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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 國 時 代
衛 王 朝 世 家
衛(위) BC. 1040∼BC. 209 위치 河南省(하남성) 성 姬(희) 작위 후작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康叔(강숙) | 封(봉) | 楚丘(초구) | 河南省 滑縣 | ||
제 2대 | 康伯(강백) | 牟(모) | 강숙의 아들 | 하남성 활현 | ||
제 3대 | 考伯(고백) | 강백의 아들 | ||||
제 4대 | 嗣伯(사백) | 고백의 아들 | ||||
제 5대 | 疌伯(첩백) | 사백의 아들 | ||||
제 6대 | 靖伯(정백) | 섭백의 아들 | ||||
제 7대 | BC. ?∼BC. 869 | 貞伯(정백) | 정백의 아들 | |||
제 8대 | BC. 868∼BC. 857 | 頃侯(경후) | 정백의 아들 | |||
제 9대 | BC. 856∼BC. 813 | 釐侯(희후) | 경후의 아들 | |||
제 10대 | BC. 813 | 共伯(공백) | 餘(여) | 희후의 아들 | ||
제 11대 | BC. 812∼BC. 758 | 武公(무공) | 和(화) | 공백의 아우 | ||
제 12대 | BC. 757∼BC. 735 | 莊公(장공) | 揚(양) | 무공의아들 | ||
제 13대 | BC. 734∼BC. 719 | 桓公(환공) | 完(완) | 장공의 아들 | ||
제 14대 | BC. 719 | 폐위 | 州旴(주우) | 환공의 아들 | ||
제 15대 | BC. 718∼BC. 700 | 宣公(선공) | 晉(진) | 환공의 아우 | ||
제 16대 | BC. 699∼BC. 696 | 惠公(혜공) | 朔(삭) | 선공의 아들 | ||
제 17대 | BC. 699∼BC. 688 | 폐위 | 검모 | 선공의 아들 | ||
제 18대 | BC. 688∼BC. 669 | 惠公(혜공) 복위 | 朔(삭) | 선공의 아들 | ||
제 19대 | BC. 668∼BC. 660 | 懿公(의공) | 赤(적) | 혜공의 아들 | ||
제 20대 | BC. 660 | 戴公(대공) | 申(신) | 선공의 손자 | ||
제 21대 | BC. 659∼BC. 635 | 文公(문공) | 燬(훼) | 대공의 아우 | ||
제 22대 | BC. 634∼BC. 632 | 成公(성공) | 鄭(정) | 문공의 아들 | ||
섭정 | BC. 632 | 叔武(숙무) | 성공의 아우 | |||
제 23대 | BC. 632 | 瑕(하) | 성공의 아우 | |||
제 24대 | BC. 631∼BC. 600 | 成公(성공) 복위 | 鄭(정) | 문공의 아들 | ||
제 25대 | BC. 599∼BC. 589 | 穆公(목공) | 遬(속) | 성공의 아들 | ||
제 26대 | BC. 588∼BC. 577 | 定公(정공) | 臧(장) | 목공의 아들 | ||
제 27대 | BC. 576∼BC. 559 | 獻公(헌공) | 衎(간) | 정공의 아들 | ||
제 28대 | BC. 558∼BC. 547 | 殤公(상공) | 秋(추) | 허공의 아우 | ||
제 29대 | BC. 546∼BC. 544 | 獻公(헌공) 복위 | 衎(간) | 정공의 아들 | ||
제 30대 | BC. 543∼BC. 535 | 襄公(양공) | 惡(악) | 헌공의 아들 | ||
제 31대 | BC. 534∼BC. 493 | 靈公(영공) | 元(원) | 양공의 아들 | ||
제 32대 | BC. 492∼BC. 481 | 出公(출공) | 輒(첩) | 영공의 손자 | ||
제 33대 | BC. 480∼BC. 478 | 莊公(장공) | 蒯聵(괴외) | 영공의 장자 | ||
제 34대 | BC. 477 | 폐위 ? | 班師(반사) | 양공의 손자 | ||
제 35대 | BC. 476 | 폐위 ? | 起(기) | 영공의 아들 | ||
제 36대 | BC. 476∼BC. 470 | 出公(출공) 복위 | 輒(첩) | 영공의 아들 | ||
제 37대 | BC. 469∼BC. 465 | 悼公(도공) | 黔(검) | 출공의 아들 | ||
