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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님 법문 전 10분 입정
전원법사님 「선도회 간화선 읽기-일본 선종사 개관」 법문
III. 일본 불교사 개관
일본 불교는 크게 고대古代, 중세中世, 근세近世로 나누고, 다시 시대적으로 고대불교는 아스카(飛鳥·白鳳, 6세기 말~8세기 초)와 나라奈良, 헤이안平安 시대 불교로, 중세불교는 가마쿠라鎌倉와 무라마치室町 시대 불교로, 근세불교는 에도江戶와 메이지明治 시대 불교로 나눈다.
아스카(飛鳥: 538~710) 시대 불교 아스카 시대는 비조飛鳥에 궁전을 비롯한 도시가 세워진 시대를 가리킨다. 아스카 문화와 하쿠호白鳳 문화가 개화한 시기로, 이때 국호가 왜국倭国에서 일본日本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에 불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5세기경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서인데, 6세기 들어 고대 국가의 확립과 함께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성립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기원전 1세기경 중국으로, 이어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6세기 초에는 신라, 그리고 일본에는 아스카 시대에 전래된 것이다.
정사正史인『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흠명천황欽明天皇 6년(545년) 백제 성왕(聖王, 523~554)이 일본 천황을 위해 장육丈六 불상의 만들고 13년(서기 552년) 불상, 경전, 스님을 보내왔다고 한다.1 새로운 종교인 불교는 처음 보수적인 집단들에 의해 다소 반대되었던 것 같다. 저항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일본에는 이미 8백 만이나 되는 신을 받드는 재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융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였다.2
새롭게 外國으로부터 宗敎가 수입될 때에는, 예부터 내려오던 종교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日本에 불교가 건너갔을 때에는 충돌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物部氏의 反對가 진압되고 蘇我氏의 政權이 확립됨으로서 불교의 지위도 보증이 되었다. 物部氏의 반대라고 하드라도 그것은 새로운 宗敎理念에 관한 반박 같은 것이 아니고, 外國의 神들과 日本의 여러 神들과의 優劣을 다투는데 지나지 않았다. 蘇我氏들만 하드라도 불교의 敎義에 관하여는 흥미도 이해도 없이 단지 멋진 異國의 神도 함께 봉안하는 편이 효력이 있을 듯하다는, 완전한 타산으로부터 불교를 채용한데 불과하였다. (중략) 불교를 채용하느냐 버리느냐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데는 한결같이 그것은 타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疾病의 유행이나 종멸, 또는 천재지변 들을 規準으로 하여 정해졌다.3
전래 초기 숭불파崇佛派의 소가씨蘇我氏와 배불파排佛派의 모노노베씨物部氏 사이에 다툼이 있었으나, 587년 전쟁에서 승리한 소가씨가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를 고모姑母인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에 임명하게 되면서 불교가 공식화 된다. 그러나 당시 불교는 왕족이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승려도 본인이 원했다기보다는 관료에 가까웠다. 588년에는 젠신니善信尼 등 3인의 비구니가 계를 받기위해 백제에 가기도 하는데,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건너간 한국 승려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595년 건너간 백제의 혜총慧聰과 고구려의 혜자慧慈와 같이 성덕 태자의 스승이 된 이도 있었다.4
성덕태자는 594년에는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칙서를 내리고, 604년에는 ‘17조條헌법憲法’5을 제정하였다. 607년에는 호류지法隆寺를 창건하였으며, 隋나라에 견수사와 학문승을 파견하는 등 일본 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스스로도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유마경維摩經』·『승만경勝鬘經』·『법화경法華經』에 대한 주석서『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6 성덕태자는 ‘일본불교의 아버지’라 하여 사후 그를 모시는 태자신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덕태자는 일본고대의 종교와 습속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타협책으로 ‘본지수적설本地垂跡說’을 주장하였다. 본지수적설이란 일본 재래의 제신들이 인도불교의 제불보살의 화현이라고 보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 그들의 재래 신과 부처가 하나라는 것이다. 본지수적설에 의해 불·보살은 본지本地로 주가 되고 그들의 신들의 모습은 수적垂跡으로 종속되어 승려들이 신주들을 통괄하는 관례를 세운다. 이 같은 ‘신불습합神佛習合’은 이후 메이지 시기 ‘신불분리령神佛分離領’으로 신사에서 사찰이나 스님들이 축출당하기 전까지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색으로 계승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불습합까지는 아니지만 불교가 한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국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불교 본연의 불사를 드리는 본당 이외에 토착신을 모시는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나라 토착신앙인 산신山神 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군이 나중에 선도仙道로써 산신령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고유의 신선사상神仙思想까지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통 산신각은 법당 위에 존재하는데, 불교의 신보다 우리의 조상신인 산신을 우위에 두는데 의미가 있다.7 선종이 수용된 9세기이후 산지가람으로 발전하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게 되었다.
나라(奈良: 710~794) 시대 불교 나라 시대는 주로 학승들이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며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국교적 성격을 띤다. 이른바 학문불교인 ‘남도육종南都六宗’이 성립되는 시기이다. 남도육종은 삼론종三論宗8, 성실종成實宗9, 법상종法相宗, 구사종具舍宗10, 화엄종華嚴宗, 율종律宗 등을 가리키는데, 당시는 ‘일사일종一寺一宗’은 아니어서 하나의 사찰에 각 종파가 함께 공존하였다. 그러므로 종파로서의 결속력은 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천태종天台宗, 선종禪宗11 등 종파와 밀교密敎, 정토교淨土敎 등이 들어와 있었으며, 남도육종 가운데 법상종, 화엄종, 율종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법상종法相宗은 법의 상相을 밝힌다고 하여 법상종이라 하는데, 삼론종에서 말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12의 세계를 명백히 밝히는 종파이다. 식識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유식종唯識宗13이라고도 하는데, 이 사상은 현장玄藏에 의해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제자인 규기窺基에 의해 확립된다. 당에 유학한 도쇼(道昭, 629~700)14가 전래해 온 것이 최초로 이후 일본 유학승과 신라 승려가 4차례에 걸쳐 교의敎義를 전했다고 한다. 고후쿠지興福寺를 중심으로 호류지法隆寺, 야쿠시지藥師寺 등에서 학풍을 떨쳤다. 화엄종華嚴宗은 당나라 법장(法藏, 643~712)에 의해 대성되었다. 일본 화엄종은 신라의 심상審祥이 도다이지東大寺에서『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이때 낭변(良辯, 689~773)이 그의 제자가 되어 일본 화엄종을 확립한다. 법상종이 아뢰야식阿賴耶識15을 근원으로 하는 반면 화엄종은 진여眞如를 근원으로 하여 일체는 독립적이면서 통일되어 있다고 설한다. 화엄종의 ‘일즉다一卽多’ 사상과 쇼무 천황(聖武天皇, 701~756)의 이상이 맞아떨어져, 동대사 중심 교학이 됨과 동시에 동대사 대불 조성의 근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동대사가 육종겸학六宗兼學의 관사로 되었으며, 이후 화엄종은 동대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른다. 율종律宗은 계율을 존중하는 학파이다. 당나라 감진(鑑眞, 687~763)의 입국으로 성립되었다. 감진은 다섯 차례나 도입할 뜻을 냈다가 좌절하였으나, 여섯 번째로 성공해『사분율四分律』16에 의한 계단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승려들은 수계의식에 의한 득도得度가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남도육종 등 이들 학파는 일반대중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으며, 적극적인 전법활동도 없었다. 이 시대 승려는 관승(관료승)의 신분이었으므로 민간 포교활동은 할 수 없었고, 사천왕사四天王寺 법흥사法興寺 법륭사法隆寺 동대사東大寺 같은 거대한 관사에는 민중의 출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시대에는 매년 득도하려는 승려의 수를 국가에서 통제해야할 만큼 불교가 융성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와 고려 초기 선과 교를 통틀어 5교9산五敎九山이라고 하고, 더 확장하여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존재하였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 명맥이 끊어진다. 현재의 조계종은 육조 혜능이 주석했던 조계산에서 이름을 따 조계종이라 하였는데, 원래 불교 선종과 교종 종파와는 관계없이 이름만 빌려온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과 함께 해방이후 혼란기 때 등록된 단체일 뿐이다.17
헤이안(平安: 794~1183) 시대 불교 헤이안 시대는 환무천황桓武天皇이 794년 오늘날 교토인 평안平安으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 시작된다. 나라 시대 불교는 국가에 종속되어 있어 종파의 확립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헤이안 시대 진호국가鎭護國家를 표방하면서 국가에 대해 주체성을 가지고 대처하게 되는 시기이다. 즉, 9세기 초 사이쵸(最澄, 767~822)와 구카이(空海, 774~835)가 중국으로부터 천태교학과 밀교를 들여와 개창이라는 형식으로 종파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수계라는 형식으로 혈맥상승의 원칙을 세운 것이다. 국가불교로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배타적인 교단에 의해 불교계가 재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태종天台宗18을 세운 전교대사傳教大師 최징最澄은 785년 19세 때 동대사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히에이잔比叡山에서 수행정진 하다, 793년 엔랴쿠지延曆寺를 건립하고 경전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개창하게 된다. 804년에는 입당入唐하여 중국 천태종의 부흥조로 불리는 6조 형계존자荊溪尊者 담연湛然의 제자인 도수道邃와 행만行滿 등에게 전통적인 천태종을 배웠으며, 이듬해인 805년 7조 흥도존자興道尊者 도수 문하에서 ‘대승원돈보살계大乘圓頓菩薩戒’를 받고 천태종 제8조가 된다. 또 용흥사龍興寺의 순효順曉에게 밀교를, 수연脩然에게 선禪을 전수받음으로써 ‘사종상승四種相承’을 하고 귀국하여,19 비예산 연력사에 자리를 잡고 대승 계단을 설치하였다. 일본 천태종은 중국 천태종에다 밀교密敎, 선禪, 계戒의 네 가지 요소를 종합한 독자적인 천태밀교를 형성하였다.
