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얼굴은 타들어가고 있었어요. 119 구급차를 타고 가는 1초가 하루같이 길었는데, 다른 차들이 안 비켜주는 게 너무 야속했어요." 작년 6월 경기도 성남의 한 골목길에서 전 회사 동료로부터 황산 테러를 당한 박정아(가명·28)씨는 아직도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얼굴과 어깨에 3도 화상을 입은 박씨는 그간 5차례 대수술을 받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박씨는 당시 구급차에서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지만, 구급요원들이 "길을 터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함께 구급차를 탔던 부모님은 심지어 길을 비켜 달라고 애원하기 위해 뛰쳐나가려 했던 상황을 똑똑히 기억했다. "당시엔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냥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당시 운전자들이 자신의 가족이 타들어가고 있다고 느꼈으면 구급차에 길을 쉽게 터주지 않았을까요." 9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박씨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서운함이 묻어났다. 한국 운전자들은 왜 적극적으로 구급차에 길을 터주지 않을까. 본지는 인컴PR재단과 함께 온라인설문 전문업체 마크로밀코리아를 통해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구급차 관련 인식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구급차에 양보를 잘 하지 않는 이유(복수 응답)는 ▲물리적으로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75.4%) ▲진짜 위급상황인지 믿을 수 없다(35.9%) ▲다른 차들도 피하지 않는다(24.4%) ▲어떻게 양보하는지 방법을 모른다(12.5%) 등으로 조사됐다. ◆선진국에선 꽉 막힌 도로에서도 '모세의 길' 열린다 미국·독일·오스트리아 같은 선진국에선 구급차가 출동하면 일반 차량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는 마술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주한 독일대사관의 베른트 스펙카르트(Speckhardt) 보좌관은 "독일 사람들은 벌금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위급 상황이라 생각하고 구급차를 보면 당연히 길을 비켜준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러시아워 때 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도 운전자들이 어떻게 해서든 차를 움직여 구급차에 길을 내준다고도 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물리적으로 피할 공간이 없어 구급차에 양보가 어렵다'는 응답은, 사실 시민이 양보하는 요령을 잘 모르는 데도 원인이 있다. '구급차 양보 의무와 방법에 대해 교육받거나 정보를 접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4.6%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반면 주한 독일대사관은 "독일에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구급차에 양보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학교에서는 자동차뿐 아니라 자전거도 구급차에 길을 내줘야 한다고 배운다"고 밝혔다. ◆위급한 상황인지 믿을 수 없다 구급차에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불신(不信)'이다. 구급차를 보고도 '정말 긴급한 상황이 맞을까'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설문 응답자의 35.9%는 정말 위급한 상황인지 의심스러워 양보가 머뭇거려진다고 했고, 24.7%는 구급차가 사이렌과 경광등을 켜고 주행해도 위급 환자를 이송하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고 했다. 또 견인차나 보안업체 차량 등의 사이렌 소리와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구별할 수 없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7.6%였다. 2008년 중앙소방학교 수상 논문인 '긴급자동차 교통사고의 효율적 대처방안'에 따르면, 견인차나 사설의료기관 긴급자동차가 정직하지 못한 운행을 해 시민 동감을 얻어내는 데 실패한 탓에 구급차 길 터주기에 대한 국민 불신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강력한 단속과 처벌도 뒤따라야 외국처럼 우리도 구급차에 양보하지 않으면 강력한 단속과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선진국들은 긴급차량에 양보하지 않는 운전자에게 과태료를 엄하게 부과한다. 미국 오리건주의 경우 긴급차량이 보일 때 도로 가장자리로 즉시 이동해 정지하지 않으면 벌금을 720달러(82만원)까지 물린다. 캐나다도 긴급차량에 양보하지 않으면 380~490캐나다달러(41만~53만원), 긴급차량을 150m 안에서 뒤따르는 얌체 운전자에게는 1000~2000캐나다달러(110만~220만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우리 도로교통법도 긴급자동차 피양·일시정지 위반의 경우 4만~5만원 정도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돼 있지만, 2007년 적발 차량은 36건에 그쳤다. 이에 따라 소방방재청은 강력한 단속 규정과 엄중한 과태료 부과 등을 법제화하는 것도 검토하기로 했다. 한국사이버대 박재성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심(心)정지 환자 등 긴급환자에게는 일분일초가 생존율을 크게 좌우한다"며 "운전자들이 어떤 구급차량이라도 양보부터 하자는 생각을 가져야 긴급 환자 목숨을 한명이라도 더 건질 수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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