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야화(1)
-중리어른 -
우리 마을에서 한 십 분쯤 걸어가는 거리에 빡대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 가려면 우리 동네에서 작은 하천 둑길로 걸어가다가 큰 하천과 합수된 곳에 이르러 다시 하류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백 미터쯤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그 후에 하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마을이 있는데 좁은 골짜기 사이에 대여섯 가구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바로 이 마을에 중리어른이란 분이 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보다는 몇 살 적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것은 그분이 늘 아버지를 부를 때 형님이라고 불러서이다.
중리어른은 바깥일을 보고 해거름 집에 들어가기 전 술이 생각날 때는 종종 우리 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으레 집에서 담그는 밀주인 탁주를 걸러 술상을 차렸다. 술안주라고 해봐야 촌에서 김치 한 접시가 고작이었지만 그것이면 진수성찬이었다. 아버지와 중리어른은 술상을 앞에 놓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것저것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곤 했다.
중리어른이 한 번은 밤중에 우리 집을 찾은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갓 들어갈 때쯤이었으니까 그분은 그때 나이로 아마 마흔다섯 살쯤이나 되었으려나……. 그때는 한겨울이었고 영하의 날씨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이었다. 온 식구가 잠든 밤, 대문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어머니가 먼저 잠을 깼다. 과연 왠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웅얼웅얼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자세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다급한 상황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는데 잠시 후에 한 사람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중리어른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잠자다가 일어났다. 호롱불을 켜고는 그분을 아랫목에 앉게 했다. 옷은 온통 물에 젖어 있었는데 흙과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게다가 추운 날씨로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또 손바닥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고 그 자국마다 피가 굳어 엉켜 있었다. 흑빛 입술에 안색마저 흑빛으로 변하여 거의 산 송장 같았다. 우리는 그분을 보면서 그분이 안정을 찾고 그날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말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중리어른은 남창장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밤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장터거리에서 집까지 오는 데는 십 릿길인데, 터벅터벅 걸어오다 보니 또 술 생각이 났단다. 그래서 방앗간 뒤 주막에 들러 또 술을 마셨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길 가 술집에서 빡대골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교동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내광, 중광을 거쳐 흐르는 큰 하천이 합수하는 곳을 지나야 했다. 우리는 그곳을 갱빈이라 불렀다. ‘갱빈’은 ‘강변(江邊)’의 사투리이니, 두 개울이 모여 제법 강변의 규모가 되었다고 생각해 명명한 모양이었다. 하천 건너편에는 표면이 거칠거칠한 검은색 바위가 둑을 이루고 있었는데, 서너 길의 그 비스듬한 경사의 바위를 기어 오르면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무덤이 있었다. 우리는 갱빈에서 목욕을 하다가 무료해지면 그 검은색 큰 바위를 오르기도 하고, 바위 위에 있는 무덤가의 탱자를 따서 그것을 던지며 놀기도 했다. 가을에는 노란 탱자를 따서 터뜨려 즙을 짜 먹으며 그 신맛에 온갖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중리어른이 그 갱빈에 이르렀을 때였다고 한다. 예쁜 한복을 입은 여자가 있어 한들한들 웃으며 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홀린 듯 그 손짓하는 여인을 따라갔다. 때로는 살얼음이 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고, 또 바위를 오르다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바위에서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다가 중리어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내가 무엇에 홀린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한참 후에야 지금 갱빈의 바위 위를 오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겁이 덜컥 났다. 얼마 전까지 손짓하며 부르던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와 실례를 무릅쓰고 우리 집에 왔다 한다.
그의 두 손바닥은 바위를 오르다 긁힌 상처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옷은 추위에 얼었다가 녹아 김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뺨이며 이마, 콧등에도 바위에 긁힌 자국으로 붉게 환칠이 되어 있었다. 중리어른은 이야기를 마치고 천장만 쳐다보며 그저 말이 없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에도 초점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곳 갱빈에서 색시 귀신에 홀린 사람이 전에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 검은 바위 밑에 있는 웅덩이에는 몇 년 전에 여자애가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하방에 사는 아무개는 술 먹고 그곳을 지나다 도둑을 만나 밤새 싸웠는데, 날이 밝아 보니 개울둑에 있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였다는 얘기도 했다. 이어지는 귀신 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느덧 창호지 문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새벽 댓바람에 빡대골에 가서 중리댁을 데리고 왔다. 중리댁은 남편을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눈가부터 훔쳤다. 추운 날씨에 술 먹고 오다 어디 개골창에 쳐박혀 얼어 죽은 줄 알았다고, 밤새 잠 한숨 못 잤다고 했다. 중리댁은 우리 부모님께 고맙다며 절을 몇 번씩이나 하고 떠나갔다.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내외가 나란히 걸어가는 빡대골 쪽으로 난 둑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2024.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