천태종의 ‘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현실 그 자체로 좋다고 보는 사상으로,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부터 가마쿠라鎌倉에 걸쳐 일본 천태종에서 확립한 사상이다. 이는『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본각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생멸·변화하는 현상계야말로 본래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라는 주장이다. 다종다양한 사상事相이 생기, 변화하는 현실의 모습이야말로 진실로 영원, 보편적인 생동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본각사상은 일본 불교의 여러 종파뿐만 아니라, 일반사상이나 神道의 이론, 또는 문학, 예술의 다양한 방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진언종眞言宗은 최징과 함께 당에 갔던 흥법대사弘法大師 공해空海에 의해 도입되어 코오야잔高野山에 자리를 잡았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하는 밀교적 성격의 진언종은 성불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기복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 몸 그대로 성불할 수 있어 귀족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았다.
최징과 공해에게 있어서 최고 진리의 탐구방향은 대조적으로, 최징은 우주를 구극적인 방향에서 원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고, 공해는 우주를 정신의 내면적인 방향에서 구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징은 구극의 진리에 해당하는 법화경의 일승묘법을 근간으로 삼았고, 공해는 정신의 내면의 신비에 해당하는 진언밀교의 비법을 핵심으로 삼아, 각각 사상·철학의 총합체계화를 꾀했던 것이다. 공해의 사상체계는 훌륭하게 완결된 것으로서 교리적으로는 덧붙일 여지가 없다. 그 때문에 공해 이후의 진언종은 오로지 신비한 체험의 기술을 연마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른바 敎相에 대한 事相의 중시이다. 히에이산은 인격완성의 도량, 진리탐구의 배움터가 되었던 반면, 高野山은 비법전수의 신령한 도량, 신비한 체험의 영산이 되었다.20
당시 관승 집단 안에는 최징의 천태종과, 공해의 진언종을 중심으로 불교 연구 집단을 확립시키는데, 일승一乘사상, 실유불성설悉有佛性說과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사상은 헤이안 시대 불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으며 가마쿠라 신불교의 모태가 되었다.21
헤이안 시대 중기가 되자 일본은 전통적인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귀족의 장원莊園이 출현하였으며 지방호족과 무사계급의 쟁투가 일어났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호넨(法然, 1133~1212)은 왕생을 위해 다른 잡행雜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하라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제창한다.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었으며, 천태종에서 독립하여 정토종淨土宗을 세운다. 한편, 호넨의 제자 신란(親鸞, 1173~1262)도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루어진다는 타력보은을 강조하였는데, 룻카쿠도六角堂에서의 ‘몽고夢告’를 근거로 승려가 결혼해도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자신도 결혼을 하였다. 당시 승려의 결혼(대처帶妻)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승려들이 계단에서 계를 받을 때 불음계不淫戒를 맹세하기 때문이다. 이후 계율의 준수도 필요 없게 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자유로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전통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부분의 종파에서 수용하여 일본 불교의 특징이 되었다. 친란親鸞은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 가운데 말법사상末法思想22이 유행하였다. 오로지 구원의 길만을 선택해서 따르려는 전수專修운동이 더욱 강하게 일어 염불과 선, 또는『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종파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처음 이단으로 규정되어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민중 사이에는 뿌리 깊게 자리잡아간다. 그중 정토종과 정토진종은 종래의 국가불교 귀족불교에서 민중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쿠라시대에 더욱 확대되었다.
가마쿠라(鎌倉: 1185~1333) 시대 불교 가마쿠라 시대는 겸창鎌倉에 막부幕府가 설치되어, 조정과 막부가 나란히 정치의 중심이 된 시기이다.23 이 시기 주목할 것은 선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천태종에 몸담았던 에이사이(明菴榮西, 1141~1215)의 임제종臨濟宗과 도겐(希玄道元, 1200~1253)의 조동종曹洞宗이 대표적인데, 선불교와 함께 일본 중세에는 다도, 서도, 하이쿠俳句24 등이 유행하였다. 선불교는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를 통하여 급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천태종과 진언종을 누르고 일본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 매우 투쟁적인 승려 니치렌(日蓮, 1222~1282)이 등장하여 니치렌종日蓮宗을 개창하였다. 일련日蓮도 처음에는 비예산에서 수학하였다. 그는『법화경』이전에 설해진 모든 경전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대해 아직 다 설하지 못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법화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묘호렌겟쿄南無妙法蓮華經”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5 그는 독특한 주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막부幕府의 박해를 받아 한때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간결한 교의와 일본의 신神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존중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인해 가장 일본적인 불교종파로 발전하였다. 소카갓카이(창가학회創價學會) 등 전후 일본에 출현한 신흥 종교들은 대부분 일련종 내지 법화신앙 계통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末法思想, 選擇思想이라고 하는 점은 法然이나 日蓮이나 공통이지만, 전자가 個人의 救濟를 구하여 內省的이 된데 대하여, 후자는 國家主義的이고 政治와 宗敎와의 一致를 주장하고 또한 天災地變 등을 神들의 재앙이라고 하여 샤머니즘에 시종일관 것이 對照的이다. 그러나 佛敎의 受容方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두다 本源的인 것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가 당면한 요구에 응하는 것만을 취하였고 佛敎의 發展史 전체에 대하여 看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26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부처와 보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석가모니 부처 외에 동서남북 상하 어디에도 각각의 부처가 있고, 각각의 부처에는 거기에 따른 불국토가 존재한다. 각각의 불국토는 나름의 특색이 있지만 이상국理想國이라 생각하여 정토淨土라고 부른다. 그중 석가모니가 소속한 땅이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이고, 아미타불이 사는 세상이 극락세계極樂世界인데, 석가가 교화하는 불국토이자 정토인 인간세계는 괴로움이 많은데 반해 아미타불이 사는 아미타 정토는 즐거움만 있다하여 극락정토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극락정토는 대승불교의 산물이다. 불교는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에 근거하지만, 헤이안 말기와 가마쿠라 시기에는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극락왕생하려는 아미타신앙이 유행한다. 법연法然, 친란親鸞, 잇펜(일편一遍, 1239~1289, 시종時宗의 개조)이 그들이다. 반면에 묘에(명혜明惠, 1173~1232), 영서榮西, 도원道元 등은 석가신앙에 입각했던 둔세승遁世僧27들이었다. 정토교의 성행과 더불어 선종 또한 번창하여 일본 불교의 주류를 차지한다.
현대 일본의 불교 특징이 모두 가마쿠라 시대 출현한 신불교 교단에 의해 유래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가마쿠라 신불교의 조사들은 모두 비예산의 학승이었다. 젊은 시절의 법연, 친란, 도원, 일연 등이 연력사에서 최징의 천태종을 배웠고, 명혜明惠는 진고지神護寺에서, 에이존(예존叡尊, 1201~1290)은 다이고지醍醐寺에서 공해의 진언종을 공부하였다.
무로마치(室町: 1336~1573) 시대의 불교 무로마치 시대는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기이다. 무로마치 시대 불교는 교학적으로 뚜렷한 특성이 없이 가마쿠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가마쿠라 신불교의 특징인 둔세승 불교가 사회적으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이며, 신불교의 가르침이 정치 체제에 의해 받아들여진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장원제도莊園制度의 붕괴로 인하여, 여기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나라나 교토의 사찰들이 곤란을 겪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불교계는 가지기도加持祈禱28가 유행하면서 밀교화密敎化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임제종 선사들이 막부와 결탁하여 관료화하는 ‘관승화官僧化’도 이루어지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임제선이 귀족 무사에게 널리 퍼진다. 막부의 관승이었던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는 고다이고後醍醐 천황과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다다요시直義 형제의 귀의를 받아 남북조 시대 임제선을 크게 번영시킨다. 또 율승인 본칸(文觀, 1278~1357)은 관승이면서 한센병 환자나 걸인 등 당시 비인非人이라 불리던 사람들 구제에 힘썼다. 다이토쿠지大德寺 주지를 지낸 귀족출신의 관승이면서 무애행으로 유명한 잇큐 소준(一休宗純, 1394∼1481)도 오산파 선승들의 허식과 위선을 혐오하며 자유분방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신란親鸞의 법을 이은 렌뇨(蓮如, 1415~1499)는 정토진종을 크게 일으키는데, 누구나 행하기 쉬운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제창, 농민과 수공업자들을 끌어들인다. 정토진종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세속적인 혈연에 의해 상속되는 가장 일본적인 형태의 불교를 정착하게 한다. 한편, 일본재래의 조상숭배 신앙과 습합한 정토진종의 세력이 커져 봉건영주나 다름없게 되자, 천하 통일을 꿈꾸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29의 공격 대상이 되는데, 노부나가는 정토진종 뿐 아니라 연력사를 공격해 연력사를 불태우고 당시 막강했던 불교계 군사력을 와해시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30도 당시 새로운 8종, 즉 진언종, 천태종, 율종, 오산종, 일련종, 정토종, 유행종遊行宗, 일향종一向宗(정토진종)을 공인하면서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하였다.