제 38대 | BC. 464∼BC. 432 | 敬公(경공) | 弗(불) | 도공의 아들 | ||
제 39대 | BC. 431∼BC. 426 | 昭公(소공) | 糾(규) | 경공의 아들 | ||
제 40대 | BC. 425∼BC. 415 | 懷公(회공) | 亹(미) | |||
제 41대 | BC. 414∼BC. 383 | 愼公(신공) | 頹(퇴) | |||
제 42대 | BC. 382∼BC. 372 | 聲公(성공) | 訓(훈) | 신공의 아들 | ||
제 43대 | BC. 371∼BC. 343 | 成侯(성후) | 藗(속) | 자남고 아들 | ||
제 44대 | BC. 342∼BC. 335 | 平侯(평후) | 勁(경) | 성후의 아들 | ||
제 45대 | BC. 334∼BC. 293 | 嗣君(사군) | 평후의 아들 | |||
제 46대 | BC. 292∼BC. 252 | 懷君(회군) | 사군의 아들 | |||
제 47대 | BC. 251∼BC. 241 | 元君(원군) | 사군의 동생 | |||
제 48대 | BC. 241∼BC. 209 | 폐위 | 角(각) | 원군의 아들 |
위나라는 商(상)나라가 西周(서주)에 의해 멸망한 직후 西周 武王(서주 무왕)의 친동생인 위 강숙이 상 나라의 수도였던 朝歌(조가) 와 그 주위의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처음의 봉호는 위가 아니였으 나 점차 그 영토가 성장함으로서 국호를 위로 바꿨다
제 1대 강숙(BC. ?∼BC. ?)
주 문왕(姬昌, 희창)과 태사 사이에서 태어난 9번째 아들이다. 주 문왕이 죽고 백읍고 또한 상나라의 마 지막 군주인 紂王(주왕)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주 무왕이 뒤를 이었다. 주 무왕 원년(BC. 1046 년), 무왕이 목야전투에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워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다. 공을 세운 신하 들과 종실 선현의 후손들을 분봉했다. 그리고 강숙을 康(강) 땅에 봉해 봉지를 내렸다. 그리하여 강숙이 라 불리는 것이다. 당시에 주 무왕이 채숙도, 곽숙처, 관숙 선을 삼감에 봉해 주왕의 아들인 무경을 감 시하게 했다.
주 무왕이 죽고 주 성왕이 즉위했는데 성왕은 나이가 어려 周公 丹(주공 단)이 섭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감이 이에 반발해 주공 단을 모함하고 끝내는 이들이 무경과 짜고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을 삼감의 난 이라 한다. 이것이 주 성왕 2년의 일이었다. 주 성왕 4년, 주 성왕의 명령으로 삼감의 난을 진압할 때 강숙 봉이 거기에 참여했다.
그 결과 무경과 관숙선은 처형당하고. 채숙 도는 유배되었으며. 곽숙 처는 서민으로 강등 당하고 말았 다. 그리고 주공 단은 주 성왕을 대신해 강숙 봉을 衛(위)나라에 봉했다. 그 땅은 상나라 수도 조가 일 대였다. 그리고 그에게 상나라 유민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겼고, 영역은 대략 삼국지의 연주, 기주, 예주 의 일부 정도로 제법 크게 봉해졌다. 강숙이 죽고 그 뒤를 아들인 공자 무가 뒤를 이어니 그가 바로 위 강백이다.
제 2대 강백(BC. ?∼BC. ?
강백은 아버지 위 강숙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정무를 돌보아 위나라를 흥성하게 했다. 그리고 동이 족의 반란을 진압해 주 왕실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제 정공. 진후 섭. 노공 백금과 함께 주 성왕을 모셔 成康之治(성강지치)를 이룩했다. 그가 죽고 아들인 위 고백이 즉위했다.
제 8대 경후(BC. ?∼BC. 857)
BC. 859년, 위 정백이 죽고 그 아들인 위 경후가 즉위했다. 위 경후가 주 이왕에게 많은 공물을 바치자 周 夷王(주 이왕)이 위나라에 후작의 작위를 내려주었다.
