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온 나라가 이태원의 아픔에 충격이 있는 날
아픈 마음을 담고 그보다 앞서 약속한 날이었기에
친정 오빠 부부와 함께 황룡을 거기로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광주서 임곡으로 가는 길 아름다운 황룡강을 따라 가는데
고봉 기대승 선생님이 계시는 월봉서원의 빙월당 간판이 보이자
언니가 하시는 말 빙월당이 보이네..
돌아 오는 길 들러보기로하고
황룡으로 달려가서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방앗간을 지나가니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하고
황룡강 다리밑에서는 뻥 튀기는 소리가 뻥 하면서
고소한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오더니 작은 콧구멍이 뻥하고 뚫린 것 같다
사람 냄새 가득한 황룡의 유명한 국밥 집에서 수육 한 접시에 국밥을 맛있게 먹고
가볼 곳이 있었으니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10 ( 백비길 33-17 )
" 청백리 정신 " 의 표상이신 아곡 박수량 선생님 백비 였다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장성의 김개 선생님께 사사를 받았는데
김개 선생님이 고부 군수를 하실 때에 고부로 따라가 공부를 했고
그곳에서 백일장이 열리자 선생님은 열두 살 나이에 바다를 바라보며
" 망해부 " 를 지어 백일장에서 일등 장원을 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학문적 자질을 갖추었던 선생님은 과거 급제 후 여러 벼슬을 많이했는데
선생님의 관직 생활 중 특별한게 있었으니
조선 시대에 유난히 심했던 " 적서 관계 " 였다
첩의 자식인 서자들은 과거 시험에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유능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기 위해서는 적서 관계를 없애야 한다며
" 적서 차별 철폐 " 를 외친 분이셨다
또한 선생님은 부모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는지
한 달에 부엌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나는 것이 십 오일 이었다고한다
그때 명종 왕께서는 선생님의 청렴을 알아보시려고 암행어사를 몰래 보내었고
선생님의 생활을 확인하는데
" 벼슬에 오른지 38년이나 되고 높은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변변한 집한 채 없다 " 고 하자
명종대왕은 크게 탄복하시고 하남골에 99칸짜리 집을 지어 청백당이라 이름을 붙여 주었고
손수 쓰신 편지를 보냈다
" 경을 만나지 못한지가 너무나도 오래 되었다. 경의 건강은 어떠한가?
내가 듣자하니 경의 부엌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 한 달에 절반이나 된다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가 농사를 지은 것이 익었기에 타작을 해서
나락 두말을 장성으로 보낸다. 물건은 대단치 않으나
왕으로서 신하에게 보낸 것이니 그 물건의 의미가 얼마나 무겁겠느냐,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받고 다시 올라와 과인을 도와다오 "
선생님은 은 이 편지를 받으시고 다시 상경하여 벼슬을 하셨다
그리고 벼슬아치가 되려면 나부터 깨끗해야 남의 단점을 말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당시 광주 목사 임구령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큰 형님이 무등산 밑의 식역정 주인공인 석천 임억령이고 두 번째 형님이 괴마 임백령이다
우리나라의 사화 중에서 가장 억울한 것이 " 기묘사화 " 라면 두 번째 억울한 것이 " 을사사화 " 이다.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 분이 괴마 임백령이다.
형님들이 중앙 무대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임구련은 지방에서 온갖 불의란 불의는 다 저질렀다.
그가 광주목사를 하면서 많은 부정을 저지르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누가 내려가 해결할 것인가 골칫거리였다.
명종 왕은 이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당시 선생님은 전라도 관찰사보다 높은 직급이었는데
일부러 강등시켜서 전라도 관찰사로 보내어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렇게 부임한 박수량 선생은 임구령의 비리를 샅샅이 조사해서
직접 파면을 시켜 사건을 마무리했다
아곡 선생님이 공직에서 조금이라도 비리가 있었다면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와서
그 부정의 산실인 광주 목사 임구령을 어떻게 파면 시킬 수 있었겠는가?
청렴은 더한 청렴을 낳았으니
중종 때 선생님께서 강릉 경포대를 가시게 되었다
가사 문학의 대가이신 송강 정철 선생님이 " 관동별곡 " 에서
강릉 경포대에는 달이 다섯 개나 뜬다
" 하늘에 있는 달과 바다에 뜬달, 강릉 호수 위에 떠 있는 달
술잔에 비친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있는 달 "
이렇게 멋진 풍류로 경포대 호수를 칭송하였다
그런데 아곡 선생님은 풍류도 청렴한 마음으로 낳았으니
그분이 쓴 시 한 수를 올려본다
경포대 / 박수량
거울 면인양 평평하고 수심은 깊은데
단지 사람 모습만 비추고 사람 마음은 비추지 못하네.
만약 속마음을 몽땅 환하게 비춘다면
응당 알겠거니와 경포대 위에 머물 사람이 드물 것이네.
이 시처럼 거울 같은 호수에 사람 모습만 비치어서 다행이지
사람의 속마음까지 환히 비친다면 어느 누구가 경포대에 오를 것인가.
자신 있게 오를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것이다.
청렴한 사람, 깨끗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만 찾아 올 것이다
아예 탐욕한 자는 마음이 드러날 까 보아 이곳에 안 올 것이고
낮에는 깨끗한 척 하지만 밤에는 더러운 행동을 보이는
박쥐같은 사람은 검은 마음이 탄로 날 까 보아 경포대에 안 오르리라.
경포대에 와서도 경치만 구경하시지 않고 부정부패가 심했던 세상사의 어지러움을
청렴한 마음으로 경포 호수를 바라 본 선생님의 삶을
우리세대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하신 말씀이
“시골의 촌 놈이 관직에 올라 서울시장을 지내고 4부 장관까지 했으니
너무나 분에 넘친 관직 생활을 한 것 아니냐? 내가 지나친 관직을 받았으니
내 무덤은 " 고향에 장사 지내되 묘를 크게 하지 말고 비도 세우지 말라 " 고 했다
명종께서는 선생의 부음을 듣고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판서를 지낸 분이 운상비가 없어 고향으로 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비용을 마련해 주었으며 예장을 명하였다.
그리고 서해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하였는데 비문을 새기다가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 되어 비문 없는 비를 세우니 이 비가 선생님의 유명한 백비(白碑)이다.
생을 마치는 순간 까지 지킨 청렴의 절개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그 이름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 선생님의 백비
이름조차 없는 묘비를 보면서 참 된 청렴의 목민관의 삶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돌아 오는 길
" 관청은 백성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고
살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 라고 말씀하신
정약용 선생님 과 박수량 선생님의 백비가 오버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