織田信長의 天下統一사업이 진척되면서 1571년의 比叡山 火力공격, 1580년의 一向宗의 顯如의 大阪石山城의 퇴거에 이어, 豊臣秀吉이 1585년 根來를 격멸하고 高野山을 굴복시킨 것을 최후로 하여 佛敎寺院은 모두가 무장을 해제당하고, 어떤 곳은 절멸하도록 까지 되었다.
당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리스도교의 유입이다. 1549년 7월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가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여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역을 통한 이윤 추구와 기독교를 통해 막강한 불교세력을 누르려는 오다 노부나가 등 다이묘들의 보호로 그 세력이 커지지만, 신도가 많아지고 나가사키長崎가 기독교 교회의 영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진다. 에도막부도 기독교 금교 정책을 이어받아 1612년 금교령을 내린다. 1641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31가 극단적인 쇄국정책을 펴면서, 선교사와 일본인 사이에는 연결이 끊어지게 되는데, 그러자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신의 종교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기존 종교문화 전통 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나 신도 같은 종교 언어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하던 이들을 특히 ‘잠복 그리스도교도(가쿠레 기리시단潜伏切支丹)라고 부른다.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지난 3월 8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임진왜란 포로 빈센트 권, 일본서 화형당한 이유는?」의 내용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천주교 신자는 1784년 세례를 받은 이승훈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보다 무려 200년가량 앞선 시기에 천주교 신자가 된 조선인이 있다. 1617~1632년에 일본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작성한 ‘205인 순교복자 명단’, 이 명단엔 ‘빈센트 카운(권)’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 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기록에 의하면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잡혀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 사람은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 그는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이었고, 세스페데스의 도움으로 빈센트 권은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 수업을 받는다. 당시 일본엔 빈센트 권처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인이 5천 명에서 1만 명가량 있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신부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신부들은 일본 내 조선인 노예 매매 사실을 알고 일본인 신도 중 노예 매매를 하는 자들은 파문에 처할 것이라는 강력한 결의를 한다. 그들은 기금을 모아 조선인 노예들을 사서 풀어주기도 했다. 정신적인 구원을 뛰어넘어 실천적 행동에 큰 감명을 받은 조선 포로들은 앞 다퉈 천주교 신자가 됐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기리시탄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일본에서 자선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던 빈센트 권 역시 시마바라에서 체포되어 니시사카 언덕에서 끝내 화형 당한다.32
에도(江戶: 1603~1868) 시대의 불교 에도 시대33에 이르면, 가마쿠라 이래 서민화 되던 불교가 다시 국가불교 체제로 환원하게 된다. 막부는 우선 사찰이 농민들과 결속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승려의 무장을 해제시키는데, 그 결과 그때까지 봉건 영주화되어 강력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던 불교는 무력을 잃고 국가체제에 예속되게 된다. 또, 막부초기 스덴(崇傳, 1569~1633)과 덴카이(天海, 1536~1643) 등을 내세워 불교의 자유로운 포교, 사원건립, 출가득도 등에 대한 제한을 가하는 한편, 국가권력에 의한 본말사本末寺 제도의 행정체계를 확립하였다. 종파단위로 본사와 말사를 긴밀히 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고, 국가가 공인한 종파의 본산에 소속되지 않은 사찰은 모두 폐쇄되었다. 승려들은 주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종학宗學을 발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에도 막부는 기독교의 전파를 막기 위해 사찰을 이용하는 정책을 편다. 사찰을 통해 개인의 종교 여부를 확인하고 개인의 신상을 사찰에 등록하게 하는 ‘종문개제도宗門改制度’를 실시하였는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불교로 개종하고 사원에 신자로 등록하도록 하여 그 증거로 사찰에서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이후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점차 일반국민에게도 확대되어, 혼인, 여행, 이사 등에도 반드시 사찰이 발급하는 증명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호적제도로서 국민은 누구나 어느 사찰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사찰은 그것을 관리하여야 하는 말단 관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일반 불교도가 보시를 통해 사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사찰은 그 집안의 장례나 종교의례를 담당하는 ‘단가제도檀家制度’도 시행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적 내세관에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죽음과 사후의 문제도 불교가 전담하게 되어, ‘영원천국’과 같은 기독교적 사고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다. 이 시기 조상 제사와 장례에 종사하는 등의 장례불교가 체제화 되었다.
에도 정부는 한편에서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기도 했지만 당시 주자학의 종교성은 불교만 못했기에, 민중은 대체로 불교와 신도에게서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켰고, 불교는 정부 정책에 적절히 이용되었다. 당시의 불교 중심 정책으로 인해 사찰이 신자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은 장례나 제사로 사찰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일본 불교는 급기야 ‘장례불교’(일본어로는 葬式佛敎)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장례불교는 일본 불교의 특징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중략) 일본인의 사생관 내지 장례문화와 관련해 불교를 빼놓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려는 장례식 덕에 먹고 사는 존재라는 볼멘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은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결국 사찰에 맡기고 산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불교는 가장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4
일본불교는 단가제도로 인하여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됐으나 한편으로는 체제 순응적으로 만들어 승려의 관료화와 이에 따른 안일과 타락이 일게 되었다. 기독교를 추방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서 보호했기 때문에 각 종파의 교단조직이 정비되고 교학도 다듬어졌으나 종교적 창의성과 역동성은 없었다.
메이지(明治: 1868~1912) 시대 불교 메이지明治35 시대는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후 메이지 천황이 죽을 때까지의 44년간을 가리킨다. 1867년 명치유신이 일어나자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가 대두되면서, 일본의 국학자들은 신도神道에 의한 교육추진을 선포하고 신불神佛을 분리分離하는 정책을 폈다. 신도와 불교를 분리시키고 불교를 배격하는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불교는 국교적 위치를 상실하고, 배불론자들에 의해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운명을 맞는다. 메이지 정부의 명에 따라 승려들의 대처帶妻도 일반화되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 불교는 자위책의 하나로 더욱 ‘신불일치神佛一致’를 강조하는 한편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대동아大東亞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찬양하였는가 하면, 천황에게 신권神權을 부여하고, 불교적 성왕聖王인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앙쇄신운동이 일어나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서유럽의 근대적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 불전에 대한 연구와 불교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불교는 전반적으로 종파적 성격이 강하고 종파의 개조開祖에 대한 숭배가 성하여 다양한 종파불교가 특징이다. 계율준수의 전통도 사라져 대부분 승려들은 결혼을 하고 사찰들도 대다수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
일본불교의 역사적 특색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종파불교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무로마치 시대에 완전히 확립됐는데, 최징을 조사로 하는 천태종, 공해의 진언종, 법연의 정토종, 친란의 정토신종, 도원의 선종, 일련의 일련종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종파가 다르면 본존불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가람배치 양식, 가사의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독경의 음률까지 틀린다. 이 같은 종파는 1945년 이전까지는 13종 56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3종은 법상종·천태종·임제종·조동종·황벽종·일련종·시종時宗 등이다. 그런데 종전終戰 이후에는 화종和宗·아함종 등 신흥종파가 더 생겨났다. 일본의『종교총감』에 의하면 현재 일본의 불교종파는 7개 계통의 1백 8파에 이르고 있다. 천태계가 20파, 진언계가 43파, 정토계가 25파, 선종계가 23파, 일련(法華)계가 36파, 기타 33파 등이다. 이중 전국에 4천개 이상의 말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는 천태·진언·일련·임제·정토진종 등 8개 종파로 알려지고 있다.36
일본은 근대에 접어들어 폐불훼석이 이루어져 불교가 국교의 지위를 잃고 한때 위기를 맞지만 스님들의 노력과 메이지 정부의 정책변경이 어우러져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우리나라는 폐불훼석이 일찍 이루어져 500년간 지속되는 바람에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몰락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시대 불교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찬란한 문화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고려의 화려했던 불교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우리 불교는 명맥을 잇는데 급급했을 뿐 화석화 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교와 선 모두에서 불교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IV. 일본 선종사 개관
불교 전래 초기 승려는 기본적으로 관승의 신분으로 민간 포교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2세기 말이 되면 그러한 관승의 입장을 버리고 ‘개인’ 구제를 나서는 둔세승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참된 불도의 수행과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기위해 관승 세계로부터 이탈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관승과는 대조적으로 재가신자들까지를 포함한 둔세승 교단을 형성하였는데, 관승이 백의白衣를 입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흑의黑衣를 입었다. ‘흑백양주黑白兩住’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중세에는 흥복사, 동대사 등 다수의 흑백양주 사원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가마쿠라 신불교의 성립을 촉발시킨다.