위 경후 10년(BC. 857년), 위 경후가 죽고 그 아들인 위 희우가 뒤를 이었다.
제 9대 희후(BC. ?∼BC. 815)
위 희우 16년(BC. 841년), 周 厲王(주 여왕)이 국인들의 반란으로 彘(체) 땅으로 쫓겨가고 공화시기가 시 작되었다.
위 희후 28년(BC. 828년), 周 宣王(주 선왕)이 즉위했다. 위 희후 42년(BC. 815년), 희후가 죽고 태자 여 가 즉위 하니 그가 위 공백이다. 공백의 아우 화가 위 희후의 총애를 입었다. 일찍이 위 희후가 화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다.
제 10대 공백(BC. ?∼BC. 813)
위 희후가 죽은 뒤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공자 화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을 이용하여 무사들에 게 뿌려 위 희후의 무덤에서 위 공백을 살해하고 공위에 오르니 그가 위 무공이다.
제 11대 무공(BC. 852∼BC. 758)
위 무공은 위 희후가 살아있를 당시에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위 무공 42년(BC. 771년), 犬戎族(견 융족)이, 申侯 寧(신후 령)의 사주를 받아 서주의 수도인 호경을 쳐서 周 幽王(주 유왕)과 鄭 桓公(정 환 공)을 죽였다. 이에 위 무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다. 이때 같이 도우러 온 사람이 정 환공의 아들 정 무공. 진 문후. 秦 襄公(진 양공)이었다. 그리고 주 유왕의 아들인 주 평왕을 도와 낙읍으로 동천하는 것을 도와 동주가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위 무공의 공로에 사례했다. 위 무공 55년(BC. 758년), 위무공이 죽고 그 아들인 그가 위 장공이다.
제 12대 장공(BC. ?∼BC. 735)
위 장공 5년(BC. 753년), 장공은 齊(제)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陣 (진)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얻었지만 일찍 죽고 말았다. 그래서 陣(진)나라 여자의 여동생을 총 애해 공자 完(완)을 낳고 그를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애첩에게서 공자 州旴(주우)를 얻었다.
위 장공 18년(BC. 740년), 장공이 공자 주우에게 장군직을 내리니 대부 石碏(석작)이 간했으나 위 장공 은 듣지 않았다. 위 장공 23년(BC. 735년), 위 장공이 죽고 완이 즉위하니 그가 위 환공이다.
제 13대 환공(BC. ?∼BC. 719)
공자 완은 陣(진)나라 여자인 戴嬀(대규)의 소생으로 장공이 그를 아껴 본처인 제나라 여자 莊姜(장강)의 손에 길러졌다. 그리고 위 장공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위 환공 2년(BC. 733년), 환공은 동생인 주우가 교만하여 횡포를 부리고 사치가 심해 장군직에서 그를 해고하자 주우는 위나라를 떠났다.
위 환공 16년(BC. 719년), 환공의 이복 동생 공자 주우는 사람들을 모아 위 환공을 살해하고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 14대 위군(BC. ?∼BC. 719)
주우는 위 장공 애첩의 소생이다. 위 환공 13년(BC. 722년), 정나라의 군주 정장공의 동생인 공숙 단이 망명을 왔을 때 그와 친하게 지냈다. 위 환공 16년(BC. 719년), 주우가 위 환공을 습격해 살해하고 위 후가 된다. 주우는 공숙 단을 시켜 정나라를 치게 하고 宋(송). 陣(진)나라. 채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정나라의 도성 신정의 동문을 쳤으나 이득을 얻지 못하고 달아나게 되었다. 주우는 위 환공을 죽여 민심을 잃었다. 그런 차에 석작은 대규를 통해 진 환공과 비밀리에 연결하고 있었다. 9월 陳侯(진 후)와 짜고 濮(복) 땅에서 右宰醜(우재추)와 함께 위군 주우를 죽였다. 이어 邢(형)나라로 가서 위 환공 의 아우 공자 진을 세우니 그가 위 선공이다.
제 15대 선공(BC. ?∼BC. 700)
위 장공의 아들이며, 위 환공의 아우로 위군 주우의 이복 동생이다.
