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동산 선악과는 쩨다카
하늘의 가르침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그들에게 하나님이 맡기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명을 가능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바로 토라라 믿고 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이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청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종의 메뉴얼인데, 이 메뉴얼 대로 유대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 자연스럽게 그 사명을 감당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하늘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면 다른 것보다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세상 사람들은 맘모니즘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거나 돈을 하나님으로 알고 배금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돈의 문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생 동안 고민해야 하는 과제이다.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은 피와 같아서 피에 의지하지 않는 세포는 없는 것과 같다. 심지어 세계 최고 부자라도 마찬가지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 마치 모래와 같아서 잡는다고 잡히는 것도 아니고 모은다고 해서 모아지는 것도 아니다. 돈을 수레바퀴로 보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돈의 속성은 원래 돌고 도는 것이다. 돌지 않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성경 창세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기록이 이어진 후 에덴동산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경작하게 하고 돌보게 했다는 기록이다.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laced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end it.)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15절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5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그 보상으로 16절을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And the LORD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you are free to eat; but as for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bad, you must not eat of it; for as soon as you eat of it, you shall die.” ) 보통 일을 시키면 보상을 해주는 건 당연지사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다. 하나님은 마치 고용주, 아담은 관리자 입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여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대리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는 일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청지기 또는 대리인(관리자)는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고 주인이 준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주인은 그런 청지기에게 보상을 해줘야 할 의무를 지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인인 하나님이 청지기에게 일을 맡기고 그 대가를 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계신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 나무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 사람이 고용주에게 일을 해주고 월급을 받으면 그 돈은 모두 자기 소득이 되고 그것을 어떻게 처분하든 자기 마음이다. 그런데 성경적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근거가 바로 밭 귀퉁이나 이삭을 줍지 말라는 계명이다. 옛 이스라엘 농부들은 자신의 소작물을 모을 때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자들이 주울 수 있도록 일부를 남겨두었다. 첫째가 페아(Peah)로, 밭의 구석을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것을 말한다. 레켈(Lekel)도 있는데, 이는 농부들이 수확 중에 땅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쉬케하(Shichechah)는 곡식 단을 거둔 후 모르고 밭에 남겨둔 곡식 단을 뜻한다. 이것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 마찬가지로 포도밭에서도 가난한 자들이 가져가야 하는 분량인 페레트(Peret), 올라오트(Olaot) 등이 있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계명을 어긴 것이 돼서 처벌 받게 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면 사형을 당하는 처벌에 처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서 받는 대가는 전적으로 우리 맘대로 처분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자에게 돌아갈 몫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 사람에게 월급을 주시되 그 월급 안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갈 몫도 같이 주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주님께 드려라, 너아 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의 것을 나눌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주님의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결국 주님께서 우리의 손에 맡기신 것일 뿐이며,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가난한 자의 몫을 그들에게 주지 않게 되면 도둑질이 된다.
여기서 선악과는 쩨다카 라는 결론이 얻어진다. 쩨다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의무적 기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모든 소득이 우리의 것이라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득에 가난한 자들이 몫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이다. 그런데 선악과의 작용이 뭐냐면,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걸 따먹는 걸 금지했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만 빼고 다 허용한다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라와 하지 말라 라고 명령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통해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다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여간 인간이 악하게 되는 경우는 선을 행하지 않을 경우다. 빛과 어둠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악은 실체가 없다. 선이 없는 상태일뿐이다. 악을 몰아내려면 선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우리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악을 저질러보면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사람이 악해질 때를 언제로 볼까? 선한 행위를 하지 않을 때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난한 사람이 지하철 계단에 엎드려서 적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 앞을 지나면서 우리는 갈등하게 된다. 돈을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돈을 주는 게 옳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온갖 핑계를 대며 돈을 주는 것을 거부한다. 돈을 주는 것은 선한 행위다. 성경은 적어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 앞에 두고 기부를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선행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악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악할 악(惡)를 봐도 그러한 해석이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惡자를 파자하면 버금 아(亞)와 마음 심(心)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버금 마음이다. 버금은 두 번째를 말한다. 두 번째 마음이라는 뜻이다. 악은 두 번째 마음이라니 무슨 뜻인가? 첫 번째 마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첫 번째 마음은 선한 마음을 뜻한다. 가난한 자가 앞에 있으면 누구나 측은지심이 들고 그를 돕고자 한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된 사람은 누구나 같은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그런 선한 마음을 발목잡는 두 번째 마음이 우리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온갖 핑계로 기부하는 것을 막는 악한 손길 말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앞에 두고 늘 갈등한다. 그게 바로 선악을 두고 갈등하는 순간이다. 선악과는 그런 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세상을 다스릴 때 그 대가를 받지만 거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맡겨놓은 몫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좋다. 왜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직접 그 몫을 주지 않고 청지기에게 그 몫을 주었을까? 그건 우리 인간이 성숙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인간이 가난한 자의 몫을 가난한 자에게 돌려주는 순간 우리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성숙한다. 쩨다카를 하면 인격이 성숙한다는 랍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필자는 랍비들의 통찰을 수용한다. 쩨다카를 하는 사람은 인성이 개발되고 발전한다. 기부한다는 개념은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기부는 내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원래 가난한 자의 몫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부자를 성숙시키려는 목적으로 대리하게 하신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웃을 위해 비즈니스를 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동일하다. 히브리어 '아보다' 라는 말은 일 또는 예배의 뜻이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일과 예배는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일을 하게 되면 스스로에게 생계를 유지할 보상이 주어지니 좋고 이웃을 섬길 수 있고 하나님께 동시에 예배할 수 있으니 좋다. 물론 청지기가 이와 같은 마음을 먹지 않고 단순히 돈을 벌 목적으로 일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다. 그것은 돈을 우상으로 삼는 우상숭배와 다름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이 아닌, 돈을 목적으로 하는 비즈니스는 우상숭배나 다름 없다.
일은 매우 신성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겨주신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자기자신과 이웃, 하나님께 동시에 좋은 것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탈무드에 보면 이 세상에서 옳은 길은 무엇일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답은 자기 자신에게 명예가 되고 이웃으로부터 칭찬받는 일이다. 이것이 직업이다. 직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지순한 가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대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쩨다카도 할 돈도 함께 주신다니...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이 일을 할 때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라와 탈무드는 비즈니스 성공의 비결을 명성으로 보고 있다. 명성은 좋은 평판이다. 좋은 평판은 정직에서 나온다. 정직은 긍휼함에서 비롯되고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인 성품이다. 그렇게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기부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