선종의 전래 선종은 1130년경이 되어서야 알려지게 되지만,37 나라나 헤이안 시대 다른 교종과 함께 이미 들어와 있었다. 도소道昭는 661년 귀국하여 유식학설을 강의하면서도 좌선坐禪에 진력하여, 원흥사元興寺 내에 선원禪院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전국을 다니며 우물을 파고 다리를 놓는 등 사회사업에도 열심이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火葬되었는데, 인도불교의 풍습에 따른 일본에서의 최초의 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최징은 천태종과 함께 법융(法融, 594~657)38의 우두선牛頭禪을 들여왔으나, 이 무렵의 선종은 이른바 천태의 지관좌선止觀坐禪으로, 정토계 염불과 더불어 좌선坐禪이 함께 실천되고 있었던 것으로 선종으로써 독립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 선승의 도래渡來도 이루어져 도선(道璿, 702~760)39이 처음으로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하였고, 마조도일 계열의 의공義空이 남종선南宗禪을 전하였다. 그 뒤 각아(覺阿, 1143~1182)가 송에 가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인 불해혜원佛海慧遠40의 법을 받고 귀국하여 선을 전한다. 다이니치 노닌(大日能忍, ?~?)은 스승에게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제자를 송나라에 파견하여 서면으로 임제종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법을 전수받은 후 ‘일본달마종日本達磨宗’을 개창하였다.41 이때는 아직 일본 불교가 성숙기에 이르지 못해서 선종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교리에 의존하지 않는 선불교를 이해하려면 교학수준이 높아져 불교사상이 성숙해질 시간이 필요하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 송宋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수입되어 새바람을 불러일으키지만 본격적인 선종의 유입은 가마쿠라시대에나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마쿠라 신불교의 성립은 이들 고대 불교인의 사상적 바탕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임제종臨濟宗의 전래 임제선의 개조인 묘오앙 에이사이明菴榮西42는 1168년 처음 중국 송나라로 건너가 천태산과 아육왕산阿育王山을 순례한 뒤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1188년 인도를 순례하기 위해 송에 갔으나 국교 문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태산 만년사萬年寺에서 허암회창虛庵懷敞에게 임제종 황룡파의 선禪을 전해 받는다. 영서榮西는 1191년 귀국 후 가마쿠라 쥬후쿠지壽福寺와 교토에 겐닌지建仁寺를 세우고 일본 최초의 임제종 교단을 수립하였다. 이때는 우리나라에서 신라 구산선문이 쇠퇴한 뒤 보조국사가 정혜쌍수의 선풍을 회복하는 시기로 임제종의 직접적인 접촉은 우리보다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영서는 처음 선원청규를 실시하는 등 임제선臨濟禪을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천태종의 저지운동에 부딪혀 가마쿠라로 쫓겨 가게 된다. 당시 가마쿠라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43가 중앙귀족과 지방무사의 지지를 업고 정권을 장악, 1185년 가마쿠라에 막부정권을 수립한 뒤였다. 황실 중심의 천태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는 새로운 불교인 선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임제선의 자기단련과 간결한 교리체계가 행동적인 무사계급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불립문자를 주장하는 선종의 가르침과 무사도가 상통하는 점도 있었고, 중앙귀족 문화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무사들이 선과 같이 들어온 차 문화 등에도 열광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서는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지은『벽암록碧巖錄』과 함께 극근 선사의 친필로 쓴 ‘다선일미茶禪一味’44의 묵적墨跡까지 함께 가지고 돌아와 선과 더불어 다도茶道도 전파하였다.45 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이틀간 취하여 깨어나지 못하자 차를 권하였다고 하는데, 1191년에는 일본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일본 다도의 비조鼻祖로 받들어 지고 있다. 선은 또 차와 함께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아 떨어져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건축과 회화, 시문詩文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식이 풍부한 승려가 없으면 외교문서조차 작성할 수가 없어 자연스레 파트너십이 형성되었다.
선승禪僧은 종교적인 역할뿐 아니라 외국과의 교섭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외교관과 흡사하였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선사禪寺에는 중국인 승려가 많아, 중국어에 능숙할 수 있었던 이유에서였을 것이다.46
당시 일본은 중국에 갖다오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영서의 제자 엔니 벤엔(원이변원圓爾辨圓, 1202~1280)도 입송하여 임제종 양기파인 무준사범(無準師範, ?~1249)의 법을 받고 1241년 귀국한다. 그는 순수한 간화선보다는 염불, 참선, 천태, 밀교 등 겸수선兼修禪을 가르쳤는데, 이는 아직 순수선純粹禪을 받아들일 토양이 부족한 당시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변원辨圓은 일본 최초로 성일국사聖一國師라는 국사호를 받았으며 임제선을 번성하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에 순수한 임제선을 전파한 이는 중국인 도래승 란케이 도류(蘭溪道隆, 1213~1278)에 의해서이다. 1246년에 건너온 난계도륭蘭溪道隆에 이어 무학조원(無學祖元, 1226~1286),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1247~1317) 등 송 선승도 가마쿠라와 교토의 오산五山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선을 전했다. 일산일녕一山一寧은 무소오 소세끼(夢窓疎石, 1275~1351)의 스승으로 ‘오산문학五山文學’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신치 가쿠신(심지각심心地覺心, 1207~1298)도 보살계를 받고 1249년 입송한다. 무준사범無準師範에게 보내는 변원辨圓의 소개장을 가지고 갔으나 무준사범은 이미 입적한 후여서 그의 제자 치절도충(癡絶道沖, 1169~1250)에게 입문하여 선을 배운다. 선지식을 두루 참알하던 중 1253년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를 만나 문답하다가 대오하게 된다(혜개는 당시 71세). 혜개로부터 인가를 받고 귀국길에 선종서인『무문관無門關』(1228년 간행)을 들고 들어와 겸수선의 법등파法燈派를 일으킨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이때는 이미『무문관』공안을 통한 간화선 수행체계가 확립되어 책과 더불어 점검체계 또한 일본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변원辨圓의 법제자인 대명국사大明國師 무관보문(無關普門, 1212~1291)은 남선사南禪寺를 개창하여 임제선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당시는 천태종에 영향으로 교토에 선찰을 건립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황실과 막부의 후원을 받으며 선종 사찰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또 황실은 경제적인 후원 약속과 더불어 국적, 문벌, 법계에 관계없이 유능한 주지를 선출해 줄 것을 불교계에 당부하였다. 이를 ‘십방주지찰제十方住持刹制,라고 하는데, 이로서 남선사의 주지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7
이 시기 우리나라에도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들어서지만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 간 지속된데 반해, 일본은 약간의 출입이 있었지만 명치유신 전까지 680년간 막부시대를 유지하게 된다. 이는 우리와 다르게 선불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는 한 요인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 빈번했던 중국 선종과의 교류가 급격히 줄어들다 결국에는 단절되고 마는데, 일본은 1185년 가마쿠라 시대 이후 계속해서 중국 선종이 유입되었다.
임제종 대응파大應派 보문普門의 조카이기도 한 난포 쇼묘(南浦紹明, 1235~1308)는 25세에 송에 가서 양기파인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의 시자로 있다 법을 받고 33세에 귀국하였다.48 대응국사大應國師 남포소명南浦紹明은 소후쿠지崇福寺의 개산조이다. 소명紹明의 제자로는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한 대등국사大燈國師 슈호 묘초(宗峰妙超, 1282~1337)가 있다. 그리고 묘초妙超의 제자로는 묘심사妙心寺를 개창한 무상대사無相大師 간잔 에겐(關山慧玄, 1277~1360)이 있었다. 혜현慧玄은 제자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큰 소나무 밑에 이르러 뒷일을 부탁하곤 그대로 선 채 입망立亡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남포소명, 종봉묘초, 관산혜현 3대를 응등관應燈關(大應·大燈·關山)이라고 하고 임제종 대응파大應派라고 불리는데, 이 법맥은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인 하쿠인 에카쿠(白隱慧鶴, 1685~1768)를 거쳐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임제종의 정통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날 선불교가 여러 번의 엄청난 폐불 사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번창하고 있는 것은 선종 초기 산에서 밭을 일궈가며 철저히 수행했던 조사들의 노력 덕분이다. 일본도 선종 초기 2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막아낼 정도로 수행력이 뛰어났으나, 에도막부시대 단가제도와 사원제도로 인하여 부와 권력이 개입하게 되자 선이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임제종 대응파 계통인 대덕사파大德寺派와 묘심사파妙心寺派는 교토에 위치하면서도, 권력을 멀리하고 순수선을 지킨다. 황실이나 막부의 외호를 받는 오산파五山派에 속하기를 끝내 거부하여 이들을 ‘임하林下’라고 하는데, 특히 묘심사파는 오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세를 큰 수입원으로 하던 막부와는 관계가 좋지 않아서, 오에이노應永의 난49(1339년)을 계기로 일시 폐사되기도 하는 등 수난을 겪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 순수성 때문에 지금은 임제종을 대표하는 총본사를 유치하고 있으며 전국에 3,600여개 넘는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24류의 일본의 임제선도,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다만 ‘대응파大應派’라고 하는 하나의 유파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도쿠가와 시대에 없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대부분의 선승은 가마쿠라․무로마치시대에 막부의 두터운 외호를 받아, 송나라의 오산五山을 모방하여 개창된 이른바 ‘오산의 관사官寺’에 주지로써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선림의 생활이 점차로 문화적인 공간이 되어, 가장 중시되어야 할 좌선수행이 경시되어 선승으로써의 힘이 약해져갔기 때문이다. 대응파(대응국사 南浦紹明, 1235-1308)의 선종은, 대등大燈국사(宗峰妙超, 1282-1337), 무상대사(關山慧玄, 1277-1360)의 계보로 확실히 전수되어, 후에 도쿠가와 시대 중기에 이 대응파에서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이 나와 독특한 공안선을 확립하고, 이것이 오늘날의 일본 임제선이 되어 발전한 것이다. 이 묘심사妙心寺를 기점으로 하는 일파는 ‘응등관(應燈關의 一流)’이라고 불리어, 오산의 관사로써의 대우를 받는 일 없이, ‘산린파山隣派’로써 고담청빈枯淡淸貧의 생활에 만족하며, 오로지 좌선수행에 매진하였기 때문에, 반대로 그 명맥을 잇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통에서, 생각지도 않게 ‘5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인물’로 불리며, ‘일본 임제선 중흥의 시조’로 추앙받는 백은혜학白隱慧鶴이 나온 것이다.50