위 환공 16년(BC. 719년), 공자 주우가 위 환공을 죽이고 위후가 되었으나 상대부 石碏(석작)이 陳 桓 公(진 환공) 과 함께 위군 주우를 살해하고 邢(형)나라에 인질로 간 공자 진을 세우니 그가 위 선공이다.
위 선공은, 아버지 위 장공의 첩인 夷姜(이강)과 사통하는 사이였다. 그 사이에 공자 伋(급)을 얻어 우 공자에게 가르치게 했다. 이강을 총애해 공자 급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강은 공자 검모와 공자 석 을 낳았다. 우공자가 태자에게 제나라 여인을 중매했다. 성혼 전에 위 선공이 며느리가 될 여인의 미모 가 빼어난 것를 보고는 자신이 차지한 뒤 태자에게는 다른 여인을 맺어주었다. 훗날 위 선공이 제나라 여자로부터 아들인 공자 壽(수)와 朔(삭)을 얻었다. 좌공자에게 두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태자 급의 모 친 이강이 죽자, 위 선공의 정부인이 삭과 공모해 태자 급을 비방했다. 위 선공은 태자의 아내가 될 여 인을 탈취한 일로 태자를 내심 미워하며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자 했다. 그러던 차에 태자 급에 관한 비방을 듣게 되자 크게 화를 내면서 태자 급을 제나라 사자로 보내면서 강도를 시켜 살해하게 했다.
그리고 급자가 제나라의 사신으로 파견할 때 들고 가도록 白旄(백모)를 내주었다. 선강과 공자 삭은 계 책을 써서 무사들을 도적으로 위장해 급자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공자 수는 태자 급자를 돕기 위해 그것을 알렸으나 급자가 듣지 않아 몰래 태자의 의장과 복장을 하고 도적들에게 가서 대신 죽었다. 이 에 급자는 공자 수가 가는 길에 자신을 대신해 도적들에게 죽을 것을 알고 그리로 가서 자신을 밝히고 같이 죽어 공자 삭이 태자가 되었다.
제 16대 혜공(BC. ?∼BC. 669)
위 선공의 아들이며, 위후 검모의 이복 동생이고, 우 의공의 아버지다. 위 혜공 4년(BC. 696년), 위 혜 공은 노 환공. 송 장공. 채 환후와 함께 이 땅에서 회맹했고, 다시 정나라를 치려했다. 4월 제후들과 정 나라를 쳤다. 그런데 위나라 내부에서 위 혜공이 급자를 죽인 일로 민심을 잃자 좌공자 실. 우공자 직은 위 혜공을 폐위시키고 태자 급자의 동생인 금모를 세웠다. 이에 위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후 검모 년(BC. 689년), 노 장공은 제나라, 송나라, 陳(진)날, 채나라 4개 국과 연합해 위나라를 쳐서 위 혜공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위후 검모 8년(BC. 688년), 제 양공은 周 莊王(주 장왕)의 명으로 위나라를 쳐서 위후 검모를 몰아내고 좌, 우 공자를 죽이고 위 혜공을 복위시켰다. 위후 검모는 주나라 의 수도 낙읍으로 망명했다. 위 혜공은 8년 동안 떠돌이 생활하다가 복귀한 것이다.
제 17대 검모(BC. ?∼BC. ?)
위 혜공 4년(BC. 696년), 좌공자 실. 우공자 직이 급자와 공자 수를 살해한 것에 한을 품고 들고 일어 나 위 혜공을 폐위시키고 급자의 친동생인 공자 검모를 세웠다.
위후 검모 8년(BC. 688년), 제 양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쳐서 위후 검모를 내쫓고 좌. 우 공 자를 처형했다. 위후 검모는 주왕실로 달아났다.
제 18대 혜왕(BC. ?∼BC. 669)
위 혜공은 8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것이었다.
위 혜공 25년(BC. 675년), 위 혜공은 주왕실에서 검모를 받아들여 준 것에 원한을 품고 연나라와 함께 주 나라를 쳤다. 이에 주 혜왕은 온읍으로 달아나고 그들은 왕자 퇴를 세웠다. 위 혜공 31년(BC. 669 년), 위 혜공이 죽고 그 아들 공자 적이 그 뒤를 이으니 그가 위 의공이다.
