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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방 스크랩 토속적 한과 가락의 정서, 박재삼
낭산 추천 0 조회 60 06.09.02 18:3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 없음

토속적 한과 가락의 정서, 박재삼


삼천포가 낳은 큰 시인 박재삼. 그는 무던히도 삼천포 앞 바다를 사랑하고 또 구성지고 서럽게 노래했다. 고향이란 누구에게나 영원한 추억과 꿈의 요람이기는 하다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고향을 평생 동안 아끼면서 아름다운 시 작품들로 표현한 것이다. 박재삼이 있어 삼천포는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시향(詩鄕)으로 세상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남도 끝 한려수도의 한복판 삼천포. 지금이야 사천으로 지명이 바뀌었지만, 그 정겹고 포근한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섬과 바다. 찾아가는 길이 멀기에 언제나 동경과 향수의 이미지로나 간직하고 있을 뿐이지만, ‘삼천포’ 그 이름에서 다가오는 아늑한 그리움과 동경은 쉬 바뀌질 않는가 보다. 그래 더욱 박재삼의 시 작품들을 읽노라면 함께 눈물과 슬픔에 휩싸여 그의 노래에 잠겨들곤 하는 것이다.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이 반짝임처럼/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밤바다에서. 1957>

전통적 우리네 여인을 표상하는 누님의 말 못하는 슬픈 사연에서 화자의 여린 가슴은 여인의 한을 깨닫게 해준다. 누이의 슬픔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은 그로 하여금 밤바다로 나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소리죽여 흐느끼게 만들고 만다.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누이의 슬픔이 밤하늘의 별빛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누이가 섬이 되어 잠들 때, 화자는 물결이 되어 혈연적 동질감을 이루고자 하는, 시인의 애절한 심사가 드러나고 있다. 이같이 우리네 한의 정서를 섬세한 언어와 애잔한 가락으로 토해내는 솜씨가 박재삼을 한국 전통시의 큰 맥으로 우뚝서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노산공원 ‘천 년의 바람’ 시비 9주기 추도식을 올리고 있는 모습



박재삼 문학의 현장을 찾아가던 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9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모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의연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하늘 나이가 벌써 아홉이라니. 저녁나절에야 도착한 노산공원 시비 앞엔 그를 아끼고 흠모하는 향리의 후학들이 모여 추도식을 하고 있었다. 헌화와 추도사가 시작되매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때 아닌 빗줄기까지 세차게 내려침은 구천에서 흘리는 그의 눈물이 아닐런지.
노산(魯山)공원은 박재삼의 유년시절 티없이 해맑은 영혼이 가장 많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작품들이 우러나는 시적 본향이기도 하다. 시내 중심부에서 바다를 향해 돌출한 낮으막한 언덕으로 자연경관이 빼어난 시민들의 휴식처다. 동으로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목섬이 한 뼘 거리로 다가서고, 서쪽 켠엔 풍성거리는 인심이 살갑게 느껴지는 삼천포항을 끼고 있어 일대의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위치다. 저만큼 흘립한 와룡산의 검푸른 줄기가 바다를 포근히 감싸안아 삼천포 시가지가 한껏 아담하고 정감있게 품안으로 파고든다.


소싯적 꾸중을 들은 날은 / 이 바다에 빠져드는 노산에 와서/ 갈매기 끼룩대는 소리와 /
물비늘 반짝이는 것/ 돛단배 눈부신 것에 / 혼을 던지고 있었거든요.

<「노산에 와서」 중 1연>

그가 살던 집은 바로 언덕 아래로 공원 입구에서 불과 100여 미터의 거리. 그러기에 그는 때없이 노산엘 오르내리며 어린 날의 꿈을 키웠다. 동무들과 어울려 놀 때도, 혼자 텅 빈 집을 지키다 무료해 질 때도,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도 언제나 어린 그가 찾았던 곳이 노산 언덕이었다. 등성이에 앉아 한정없이 바다를 내다보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결에 취해 시심을 키우던 곳이었으니, 이곳 노산이야말로 팔포, 한내천, 목섬과 더불어 박재삼 시혼의 샘물이요 안식처였다. 공원 언덕이 바다로 내리닿는 중간쯤에 그의 50세 생일을 기해 삼천포 청년회의소에서 처음으로 그의 시비를 세웠으되, <천 년의 바람>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노산공원 아래 ‘박재삼 거리’ 도로 개설로 반쪽만 남은 서금동의 옛집(녹색 건물)