백은선白隱禪의 완성 일본은 송대 간화선이 전파된 이후 이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간다. 성일국사 원이변원은 선의 종지를 이치, 기관, 향상으로 구분하여 공안수행의 단계를 상정하였는데,『성일국사어록聖一國師語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禪人에게 말한다. 佛祖가 출현하신 이래, 理致가 있고, 機關이 있으며, 向上이 있고 向下가 있다. (중략) 卽下에 佛祖의 理致, 機關을 넘자, 이른바 부처님의 理致를 넘고, 가시나무 숲을 통과하고, 祖師의 機關을 넘어서, 銀山鐵壁을 투과해야 비로소 向上의 本分이 있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51
이것이 선을 이치, 기관, 향상으로 구분한 가장 빠른 예이고,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대응국사 남포소명은『대응국사법어大應國師法語』에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종宗에는 삼중三重의 의義가 있으니, 이른바 이치, 기관, 향상 이다. 먼저 이치라고 하는 것은, 여러 부처의 설법 및 조사가 보여주는 바(所示)의 심성 등의 이론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부처, 조사祖師가 진정한 자비를 드리우는(垂)것으로서, 이른바 코를 비틀고 눈을 깜빡이는(瞬), 즉 말하자면, ‘진흙 묻은 소(泥牛)가 하늘로 날아, 石馬水에 들어간다’등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향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직접 한 설법, 여러 법의 실상 등, 이른바 ‘하늘은 이 하늘, 땅은 이 땅, 산은 이 산, 물은 이 물, 눈은 이 옆(橫) 코는 이 앞(直)’ 등이 이것이 될 것이다.52
이어 무소우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도 그의『몽중문답夢中問答』에서 이치와 기관에 대해 문답하고 있는데, 이들은 공안公案으로서 채용되었던 고칙 화두를 크게 나누어, 불조가 설법한 말에서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理致)과 견성오도한 조사들의 일상의 작용에 의미를 추구하는 것(機關), 그리고 그들을 해결한 다음 현실생활의 가운데에서 법을 보는 것(向上) 등의 세 종류로 나누었다. 이후 일본에서 여기에 맞는 독자적인 공안집이 편집되는 등 공안 참구가 널리 행해졌다는 것은 이미 앞 장에서 밝혔다.53
이 이론은 다음 백은에 이르러 일본 임제종 ‘오문五門’의 공안수행체계로 완성되는데, 대응의 3문(理致, 機關, 向上)에 2문(言詮, 難透)를 가중하여 법신, 기관, 언전, 난투, 향상의 5문五門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더욱이 최후 결전으로서 ‘말후末後의 뇌관牢關’까지 배치하였다. 견성을 목적으로 한 수도修道와 견성후의 수도를 구분하여 명확하게 구분하는 등 체계화한 것이다.54 백은은 에도시대 중기 임제종을 고쳐 세우고, 간화선 공안 수행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여 ‘근세 임제종 중흥조’라 불린다.
白隱은 근세 사람답게 선의 수행방법에 있어서도, 그때까지 없었던 합리적인 방법을 창출하였다. 그것이 공안(公案)의 체계화라고 하는 것이다. 선의 수행과정에 커리큘럼을 설치하고, 이에 따라 하나하나 계제를 올라, 드디어 견성경험으로 이끄는 방법은, 조동종으로부터 ‘제자선梯子禪’으로 과소평가되었다. (중략) 도쿠가와 시대 중기가 되면, 오산의 중림은 문화생활에 빠져, 선종의 법파를 이을 자가 없어져, 서로가 교체로 회장을 잇는 ‘연환 결제’라고 불리는 결제 안거를 개최하였지만, 그 지도자 측에 해당하는 종사가宗師家조차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관산파에서 사가를 초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중세에는 오산의 관사였던 교토나 가마쿠라의 선종 사찰이 지금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 경내의 한쪽 구석에 있는 전문도장의 사가는, 어느 한 곳 빠짐없이 白隠 밑의 공안선의 법계인 것은 정말로 얄궂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55
현재 일본 임제종의 승당수행은 모두 백은의 공안선이다. 그러나 일본의 임제종교단에는 전체를 총괄하는 하나의 본산은 없고 14派의 대본산56이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 생겨난 선사禪寺가 각각의 문류門流를 형성하고, 그것이 본산이 되어 말사사원末寺寺院을 총괄하는 형식으로 일파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등의 경우와 다르게, 수행자는 사가를 선택하여 특정의 승당에 입문하면, 마지막까지 그 한 명의 스승(참선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밑에서 수행하며, ‘남순동청南詢東請’이라고 하는 떠돌며 행하는 수행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지의 승당에 출입하는 자는, ‘전석자轉錫者’라고 하여 수행승들 사이에서 비판받게 된다. 이점은 중국선의 정신을 잃은 일본임제선의 결점이 아닌가 생각한다.57
덧붙여 종달 이희익 노사님은 이 계열의 묘심사파 법맥을 이으셨는데, 1925年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 경성별원京城別院에 출가하셨고, 노사님의 스승인 화산대의華山大義 선사는 묘심사파 경성별원 주지와 남선사파南禪寺派 관장管長58을 지내기도 하셨다.
조동종曹洞宗의 성립 조동종曹洞宗은 일본 선종의 하나로 임제종·황벽종과 함께 선종 3파를 이루고 있다. 개조인 도겐(희현도원希玄道元, 1200~1253)은 14세에 계를 받고 비예산에서 천태학을 공부한다. 도원道元은 당시 연력사의 주류 사상이었던 천태종의 ‘천태본각사상’에 의문을 품는데, 본래부터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면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건인사 명암영서의 제자가 되는데, 영서의 입적 후에는 영서의 법사인 묘젠(불수명전佛樹明全, 1183~1225) 문하에서 9년 동안 삼장과 현밀을 두루 공부한다. 당시 건인사는 천태, 진언, 선을 겸수하고 있었는데, 명암영서가 구불교의 비판을 두려워해 밀교를 함께 익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선종의 시작을 일본에 조동종 묵조선黙照禪을 전한 도원으로 보기도 한다. 도원은 24세 때인 1223년에는 명전과 더불어 입송하여 천동산天童山 경덕선사景德禪寺에서 임제종 대혜파인 무제료파無際了波의 문하에 입문하여 선을 배운다. 이후 구도의 길에 올라 여러 곳을 순례하다 돌아오니 조동종 운거파雲居波 장옹여정(長翁如淨, 1163~1228)이 무제의 뒤를 이어 경덕선사의 주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여정에게 입실을 허락 받고 더욱 철저히 수행하여 인가를 얻는다. 이후 여정의 문하에서 2년간 더 오후悟後 수행을 한 후, 1227년 27세의 나이로 귀국, 일본 조동종의 개조가 된다. 도원은 초기 영서의 문하에서 임제선을 배웠으나 송에 가서는 조동선을 수선하는데, 그래서인지 순수선을 주장하였지 종파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돌아와 건인사에 머물면서 좌선이 가장 뛰어난 수행법이라는『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를 저술한다. 이듬해인 1231년에 찬술한『판도화辦道話』에서는 겸수兼修를 부정하고 오로지 좌선만 하라는 ‘지관타좌只管打坐’와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수증일여修證一如’를 설파한다. 본래 부처이므로 다시 또 수행이 필요 없다는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한 것이다. 즉, 수행이 성불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바로 성불이라는 그래서 여전히 수행은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59
수행과 깨달음을 하나가 아닌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외도의 가르침이다. 불법에서는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수행이란 깨달음 분상의 수행이기 때문에 처음 발심이 곧 본래의 깨달음의 전체이다. 이러한 뜻에서 수행으로 정진해도 수행이외의 별다른 깨달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수행하는 바로 그 자리에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이 곧 깨달음이기 때문에 깨달음에는 끝이 없으며, 깨달음이 곧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에도 시작이 없다.60
한 시간을 앉으면 한 시간 동안 부처를 닮아가며 두 시간을 앉으면 두 시간 부처가 된다고 하는, 그래서 실제로 평생 앉아 있을 수 있다면 평생 깨달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좌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원의 선은 밀교와 선의 겸수선이 유행하고 있던 당시 일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포교를 단념하고 교토를 떠나 에이헤이지永平寺로 들어가 칩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쓴다. 그곳에서 도원이 1239년부터 1243년 사이에 찬술한『정법안장正法眼藏』45권은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명작이다.『정법안장』에는 선뿐만 아니라 교학적인 측면이나 선종사원의 수행과 생활청규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흘러가는 물도 함부로 쓰지 마라’는 근검절약의 정신을 강조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영평사 시절 수행과 포교는 재가자의 교화보다는 출가 중심의 산중수행불교였으며, 출가하여 좌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출가주의 경향을 보인다. 1244년 2월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출가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이나 깨달음에의 길을 올바르게 계승한 이는 이제껏 한 사람도 없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을 올바르게 전해 받은 예가 없다. 어떤 남자나 여자도 일반 재가자 그대로 수행하여 불도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선례가 없다. 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는 모두 출가한 사람뿐이다. 출가하지 않고서 어떻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할 수 있겠는가?61
일본 조동종은 도원의 순수선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본 조동종의 태조라고 불리는 게이잔 죠킨(영산소근瑩山紹瑾, 1268~1325)에 이르러 도원선의 민중화를 이루고 교단을 중흥시킨다. 도원도 여성의 출가와 수계에 힘썼는데, 소근紹瑾도 어머니 에칸니懷觀尼의 유언을 받들어 여인구제에 힘써 여러 개의 비구니 사찰을 세운다. 소근은 1321년 진원종의 율원인 제악사諸嶽寺의 주지 정현에게 영접되어, 이 절을 선원으로 바꾸고 이름을 소지지總持寺라고 고쳐 개산 첫 주지가 된다.62 총지사總持寺는 무라마치 시대 도원의 영평사永平寺와 함께 조동종의 총본사가 되었으며, 출가자 중심의 영평사 세력을 압도하였을 뿐 아니라 조동종의 교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 문하에서 많은 걸출한 승려들이 나와서, 교단이 전국적인 발전을 거두어 사원수 17,000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종파로 성장하였다.