제 19대 의공(BC. ?∼BC. 690)
의공 4년(BC. 666년), 아버지가 동주 혜왕을 쫓아내고 왕자 퇴를 주왕으로 세운 죄를 토벌하러온 제 환 공과 싸워 대패했으나 뇌물을 바쳐 화해했다. 아버지 혜공이 자기 형들을 참소하여 죽게하고 임금이 되 었으며, 의공 자신은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치하며 특히 학을 기르는 취미에 국고를 매우 탕진했으며, 학을 대신들처럼 대우했으므로 인심을 잃었다. 의공 9년(BC. 660년), 翟(적)이 쳐들어오자 병사를 일으 켜 막으려 했으나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했고 대신들도 학들을 보내 막으라며 비꼬왔다. 滎澤(형택)에서 적과 싸웠으나 참패하고 살해당했다.
적은 위 의공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성마저 함몰하여 위나라는 멸망했다가 패자 제 환공이 제후들을 회 합하고 위나라의 유민들을 모아 초구를 새 서울로 삼아 부활했다.
제 20대 대공(BC. ?∼BC. 660)
위 선공과 이강의 손자며, 소백 완과 선강의 아들이고 위 의공의 친척 동생겸 조카고 위 문공의 친형. 위 혜공의 이부동생이다
위 의공 9년(BC. 660년), 의공이 적족에게 살해당했다. 그 까닭은 위 혜공의 악행과 대신과 백성들이 모 두 복종하지 않는 탓이다. 위나라 사람들은 위 혜공의 자손들을 멸족시켜 위 혜공의 일족들은 망해 버 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급자의 후손과 공자 수의 자손을 찾았으나 없었다. 위왕 감모를 되세우고 싶어도 그마저 죽은 뒤였다. 그 나마도 검모는 후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소생인 소백의 아들 공손 신을 세우 니 그가 위 대공이다. 위 대공 원년(BC. 660년), 위 대공이 죽었다. 제 환공은 위나라가 누차 난을 당하 는 것을 보고는 제후들을 이끌고 가 적인을 정벌하고 위나라를 위해 초구에 성을 쌓아 주었다. 제나라 로 달아난 그 아우 희훼가 즉위하니 그가 위 문공이다.
제 21대 문공(BC. ?∼BC. 635)
위 선공과 이강의 손자며, 소백 완과 선강의 아들이고 위 대공의 친동생이다. 위문공 원년(BC. 659년), 문공은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적게 내리며, 스스로 부지런히 정사를 돌봐 백성들과 괴로움을 같이하여 민심이 위 문공을 따랐다. 위문공 18년(BC. 642년), 邢(형)나라가 적족과 연합해 위나라를 쳤다. 위 문 공 25년(BC. 635년), 위 문공은 병사를 풀어 형나라를 대대적으로 쳤다. 정월 20일 위군은 형나라를 멸 망시켰다. 문공 25년(BC. 635년), 4월 위 문공이 죽었다. 아들 세자가 뒤를 이어니 위 성공이다.
제 22대 성공(BC. ?∼BC. 600)
성공 3년(BC. 632년), 진나라에서 조나라에 포위된 송나라를 구원하고 조나라를 치기위해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자 거절했다. 또 진나라가 송나라를 구원하면서 위나라에도 군사를 모아줄 것을 청했고 대부 들도 진나라의 요청을 허락해 달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오록을 빼앗겼다. 뒤늦게서야 진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진나라는 거절했고 초나라 편에 서려고 했으나 위나라 국인들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대부 元咺(원흰)에게 쫓겨나 양우에 거주했다.
제 23대 하(BC. ?∼ BC. ?)
晉(진)나라의 군주 晉 文公(진 문공)이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 했으나 위 성공이 듣지 않 았다. 이에 진 문공은 황하 남쪽으로 우회해 송나라를 구하러 갔다. 그리고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러올 때 대부 원휜이 그것에 호응해 위 성공을 쫓아내고 공자 하를 세웠다. 위 성공은 陳(진)나라로 달아났 다. 그리고 금방 진 문공이 위 성공을 풀어주어 위 성공은 복귀해서 위군 하를 몰아내고 대부 원휜을 죽였다. 위군 하는 국외로 망명했다.