박재삼은 1933년 일본 동경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 박찬홍과 어머니 김어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그마한 집 한 칸 마련할 돈을 벌자, 4세 때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 아버지는 부두의 지겟꾼으로, 어머니는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행상을 하며 가난한 살림을 이어갔다. 그가 살던 집은 서금동 72-1번지. 가난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바닷가 팔포마을이다. 옥수수 울타리 너머로 백사장이 펼쳐지고 바로 턱밑에 목섬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기에 물이 빠질 때면 목섬으로 건너가 조개도 줍고 게를 잡기도 했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그 층층계 밑에/ 옹송거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몰래 던져 주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떴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시리도록 가난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한 구절이다. 박재삼의 연작시 <추억에서>의 제1편은 머릿짐을 이고 백 리가 넘는 진주 장터 어물전을 오가던 어머니의 모습을 노래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추억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힘들고 고달팠던 삶과 한(恨)이 서럽게 녹아있는 시편이다.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작품 배경이 되는 한내천 노산공원에서 건너다 본 목섬의 아름다운 정경

그 역시 삼천포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을 했으면서도 호구지책조차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신문 배달을 하다가 삼천포여중 사환으로 들어갔다. 사환 일을 하면서도 향학열을 잠재울 수 없어 열다섯 나이에 삼천포중학교 야간부를 다니면서 주경야독의 고된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야간부가 없어지면서 성적이 좋은 관계로 주간으로 옮길 수 있었다. 당시 삼천포중학교엔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이 국어교사로 있었기에 그로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조 공부를 하게 되었다. 초정 김상옥 선생은 현대시조의 기틀을 완성한 인물이다. 스승의 영향을 받아 박재삼의 문학적 출발은 자연스레 시조 분야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백일장에 나간 것이 1949년 진주에서 열린 개천예술제. ‘촉석루’ 작품으로 차상이란 영예를 차지하며 함께 입상한 시인 이형기와의 인연을 맺는 계기도 이 때였다.
박재삼은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역시 지독한 가난 탓에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은 채 부산으로 나가 중학교 시절 교장님 댁에 머물고 있다가, 교장님의 소개로 평론가 조연현을 만나게 되었다. 조연현과의 인연으로 그가 창간한 ‘현대문학’에 입사하여 편집장 일을 맡아 9년 7개월을 근무했다. 문예지 일을 보는 관계로 본격적인 창작과 문단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학에 대한 미련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입학했으나,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기가 어려워 불가피 3학년에서 중도 포기를 해야만 했다. 남과 같이 정상적 출석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학점 이수가 제대로 되질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조지훈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격려와 더불어 학점도 걱정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추억담을 술회하던 적이 있었다.


박재삼이 살았던 서금동의 옛집은 시가지 정리로 도로가 생기면서 60여 평이던 땅이 겨우 15평만 남았다. 여기에 미니 2층집을 지어 위층엔 두 살 위인 형님이 살고 있고, 아래층은 형님 자식이 김밥집을 열어 그런대로 집터만 지키고 있는 셈이다. 박재삼 사후에야 그 작품과 명성이 알려지면서 집터에서부터 노산공원 동쪽을 안고 도는 골목을 ‘박재삼 거리’로 명명하고 깔끔하게 단장을 해두었다. 그러나 헐려 없어져 버린 고택의 복원은 이 좁은 터에 불가한 일이고 보니 생각사록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지우기 어렵다. 집 앞의 팔포 모래밭은 매립되어 지금은 온통 횟집과 모텔이 가득 들어차 유흥가로 탈바꿈해 버렸다, 박재삼 시의 무대인 팔포 일대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일컬어지는 그의 주옥같은 또 다른 대표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1959>의 배경이 되는 곳도 바로 여기가 아닌가.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 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빛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맘보다도 내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천포 시내를 꿰고 여기 팔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한내천이 곧 울음이 타는 강이다. 노산 언덕에 서서 가을 석양에 물든 강을 바라보며 되뇌이는 사랑 이야기는 눈물이고 울음이다. 산골 물소리처럼 맑고 신선했던 첫사랑은 옛일이 되고, 하류의 강물은 바다로 소멸하면서 인생의 유한성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적 삶의 본원적인 한의 정서가 진하게 느껴지는 박재삼 시의 절창이다.
박재삼의 시 세계에서는 고향의 자연물이 많이 등장하고, 또한 가난, 눈물, 슬픔, 울음 등의 시어들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슬픔들은 지난한 아픔에 머물지 않고 찰랑이는 은빛, 정제된 서정이 되어 은근하게 다가온다. ‘가장 슬픈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가난의 슬픔을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어를 통해 전통적인 서정시로 승화시켰다. 그는 또한 삼천포의 아름다운 자연에 의지하여 인생의 심오한 이치를 배우고 터득해 갔다.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다가서는 어머니의 바다, 그 출렁이는 파도는 그의 가슴에 달관의 깨달음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고단한 삶의 서러움을 토속적 언어와 가락으로 구성지도록 토해낸 그의 시편들은 한국의 서정시를 한 단계 끌어올려 놓았다.