선종은 무사들과 밀착하여 발전하였다. 임제종은 교토를 중심으로 막부의 신망과 외호로 전파되었고, 조동종은 지방의 무사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넓혀간다. 임제선은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의 지배층에 세를 가진 반면, 조동선은 지방의 영주 층, 하급무사 그리고 농민 등 피지배층에 퍼져나가, ‘임제장군臨濟將軍, 조동사민曹洞士民’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63
오늘날에는 “인물人物의 임제, 조직組織의 조동”이란 말이 있는데, 임제종에서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그 맥을 잇고 있는데 반해 조동종에서는 조직을 통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조동종은 도원이후 그와 비견 되는 제자들이 없어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요사이 교세를 다시 확장하고 있는데, 도원의 철저한 수행정신이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고 그가 만든 엄격한 ‘영평청규永平淸規’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64
선의 영향과 오산문학 막부의 적극적인 선종 수용은 정치적으로도 나타나 일본은 2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선의 힘으로 물리치게 된다. 쇼군의 섭정이었던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65는 일찍부터 중국 선사인 난계도륭蘭溪道隆과 대휴정념(大休正念, 1215~1289)을 초청하여 참선을 배웠고, 1282년에는 송의 선승인 무학조원無學祖元을 초빙, 엔가쿠지円覺寺를 건립하였다. 북조시종北条時宗은 중국 선사들로부터 원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선 수행을 바탕으로 “주종관계를 맺지 않으면 일본을 공격하겠다.”는 원의 위협을 대담하게 물리치고, 해안에 성을 쌓는 등 몽골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여 몽고군을 두 번이나 막아내었다. 이를 두고 일본 학자 죽내도웅은 일본 선종사 뿐 아니라 삼국 선종사 전체로 보아서도, 국가 비상시 선이 이토록 훌륭하게 발상된 경우는 유래가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지리적인 이유가 컸겠지만, 일본 무인정권은 선을 바탕으로 총력을 기울여 몽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반면, 우리나라는 삼별초만이 끝까지 몽고에 대항하였을 뿐 몽고침략을 교종인 팔만대장경의 주조로 대응한 측면이 있다.
그와 동시에, 원구元寇의 일본 침략이라는 국난에 직면해있던 가마쿠라막부의 쇼군들은, 엄격한 좌선수행에 의해 담력을 단련하고, 깨달음에 의해 망상을 불식하며, 무심無心하며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임제 쇼군’이라고 평가되는 강한 임제선을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다.66
중국 송대에는 사대부가 높은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선종사상 문헌 정리 및 주석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선림의 게송이나 어록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였다.67 이들 전통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오산파 선승들에 의한 하나의 문학형태인 오산문학五山文學을 출현시킨다. 차이라면 과거제가 없는 일본은 선을 바탕으로 한 선승들이 송대 사대부의 역할까지 도맡아 모든 면에서 선향이 물씬 배어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다방면으로 전파되어 문학, 예능, 수묵화, 건축, 정원, 다도, 화도 등 생활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었고 고도의 생활문예로서 일본사회에 정착하였다. 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신문화는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한다.
대덕사 주지를 지내기도 한 잇큐 소준一休宗純68은 오산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27세 때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았지만 이미 형식화되어 버린 인가증을 태워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고 여색을 즐기는 등 무애행을 실천하며 살았다. 시인이면서 서도가이자 화가였던 그가 오산문학과 예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데, 그는 마치 오산문예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다. 많은 오산문학도들이 모여들었고 다도, 문학 등 다양한 제자들을 두었다. 그는 자기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정토진종의 렌뇨蓮如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와의 일화는 재기발랄한 서민의 친구였던 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번은 또 어떤 사람이 한 화가로부터 말을 그린 그림을 받아서 잇큐에게 찬讚을 청했다. 그러자 잇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인 것 같다.” 라고 써 주었다. 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화를 내고 돌아갔는데, 그것을 다시 렌뇨에게 가지고 가서 어떻게든 잘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렌뇨는 잇큐의 글 다음에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런 것 같다.” 라고 썼다. 그 사람은 마침내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그 그림은 점점 유명해져 나중에는 천하의 명보名寶가 되었다.69
가마쿠라시대 이후 일본에 선이 전파된 횟수는 총 46회였고, 이중에 법맥이 이어져 일본에 뿌리내린 종파는 24개 파라고 한다. 이중 유학승에 의한 것이 11개 파이고, 도래승에 의한 것이 13개(임제종 10개, 조동종 3개) 파이다. 이들이 일본선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어 선종의 기본적인 성격은 도래渡來불교이다.70 그 중 일본의 임제선은 유학승에 의한 능동적인 선과 도래승에 의한 수동적인 선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데, 전자는 겸수선의 성격을 띠고 후자는 순수선의 성격을 가졌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일본선의 황금기를 현출하였다.
가마쿠라시대부터 도쿠가와 초기에 걸쳐, 일본의 유학승과 중국 승려에 의해, 송 ․ 원 ․ 명에서 일본에 전해져 온 선종은, 46명의 선종 승려들에 의해 전해져, 이 중 사법嗣法의 제자가 생겨, 법손法孫이 유파를 형성한 것이 23유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24류, 46전’이라고 한다(도쿠가와 초기의 석반인자선술釋半人子選述『24류종원도기24流宗源圖記』에 기초). 이 46전의 선종 가운데, 希玄道元(1200-1253), 東明慧日(1272-1340), 東陵永璵(?-1365)이라는 조동선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선승은 모두 임제선의 법맥을 잇는 사람들뿐이다.71
일본에 도래승이 많이 유입되어 선종이 대량 전파 된 데는 정치적인 측면이 큰데, 중국에 원나라가 들어설 때는 갈 곳이 없어진 남송 승려가 지리적으로 안전한 일본에 유입되었고, 명의 몰락과 더불어 명의 승려도 유입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고려승과 불교의 인적 물적 자원의 유입도 이루어진다. 에도시대에는 명나라의 은원융기(隱元隆琦, 1592~1673)가 일본불교계의 간절한 청원으로 일본에 건너와 황벽종의 개조가 되는데, 그가 머물렀던 황벽산 만복사는 이후 중국 선승을 주지로 초청하는 관례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도 하였다.
선종의 근대화 근세에 들어 서구열강에 유약하게 대응한 막부가 무너지고 명치천황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발전한 선종은 또한 막부와 더불어 추락하게 된다. 반막부 세력은 명치明治 원년인 1868년 3월 17일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선언하면서 신불분리神佛分離를 법제화하였으며, 28일에는 신사에서 불상이나 불교적인 요소를 추방하였다. 신도를 국교화하고 천황을 신격화하면서 일본 선종은 폐불훼석으로 30% 이상의 사원이 파괴되었다. 토지는 환수되었으며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대법난을 겪게 된다.
명치 5년 1872년에는 승려의 결혼, 유발 등을 자유화하는 포고가 있어 이를 계기로 재가불교로서의 근대불교가 시작되었다.72 우리가 일본불교하면 대처를 연상하는데 이는 명치이후의 변화이다. 명치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일본불교도 한국불교와 마찬가지로 계를 지키는 비구들의 불교였다.