제 24대 성공 복위
위 성공 35년 위 성공이 죽자 아들 속이 즉위했다 그가 목공이다.
제 25대 목공(BC. ?∼BC. 589)
성공이 재위 35년 만에 죽고 아들인 세자 속이 그 뒤를 이었다. 위 목공 2년(BC. 598년), 초나라의 왕 인 초 장왕이 陳(진)나라를 쳐서 하징서를 죽였다. 위 목공 11년(BC. 589년), 위나라의 대부 손량부가 노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나라를 쳐 빼앗긴 땅을 회복했다. 이 때 위목공이 죽고 희장이 뒤를 이어니 그 가 위 정공이다.
제 26대 정공(BC. ?∼BC. 577)
정공 12년(BC. 577년), 위 정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희간이 그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 하니 그가 바로 위 헌공이다
제 27대 헌공(BC. ?∼BC. 544)
위 정공의 아들이며, 위 상공의 형이고 위 양공의 아버지다. 위 헌공 2년(BC. 575년), 위 헌공은 정나라 를 쳤다. 가을 헌공은 晉(진)나라. 제나라. 송나라 등과 함께 사수 땅에서 회맹했다. 위 헌공 18년(BC. 559년), 손림보가 위 헌공을 쳐서 몰아내고 헌공의 아우이자 정공의 아들인 공자 표를 세우니 그가 위 상공이다. 이에 헌공은 제나라로 달아나자 제나라에서는 그를 聚(취) 땅에 머물게 했다.
제 28대 상공(BC. ?∼BC. ?)
위 헌공 18년(BC. 559년), 희표는 위 헌공에게 한을 품은 孫林父(손림보)와 영식의 추대를 받아 헌공을 몰아내고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했다. 위 상공 원년(BC. 558년), 손림보를 숙읍에 봉했다. 위 상공 12 년(BC. 547년), 영희와 손림보는 위 상공의 총애를 두고 알력이 일어났다. 그런데 상공이 영희를 편들어 손림보를 쳤다. 손림보는 晉(진)나라로 달아나 거기서 위 헌공의 복위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서 는 위 헌공을 보내고 晉 平公(진 평공)은 위나라를 쳤다. 이에 위 상공이 화친을 요청하자 회맹했는데 영희와 함께 진 평공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위 헌공은 도망 생활 12년 만에 복위에 성공했다.
제 29대 헌공
위 헌공 복위 원년(BC. 546년), 영희를 처형했다. 위 헌공 2년(BC. 544년), 위 헌공이 그해를 넘기지 못 하고 죽었다.
제 30대 양공(BC. ?∼535)
위 양공 6년(BC. 538년), 초 영왕이 제후들에게 회맹하자고 했으나 위 양공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위 양공 9년(BC. 535년), 양공이 죽으면서 그 아들인 원에게 뒤를 잇게 하니 그가 영공이다.
제 31대 영공(BC. 540∼BC. 493)
위 영공 원년(BC. 534년), 그는 7살의 나이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위 영공 12년(BC. 522년), 齊豹(제표),
北宮喜(북궁희), 褚師圃(저사포), 공자 조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위 영공의 형 집을 죽이고 위 영공 은 피난했다. 위 영공 40년(BC. 494년), 우 영공은 공숙 술, 조양, 북궁결, 태자 과외, 공맹 구 등을 몰 아냈다. 위 영공 41년(BC. 493년), 위 영공이 죽었다. 공자 영이 끝내 거절하자 결국 남자는 과외의 아 들인 첩을 세우니 그가 위 출공이다.
