을 임명하고 일본인들이 주거지로 선택했던 곳이 지금의 원동이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고 그 해 11월에 대전군청도 회덕에서 원동으로 이전해 온다. 당시 군수는 강원로였다.
대전천을 서쪽으로 하고 동쪽을 개간하여 시가지를 조성한 원동 부근은 저지대여서 수해를 자주 입게 되므로 1912년부터 대전천변 원동 인동쪽으로 18,207평의 매립 사업에 착수하였다. 지금의 홍명상가 남쪽부터 인동 전 한전대전지점 부근까지 매립하여 지금의 동구청 자리에 세운 일본인초등학교 즉 대전본정심상소학교의 대지도 넓히고 1916년에는 다시 대전천변 호안 공사를 끝내고 광대한 토지를 조성하였다. 1918년에는 대흥교를 가설하고 1923년에는 중교가 준공되고 이미 준공을 본 목척교(대전교)를 넘어서 서쪽으로 시가지를 넓힐 터전을 마련한 그 중앙지대로 부각되며 1920년대부터 상업적 중심지로 원동은 자리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