일본 불교계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여 이후 승려들의 잘못된 폐단과 구습을 쇄신하자는 불교부흥운동이 일어나, 체재정비와 교육기관의 설립 등 근대화를 추구해 나가게 된다. 서유럽의 근대적 불교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 산스크리트, 팔리어, 티베트어 불전에 대한 연구와 불교사의 연구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서양의 근대교육을 배경으로 종문宗門학교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조동종은 1876년에 설립된 동경의 조동종 청송사靑松寺에 있던 전문학교가 1905년 조동종대학으로 되었고, 임제종은 1903년 화원학림花園學林이 설립되고 이어 1911년에는 임제종 대학(현재 화원대학花園大學)으로 되면서 서양의 인문과학처럼 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73
일본불교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교학에 대한 연구 열의와 성과다. 에도시대 이후 종학宗學불교의 발달을 바탕으로 각 종파가 세운 4년제 대학은 10여개가 넘고 있으며 2년제 단기대학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불교학자의 숫자도 많아 대학의 강사급 이상으로 구성된 인도학·불교학회 회원은 3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명치 이후 아카데미즘을 도입한 일본은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불교 종주국이 되었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일본은 기회 있을 때 마다『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기록이 나오는데,74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축쇄장경縮刷藏經』을 간행한다. 그리고 대정大正연간에는 거의 모든 경전들을 망라한 지금 세계적인 정전으로 불교학계에서 활용되고 있는『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펴냈을 뿐 아니라, 1935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팔리어 경전을 일본어로 번역한『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을 간행하였다. 경전 간행뿐만 아니라 불교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석지현 스님이『벽암록』해설서를 쓰면서 “주석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고 일본에만 집중적으로 있는데 50종이 넘는다”고 하였을 정도다. 몇 년 전 KBS에서는 중국 남종선의 원천을 제공한 정중무상에 대한 프로「禪의 황금시대를 열다, 신라승 무상」을 방영하였다. 이 프로는 마조도일이 무상 선사의 제자라는 설과 무상 선사가 중국의 오백 나한에 올라있다는 사실들을 소개하였다. 오백나한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고승인 지장, 혜능 등은 보이지 않는데, 달마 대사와 무상 선사만이 오백 나한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75 전등을 중시하는 선종의 전통에 따라 선종사를 다시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돈황 문서 속에서『무상어록無相語錄』이 발견된 1930년대부터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과 일본 동경대 교수였던 야마구찌山口瑞鳳 등 외국 학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 불교 연구는 일본에서 나온 책이나 논문 소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불교의 세계진출 일본 불교가 처음 서구에 알려진 것은 1870년대 일본 노동자의 미국 유입으로부터다. 이민이 늘어나면서 미국 내 사찰은 하나의 사회단체 역할을 하게 되는데, 최초로 불교 전도가 본격화 된 것은 진종 본원사로 1889년 하와이에 ‘불교전도본원佛敎傳道本院’을 설치하면서 부터이다.
미주에서의 불교사상, 신행 불교전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처음으로 수행한 종파는 임제종이다. 1893년 열린 시카고 ‘세계만국박람회World Fair’와 함께 개최된 <세계종교의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에서인데, 그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한 임제종 묘심사파 선승 샤쿠 쇼엔(釋宗演, 1859~1919)과 그를 수행한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76의 활약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 종교의회에서 폴 케이러스(Paul Carus, 1852~1919)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일본 불교의 미주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샤쿠 쇼엔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포교의 흐름을 역전시키려고 하였고, 폴 케이러스는 이에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77 폴 케이러스는 불교에 흥미를 갖고 “오픈코트Open Court”라는 출판사를 만든다. 그리고 그는 쇼엔에게 불교 관련된 출판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한문과 영어에 통달한 불교 학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그 때 쇼엔이 추천한 인물이 스즈키 다이세쓰였다. 케이러스는 그의 도움으로『부처님의 복음The gospel of Buddha』이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이 책은 일본의 자긍심을 높이고 일본 불교의 보편성을 세계에 표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또한 서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어를 비롯한 동양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서양을 통한 동양불교의 이해의 전형이 되었다. 폴 케이러스의 서구적 불교학에서의 전환과 샤쿠 쇼엔의 동양 불교로서의 대승 불교의 서구 전파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불교 전반에 있어 해외 진출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서구인들은 불교 하면 먼저 일본의 선Zen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스즈키 다이세쓰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이래 서구의 주된 관심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 = 小乘)든가, 내지 티벳이나 몽고의 라마교에 향하여졌지만 최근에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불교가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에 있어서의 불교는 모두가 이 종교의 한쪽 면만을 전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에서는 불교의 거의 모든 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위에 근대화한 일본에 옛 종교가 현재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 서구인에게 있어서는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하여 지금은 일본불교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78
1990년대 후반 구라파 국가들의 불교 현실을 말해주는 자료로 선도회 서명원 신부의 논문을 인용한다. 현재 서구 구라파에는 수많은 불교단체와 선종 종단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그중 선종 관련하여 가장 큰 규모의 세 교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중 삼보교단三寶敎團79이 주의를 끈다.
이 세 교단들 가운데 첫째는 曹洞宗의 Kōdō Sawaki(1880-1965)의 제자인 Taisen Deshimaru(1914-1982)가 창설한 것이다. 그는 1967년도에 파리에 도착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1970년도에 Association Zen Internationale(AZI-國際 禪 協會,)80의 前身인 Association Zen d'Europe(유럽 선 협회)를 창설했다. 1979년도에는 la Gendronnière (Loir-et-Cher)라는 넓은 땅을 확보하여 歐羅巴에 첫 번째 寺刹을 건립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수천 명에 이르며 歐羅巴의 도처에서 백여 개의 禪院을 설립하였다. 지금 AZI는 전 세계에 200여 개의 禪院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일본에서 소수교단인 臨濟宗과 曹洞宗의 法脈을 이어받은 Harada Dauin Sogaku(1871-1961)81의 제자 Hakuun Yasutani (1885-1973)82가 창설한 가마쿠라학파에서 기인한 三寶敎團83이다. 이 교단은 다른 교단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西洋 사람들에게 佛敎에 改宗할 것을 처음부터 요구하지 않았으며,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看話禪 修行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둘째는 이렇게 누구나 쉽게 看話禪 修行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개신교 목사, 가톨릭교 신부와 수녀뿐만 아니라, 유대교 랍비와 일반인들도 이것을 배워 歐羅巴나 아메리카 등의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三寶敎團의 分派를 설립하였다. 셋째는 1970년도에 틱낫한 스님(1920- )이 전파한 베트남식 大乘佛敎의 禪修行(Thiên)이다. 그는 西洋 곳곳에 禪修行 모임을 시작한 이후 1982년도에 프랑스 Village des Pruniers(Dordogne)에서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禪修行 모임, l'Ordre de l'Inter-Être(相關的 存在會)84의 중심지를 만들어 歐羅巴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85 현재 歐羅巴에 있는 위 세 가지 傳統에서는 修行者 숫자가 거의 동일하다(대략 3만 명 정도). 그러나 오직 일본에서 온 三寶敎團만이 대략 1만 5천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看話禪 修行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이 看話禪 修行을 가르치는 다른 宗團들(일본의 臨濟宗이나 韓國의 숭산86 法脈 등)이 있기는 하지만, 三寶敎團에 비한다면 데시마루와 틱낫한이 창설한 수도 단체와 마찬가지로, 看話禪 修行者의 수가 적어서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87
선도회의 오늘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선종사를 대략 살펴보았는데, 중국 선종형성기에 신라 승들의 활약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한국 선종이나 일본 선종이나 모두 중국 선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조계종이 중국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에서 비롯되었지만 중국 임제종이라고 하지 않듯, 선도회 간화선이 일본 임제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일본선은 아니다. 결국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떤가,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처음 시작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연하자면 선도회 간화선은 가까이는 일본 임제종 수행체계를 가져왔고, 멀리는 중국 당 송대 확립된 임제종 수행체계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일찍이 일본 임제종 수행체계를 접한 숭산 노사님이 그 수행체계를 응용하여 평상심시도의 화두 경계를 확립하셨고, 그 ‘실용’의 경계가 접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선도회는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화두 경계에 있어서는 법경 법사님 대에 이르러 숭산 노사님의 화두 경계까지를 수용, 화두 경계의 지평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참고한 책과 글
1)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15. 저자는 전래 연대에 대해 자세한 논의를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2)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p. 33.
3)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 『일본불교日本佛敎』 pp. 80~81.
4) 602년에도 백제에서 관륵觀勒이라는 승려가 달력과 천문, 지리에 관한 책을 전하였다. 그리고 610년에는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건너갔다. 담징은 불교뿐 아니라 유교에도 통달한 고승으로 물감, 종이, 먹 등을 만드는 기술도 전했다. 물레방아도 담징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5) 17조의 헌법 가운데는 ‘깊이 삼보三寶를 받들라’는 내용도 있는데, 삼보란 첫째가 부처, 둘째가 부처의 가르침, 셋째가 불법승이다. 일본의 고유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유불사상을 조화하고 군신의 길 및 인민이 지켜야 할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6) 돈황 막고굴에서『승만경의소勝鬘經義疏』의 동종본이 발견되어 다른 두 경도 중국에서 찬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7) 위치상으로 보아 산신각이 상위, 불당이 중위, 장승이 하위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가람의 삼중구조는 상당으로 관념되는 산신당, 중당으로 관념되는 서낭당, 하당으로 관념되는 장승과 솟대의 삼중구조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 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당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융화되어 사원 내에 존재하며 현세구복, 기복 불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8) 삼론종三論宗은 중관파 용수龍樹의『중관론中觀論』과『십이문론十二門論』그리고 제바提婆의『백론百論』등 삼론을 근거로 삼은 종파이다. 일체의 모든 사물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공空사상을 설한다. 625년 고구려의 혜관慧灌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는데, 혜관은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을 가르쳤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길장에 의해 대성되었으나 얼마 안가 쇠퇴하였는데, 일본에도 가장 빨리 전래 되었으나 금방 뒤쳐진 것으로 보인다.
9) 성실종成實宗은 구마라집이 5세기 초경에 번역한 하리발마訶梨跋摩의『성실론成實論』을 소의논서로 하여 생긴 종파이다. 부파불교의 논저이면서 공空을 설파하여 삼론종의 기초학으로서 학습되었다. 712년 백제의 도장道藏이 일본에 와『성실론』을 가르침으로써 비롯됐으며, 나중에는 삼론종에 통합됐다.