제 32대 출공(BC. ?∼BC. 456)
위나라의 제 32. 제 36대 군주. 위 영공의 손자. 장공의 아들. 위 영공 39년(BC. 496년), 세자 과외는 위 영공의 부인인 남자가 음란무도한 것을 보고 그녀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것을 알고 남자가 위 영공에 게 알리니 세자 과외는 송나라로 망명을 갔다. 그리고 후에 晉(진)나라의 조씨에게 의탁했다. 위 영공 42년(BC. 493년), 영공은 막내 아들 영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공자 영이 끝내 거절했다. 같은 해 위 영공이 죽자 세자 과외의 아들을 잇게하니 그가 위 출공이다. 같은 해 6월 晉(진)나라의 趙鞅(조앙) 이 조씨가문의 위나라에 대한 영양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외를 위나라에 돌려보내 군주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위나라 사람들이 세자 과외를 쳐서 돌려보내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자 과외는 쫓겨나고 말았다. 위 출공 12년(BC. 481년), 공리의 어머니 백희는 사람들과 모의해 세자 과외를 위나 라의 군주로 세울 것을 모의했다. 이에 공리는 위 출공을 협박해 시해하려 했다. 그러나 위 출공은 그 것을 알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 출공 아버지 과외가 즉위하니 그가 후장공이다. 이 과정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죽었다.
위 후장공 3년(BC. 478년), 조앙은 위나라를 포위하자 후장공은 당해 낼수 없다고 여겨 달아났지만 용 인에게 살해당하고 위 양공의 손자인 衛君 班師(위군 반사)를 세웠다. 그러나 제나라가 위나라를 쳐서 포로로 잡자 위 영공의 아들이자 위 후장공의 동생인 衛君 起(위군 기)를 세웠다.
위군 기 원년(BC. 477년), 석포는 위군 기를 몰아내고 제나라로 달아난 위 출공을 복위시켰다.
제 33대 장공(BC. ?∼BC. 478)
영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가 되었다. 세자 괴외가 장성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송나라를 지나 던 도중 송나라 사람들이 송나라 공자 朝(조)와 과외의 계모인 南子(남자)의 사통을 노래하며 조롱했다. 그 사실을 안 괴외는 부끄러워 했고 격분하여 귀국한 뒤 곧 자객을 보내 남자를 죽이려 했지만 이내 발 각되어 송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로 다시 달아났다. 이후에 영공이 죽자 남자는 先君(선군)의 遺命(유명) 이라며 공자 郢(영)을 옹립하려 하나 공자 영이 사양하여 괴외의 아들인 공손 첩을 세우니 그가 출공이 다. 진나라가 괴외를 위나라로 돌려보내려 하자 출공은 군위를 빼앗길까봐 괴오의 귀국을 막았다. 이에 진나라는 괴외를 척 땅에 머물게 했다. 당시 척 땅은 위나라와 매우 가까웠다.
장공은 절치부심 끝에 군위에 올라 남자를 죽였다. 그 후 진나라가 위나라의 외성을 공격하자 위나라가 그 원인인 장공을 견 땅으로 몰아내고 장공의 동생인 공자 반사를 세워서 그로 하여금 정무를 보게 하 고 진나라와 강화를 하였다.
제 34대 반사(BC. ?∼BC. ?)
장공이 진나라의 대부 趙鞅(조앙)의 공격으로 인해 달아나고 융인에 의해서 장공이 살해당하자 공자 반 사를 세우니 그가 위군 반사다. 그러나 금방 제나라에서 위나라를 치는 바람에 거기에 맞선 위군 반사 는 제 나라에 포로로 잡히고 장공의 동생인 공자 기를 세우니 그가 바로 위군 기다.
제 35대 위군 기(BC. ?∼BC. ?)
위 영공의 아들이며, 장공의 동생이다. 위군 기 원년, 위나라의 대부 석만부가 위군 기를(BC. 476년)몰 아내려 하자 위군 기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 36대 출공 복위
위 출공이 복위하였다.
제 37대 도공(BC. ?∼BC. 465)
위 출공 복위 7년(BC.470년), 公子 黔(공자 검)이 위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 니 그가 위 도공이다. 위 도공 5년(BC. 465년), 위 도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 불이 즉위하니 그가 경공 이다.
제 38대 경공(BC. ?∼BC. 432)
위 도공 5년(BC. 465년), 위 도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 불이 즉위하니 그가 경공이다. 위 경공 33년 (BC. 432년), 위 경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 규가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위 소공 이다.
제 39대 소공(BC. ?∼BC. 426)
위 경공 33년C. 432년), 위 경공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규가 뒤를 이어니 그가 위 소공이다. 그 당시 에 晉(진)나라를 3개로 나누워 생긴 三晉(삼진)이 대단히 강성해 갔다.
