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모친 마리아
2023.5.14. 주일오후예배
이 시간 잠깐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그리고 모친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 또한 주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익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일곱 가지로 성서에 나와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동정녀의 몸을 빌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적 중에 기적이지요. 이 기적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의미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도 사실 임마누엘이 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친과 모친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아들로 삼을 때에는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있는 말씀처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이를 발견한즉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잉태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일이 여기에서 벗어나면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생명까지 걸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냥 심심하니까 교회 가고, 그냥 십자가 목걸이 걸고, 교회 가면 재미있으니까 이런 수준이 아니라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구주요,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믿고 따라야 될 줄로 압니다.
둘째, 마태복음 2장에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헤롯왕이 듣고서 베들레햄 지방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밤중에 요셉이 깨어서 주의 지시를 받아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주님의 생명은 죽게 됩니다. 주님의 생명을 지키려고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고 순례의 길을 떠난 것입니다. 나 스스로 가면 안되지요. 근거가 거기니까. 전혀 모르는 애굽으로 가서 그들이 무슨 살림을 갖고 갔겠습니까? 돈이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마음 주실 때는 주님이 온전하게 구원하시고 돌봐주실 것을 믿고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생명을 지키고자 우리의 걸음이 순례자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깨어서 주님의 생명을 지키는 것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내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이 움직이고자 하는데 둔감해서 알아채지 못한다면 주의 생명은 죽게 되고 우리는 마른 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에 대해서 민감하게 깨어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누가복음 2장에는 열두 살 된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잘 알듯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내고 나사렛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하룻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곁에 안 계시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만큼 그들은 영적인 빈틈이 있었어요. 사흘 후에 찾고 찾아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했지만 자기 부모님들과 한가지로 나사렛으로 내려가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말씀이 마음에 참 좋았습니다. 예전에 형님이 그런 말씀 하셨지요. “오고 가는 차 중에 가장 예쁜 차가 뭐게?”라고 물어보셨는데 “네, 맞추셨습니다. 선물 드리겠습니다.” 포르쉐니 벤츠니 이런 슈퍼카가 멋있는 것이 아니라 양보하는 차가 예쁘다는 것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이 멋있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식당이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겠지만 그런데 예쁘고 멋있는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요? 똑똑한 아이일까요? 예쁜 아이일까요? 저는 예의 바른 어린이가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모님께 순종하면서! 친구들과 다툼이 있으면 절대 기죽지 말고 소리 질러라, 자존심 꺽지 말고, 손해 보지 말라고 요즘에는 많이들 가르친다는데 그 자식한테 나중에 당할 것이 뻔한데 그렇게 육으로 키워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다스려야지요. 그리고 순종하여 받들어가는 이 어린 예수님의 모습처럼, 그런 아름다운 예의 바른 어린이들이 우리 몸 된 교회 안에 주일학교, 청소년들에게도 모습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순종하여 받드시는 모습, 나중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요단강에서 받을 때 하늘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 어떠한 삶의 모습이 기뻤을까요? 물론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율법을 강론하는 그런 대단한 영적 권위가 있는 모습도 좋았겠지만, 평범한 나사렛 목수인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기쁨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평범한 집안에서의 아름다운 모습, 은연히 그것을 우리에게 샤론의 백합화처럼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 ‘소년 예수’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저는 보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듣기로는 열두 살 난 소년이, 예수님이지요.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도 그 영화 스토리에 나왔다는데 생판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삼십 년간 자라시면서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어요. 그랬더라면 자신의 아우들과 모친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우리 아들은, 우리 형님은, 우리 오빠는 대단하신 분이라고 선전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은 것 보니까 예수님은 평범하게 그러나 착한 형님이자 오빠였던 것 같아요. 평범한 날에 순종 속에 사셨고 다스림 속에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넷째,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이제 공생애가 시작되어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 제자들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때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대답하시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모친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다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잔치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수님의 때를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분은 모친 마리아였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사랑으로 역사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주님의 일하실 때를 기다리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일하심을 돕는 사랑과 축복과 기쁨의 통로가 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돕는 자로 복음과 사랑의 통로가 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어느 날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말씀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할 말이 있었나봐요.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장에 있는 말씀인데요, 예수님도 가족에 대한 정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정을 따라가다가는 다 죽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정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이지 구경하려고 온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하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참으로 소중할 것입니다. 나중에 이 모친과 동생들이 제대로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전혀 기도에 힘쓰는 모습이 사도행전 1장에서 나옵니다.
예전에 제가 아래쪽 교회를 돌볼 때에 제 부친과 모친이 함께 교회에 계셨습니다. 제 아버님이 저를 막내라고 귀엽게 생각하시고 특별히 예뻐해 주셨는데, 저한테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 같은 교회 식구들께 그랬나봐요. “예전에는 막내가 참 착하고 귀여웠는데 지금은 참 무서워” 제가 아버지한테 무서운 사람이 되어버렸나봐요.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바로 세우려고 좀 냉정하게 대할 때도 있고 분리를 철저히 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으셨나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는 저와 의논 없이 주일을 한번 빠지셨어요. 그래서 왜 빠지셨냐고 여쭈었더니 일본을 다녀오셨대요. 제가 반성문 쓰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말 대답을 하거나 불순종한 적이 생각 안 날 정도로 착한 아들이었지만 주님 편에서 부모님을 세우기 위해서는 정과 함께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습니다. 마치 창세기의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데리고 왔을 때 자신이 살고 있는 애굽 궁에 데려오지 않고 따로 고센 땅에 두지 않았습니까? 고센 땅에 떼어 놓은 것은 분리했지만 주님의 지혜와 안목 속에서 참 잘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분리 속에서 주님 편에서 섬기는 것이 진정한 가족에 대한 섬김이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째, 요한복음 19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그 밑에 보이는 사랑하시는 제자와 모친에게 유언적으로 남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먼저 모친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이르되 “보라 네 어머니라”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남동생들도 있고 여동생들도 있는데 왜 그들에게는 맡기지 못했습니까? 마음으로부터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못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주님의 동생 같은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물론 육신의 동생이 다 귀한 사람이고 내 형제들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어머니를 정말 마음으로부터 내 심정처럼 돌봐줄 사람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모시고 한 교회에서 식구라고 할 때는 이 정도의 관계가 살아 있는 형제였으면 합니다. 말로만 형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같이 연합이 되고, 마음으로부터 내 중심처럼 섬겨줄 형제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도 그런 형제로 남은 길 가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 일곱째,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여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쓰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제는 예수님 부활 승천하여 보이지 않으시지만 하늘 보좌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향해서 주님께 다스림 받는 모습입니다. 그 예루살렘의 삶을 가지고서 성전에서 전혀 기도에 힘쓰는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 온전하게 돌아온 그들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나사렛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침묵하셨던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과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다른 자녀들에게 들려주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동생들은 복음의 의미를 깨우치며 이제는 주님의 종으로 헌신한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한 이들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입니다. 성도들과 더불어, 형제들과 더불어 전심으로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교회의 모습이지요.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머리로 붙드는 살아 있는 공동체,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만, 예전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성당에 가면 마리아상이 있는데 미스코리아처럼 예쁜데 마리아가 그렇게 예뻤다면 시골에 살아겠느냐고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영화에는 예수님이 모델 같이 멋지게 생겼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서 시골 나사렛 목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흠모할만한 모습이 없으신 분으로 주님을 소개합니다. 한 없이 사랑 가운데 우리의 목자로 서 주시고자 십자가로 나아가셨고 부활하신 우리의 구주, 나의 주님이십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