생가를 돌아본 후 한내천을 끼고 목섬이 건너다보이는 매립지를 돌며 박재삼거리를 지나 노산까지 다시 한 바퀴 돌아서 대교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삼천포와 남해의 창선도을 이어주는 연륙교가 건설되면서 삼천포대교 입구에 시민공원을 만들고 박재삼의 시비까지 세워두었다. 거대한 자연석에 <아득하면 되리라> 시 작품을 음각으로 적어 놓았다. 지리적 위치 선정도 좋고 더욱이 환상의 연륙교와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을 끼고 있어 이 지방을 찾는 외지인들의 눈에도 쉽게 띌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럽다. 박재삼의 시비는 이외에도 사천시청 광장 동편 뜰에 <삼천포 찬가>를 기록한 것이 있다.

삼천포대교 공원에 세워진 ‘아득하면 되리라’ 시비 사천시청 광장에 위치한 ‘삼천포 찬가’ 자연석 비


‘현대문학’에서 '문학춘추’가 창간되면서 자리를 옮겼다가 1년 만에 폐간되는 바람에, 뜻밖에도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맡아 바둑 해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후에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에 피선되는 등, 문단에서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해 두었지만, 언제나 경제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형편이었다. 술과 담배를 즐기고 친구를 좋아하는 탓에 주머니가 넉넉할 적이 없었다. 힘들어하는 고향 친구와 후배들을 만나면 온갖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는 성격이라 물질적 곤란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시골 형님같은 순후한 인상처럼 천성이 곱고 어질어 남의 어려움을 피해가질 못했다.
시집 열댓 권에 수필집 열 권 남짓을 출판하며 오로지 문필활동에만 전념했으나, 어려서 영양 상태가 좋지 못했던 탓이던가, 중년을 넘어서면서부터 온갖 병마들이 그를 철저히 괴롭혔다. 고혈압과 위궤양에 시달리더니 뇌졸중 신부전증까지 겹쳐 많지 않은 나이 64세인 1997년 초여름, ‘병과 같이 가기로 했으니 한결 나아진 것 같아.’라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끝내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다.
‘가난을 천복으로 여겼던 사람’,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 등 그에 대한 수식어가 한둘이 아니다. 아이같이 깨끗한 영혼이 나비가 된다더니, 장례식 날에도 삼우제 날에도 흰나비가 찾아들었다. 박재삼의 유해는 평생을 그리워하고 노래하던 고향 삼천포로 가지 못하고, 그의 추천을 받은 후배 시인의 배려로 공주 의당면에 잠들어 있다.
박재삼의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고향의 문인과 시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한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니, 기념관도 문학공원도 멀지 않은 날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수구초심이라 했으니, 그의 유해까지도 향리에 모셔진다면 무어 더 바랄 게 있겠는가.


* 답사에 물심양면으로 후의를 베풀어 주신 향토의 원로시인 최송량 선생님과
김경 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6년 6월) 낭산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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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9.11 13:32

    첫댓글 지난주 여행길에 무심코 삼천포를 지나 창선대교를 건넜습니다만...이런 시인의 흔적과 향토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고 무심히 지난게 아쉽군요....좋은 글 올려주신 낭산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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