위 소공 6년(BC. 426년), 신하인 공자 미에게 살해 당했고 그 공자 미가 즉위하니 그가 위 회공이다.
제 40대 회공(BC. ?∼BC. 415)
위 소공 6년(BC. 426년), 공자 미가 위 소공을 살해하고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위 회공 11년(BC. 415년), 공자 퇴가 위 회공을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위 신공이다.
제 41대 신공(BC. ?∼BC. 383)
위 소공의 조카이며, 공자 괄의 아들로 위 성공의 아버지며 위 회공은 사촌 형이다.
위 회공 11년(BC. 415년), 위 소공이 위 회공에게 죽고 위 신공은 위 회공을 죽이고 위에 올랐다.
위 신공 32년(BC. 383년), 위 신공이 죽고 그 아들인 공자 훈이 즉위하니 그가 위 성공이다.
제 42대 성공(BC. ?∼BC. 372)
위 신공 32년(BC. 383), 위 신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국군으로 올랐다. 위 성공 11년 (BC. 372년), 위 성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공자 不折(불절이 즉위하니 그가 위 성후다.
제 43대 성후(BC. ?∼BC. 343)
성후 11년(BC. 361년), 위나라의 公孫鞅(공손앙)이 秦(진)나라로 갔다. 성후 16년(BC. 356년), 성후는 세 력이 미약해 시호를 공에서 후로 깎아내렸다. 성후 29년(BC. 343년), 魏(위)나라의 왕인 양혜왕은 그를 강제로 몰아내고 위 영공의 자손인 子南勁(자남경)을 세웠다.
제 44대 평후(BC. ?∼BC. 335)
위 성후 29년(BC. 343년), 魏(위)나라의 왕인 양혜왕은 위 성후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위 영공의 자손인 그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시켰다. 위 평후 8년(BC. 336년), 위 평후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위 사군이 뒤를 이어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제 45대 사군(BC. ?∼BC. 293)
위 평후 8년(BC. 335년), 위 평후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위 사군 5년(BC. 330년), 위 사군은 스스 로의 작위를 侯(후)에서 君(군)으로 낮춰서 스스로 부용국을 자칭했다. 그리고 위나라의 영토는 澓陽(복 양)만 남았다고 한다. 위 사군 42년(BC. 293년), 위 사군이 죽고 그 아들인 公期(공기)가 즉위하니 그가 위 회군이다.
제 46대 회군(BC. ?∼BC. 252)
위 사군 42년(BC. 293년), 위 사군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위 회군 41년(BC. 252년), 회군은 위 안희왕을 알현했다가 포박당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아들이자 魏(위)나라의 사위인 위 원군이 뒤를 이었다.
제 47대 원군(BC. ?∼BC. 241)
위 회군 41년(BC. 252년), 회군이 위 안희왕의 손에 죽자 위 안희왕은 위 회군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 인 위 원군을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웠다. 위 원군 12년(BC. 241년), 秦(진)나라가 위나라의 동쪽을 차지 하고 그곳에 동군을 두었다. 그리고 위 원군을 野王縣(야왕현)으로 옮기고 복양에 복양현을 설치했다. 이 도중에 秦(진)나라 사람들이 원군을 살해했다고 전한다. 그 뒤는 위곤 각이 뒤를 이었다.
제 48대 위군(BC. ?∼?
위 원군 12년(BC. 241년), 위 원군이 야왕으로 거처를 옮기던 중 살해를 당하고 자남각은 그 뒤를 이어 서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위군 각 21년(BC. 221년), 진나라 왕인 영정이 천하통일을 하였다. 진시황까지 는 존재했지만 위군 33년(BC, 209년), 위군은 2세 황제인 胡亥(호해)에 의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리 하여 위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 또한 左丘明(좌구명)의 春秋左傳(춘추좌전)과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또한 인터넷
수도의 천도
朝歌(조가. 河南省. 鶴壁市 淇縣 하남성 학벽시 기현)
楚丘(초구. 河南省 滑縣 하남성 활현, 제 19대 의공).
帝丘(제구. 河南省 濮陽縣 하남성 복양현, 제 22대 성공)
野王(야왕. 河南省 沁陽縣 하남성 심양현, 제 47대 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