10) 구사종具舍宗은 유식파唯識派 세친(Vasubandhu, 320~400년경)의 저작으로 현장이 한역한『아비달마구사론』에 근거한다. 일체는 유有라고 설하여,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행위이고 행위의 근원에는 심적 작용이 있고 선善의 실현은 무아의 체험이라고 한다. 유식파를 전승한 법상종에 통합됐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31)
11) 간고지元興寺와 다이안지大安寺에 선종 선원이 있었다.
12)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사견邪見이나 사도邪道를 깨어 버리고 정도正道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릇됨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13) 유식사상唯識思想에 기초한 불교 종파. 우주 만물의 본체보다 현상을 세밀하게 분류하고 분석하는 입장을 취하며, 온갖 만유는 오직 식識이 변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파악한다.
14) 도소道昭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공헌한 승려이다. 나라奈良에 있는 큰 사찰인 원흥사元興寺에서 승려로 있다가 653년경에 중국으로 건너가, 유식종唯識宗의 창시자인 현장玄藏의 문하에서 8년 동안 수학했다. 이 종파는 인도의 요가카라(비이나나바다라고도 함)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세계는 정신의 표상에 불과하다는 사상을 강조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현장의 교리를 소개했고,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법상종法相宗을 일본에서 창시했다. 한편, 도소는 원흥사元興寺 내에 선원禪院을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약 10년 동안 일본 전역을 순례하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5)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대승불교 유식학파의 핵심 개념이다. 모든 법의 종자種子를 갈무리하고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 의식으로,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이나 잠재력을 말한다. 아뢰야식은 과거 행위의 온갖 잔상殘像을 저장하는 훈습薰習(vāsanā) 작용을 하며, 그 잔상들이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을 형성하고, 그 결과로 이루어진 미묘한 힘, 곧 환幻(maya)이 실제로는 관념의 작위에 불과한 범주들을 창조해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 환이 차별의 세계를 뚜렷하게 고착시키고 개체적 인간의 본성을 형성해 나와 내가 아닌 것의 분별이라는 도착된 관념을 산출한다. 이러한 왜곡된 이중성은 오로지 깨달음(bodhi)에 의해서만 극복되며, 그러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곧 붓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리 마음의 제8식 아뢰야식에는 우주의 1세대부터 4세대까지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고 한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 제9식은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다.
16)『사분율四分律』은 출가한 승려가 불법을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계율을 모아 엮은 불교의 경전이다. 석가가 죽은 지 백 년 뒤에 다르마굽타Dharmagupta가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가운데 자기 견해에 맞는 것을 네 번에 걸쳐 모은 책으로 모두 60권이다. 불교의 경전은 3장三藏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진리, 즉 법에 관한 말씀을 모은 것을 경장經藏이라 하고, 제자들(불교도)의 행동 규범에 관한 내용을 모은 것을 율장律藏이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대 제자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요약 정리한 것을 논장論藏이라고 한다. 율장은 불교도의 규범에 대한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주로 출가자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이러한 율장은『사분율四分律』『오분율五分律』『십송율十誦律』『해탈율解脫律』『마하승기율摩言可僧祈律』의 오부율로 나뉘어 있다.
17) 김용옥,『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1989.
18) 중국 불교 십삼종十三宗의 하나.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가『법화경法華經』을 근본 교의敎義로 하여 처음 세운 종파이다. ‘천태종’이라는 명칭은 6세기의 승려로서 이 종파의 실질적 개조이며 위대한 설법자였던 지의가 거주하며 가르침을 폈던 중국 동남부의 산에서 유래한다. 이 종파의 기본경전은『법화경』이며, 이 때문에 ‘법화종’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태종의 기본적인 교의는 ‘삼제원융三諸圓融’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데, 첫째, 모든 현상은 존재론적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공空의 진리,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임시적으로는 존재하고 있다는 가假의 진리, 셋째, 모든 현상은 비실체적이며 동시에 임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첫째와 둘째의 진리는 포용하면서도 초월한다는 절대적인 중中의 진리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진리는 각각 다른 두 진리를 서로 포용하며 각각은 나머지에 이미 속해 있다고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 세계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동일시한다. 삼제원융의 가르침은 북제北齊 혜문慧文의 가르침이지만 천태종의 창립에 크게 공헌한 인물은 제3대 지의이다. 지의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당시에 이미 불교의 온갖 교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며 다만 듣는 이들의 정신적 자질에 따라 점차적으로 펼쳐내었다고 전제하고, 이러한 전제에 의거하여 불교 경전 전체를 체계화했다. 그 가운데『법화경』을 석가모니의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는 최고의 교리서로 간주하였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천태의 사상은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을 수용하고 있으나, 화엄이 ‘일즉다’를 강조하는데 반해서 ‘다즉일’을 강조하므로써 많은 교법들을 하나로 귀일시키는 일원론적 성향을 보였다.
19)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p.35.
20)「천태사상의 역사와 전통」, 레포트 월드에서 인용.
21)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p. 68.
22) 불교의 흐름이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는 사상. 시대를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셋으로 구분하고, 석가의 입멸入滅 후 천 년 또는 천오백 년, 혹은 이천 년 후에 말법의 시기가 오면 불법佛法이 쇠퇴하여 사회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여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고 특별한 수행을 할 것을 권고하는 사상을 통틀어 이른다.
23) 가마쿠라(鎌倉: 1185~1333)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봉건주의의 기초가 확립된 시기이다. 보통은 1192년 일본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에 막부幕府를 세운 때부터 1333년 호조 다카도키北條高時가 멸망할 때까지의 무인 집권 시기를 말하는데, 가마쿠라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 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던 것은 1192년이지만, 요리토모가 헤이케 타도를 위해 거병한 1180년 설, 1183년 요리토모가 조정으로부터 하사 받은 교지로 도카이도 도산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1183년 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축출을 명목으로 지토(공유지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한 관료의 관직)의 설치권을 획득한 1185년 설, 요리토모가 상경해 곤노다이나곤 겸 우근위대장에 임명된 1190년 설, 일부에서는 1196년 설을 제창하는 등이다. 무사계급이 일본 천황, 귀족계급과 분리된 새로운 지배체제인 봉건정치는 막부가 막을 내리는 1868년까지 계속된다.
24) 하이쿠俳句는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일컫는 말이다. 하이쿠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보기 드문 짧은 시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대중 시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전통적인 하이쿠는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季語가 필히 있어야 하며 짧은 시의 형태인 만큼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레지切字라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계어는 계절을 상징하는 시어를 가리키는 말로, 특정한 계절을 환기시키면서 오랜 일본시가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미의식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절자는 5, 7, 5 음율의 어느 한 단락에서 끊어줌으로써 강한 영탄이나 여운을 줄 때 사용하는 표현을 지칭한다. 예컨대 『∼や(∼이여)』『∼かな(∼로다)』『∼けり(∼구나)』와 같은 것이다.
25)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p. 111.
26)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 『일본불교日本佛敎』pp. 70~71.
27) 일본의 경우 처음에는 국가불교였지만, 국가불교의 통제를 벗어나는 사도승이나 히지리聖, 그리고 둔세승이 존재하였다. 관승은 ‘승니령’에 의해 민간 포교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허락 없이 개인적으로 출가를 감행했던 승려를 사도승私度僧이라고 하고, 이들이 민간에서 불법을 널리 펴고 고난에 처한 민중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벌이게 되자, 그런 분들을 민중들은 ‘저자거리의 성인’이라는 뜻에서 ‘이찌 히지리市聖’ 혹은 줄여서 ‘히지리聖’라고 불렀다. 그리고 수행과 전법보다는 천황의 양재기복에 머물고 있는 관승을 탈피하고자 하는 이들을 둔세승이라고도 불렀는데, 초기에는 관승교단에 몸담았다가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재출가再出家한 스님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후에는 처음부터 관승에 소속되지 않은 승도 있었다. 둔세승의 선구가 된 스님이 호넨法然이다. 이들이 가마쿠라 신불교의 성립을 가져온다.
28) 밀교密敎에서 병이나 재난, 부정 따위를 면하기 위하여 신불에게 드리는 기도. 가지加持는 불보살의 위력이 우리들 중생에게 미쳐서 불보살과 우리들이 서로 통하고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가지의 가加는 가피加被, 가호加護를 줄인 말로서, 입히다(被), 보호하다라는 의미다. 또한 지는 섭지攝持의 줄인 말로서, 우리들이 불보살의 위력을 받는(感受)다는 뜻이다. 기도祈禱는 이런 가지의 상태에 자신을 이끌어 들이기 위해 기원하는 것으로, 가지기도 때 외우는 말을 다라니陀羅尼라고 한다. 천태天台, 진언眞言 등의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秘法이다.
29)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후지와라 씨藤原氏 출신의 무사. 본명은 기치호시吉法師, 뒤에는 사부로三郞라고 했다.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를 무너뜨리고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통일시킴으로써 오랜 봉건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서 중앙정부를 안정시키고 전국 통일을 이룰 여건들을 조성했다.
30)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중세 일본의 무장武將.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守라고도 함. 16세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까지 최고위직인 다이코(太閤: 1585~98)를 지냈다.
31)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일본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제1대 쇼군將軍. 본명은 도쿠가와 다케치요德川竹千代.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 1603~1867)의 창시자로 처음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밑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뒤에 도요토미의 일족을 멸하고 전국戰國을 제패하여 에도 막부를 세웠다.
32)「임진왜란 포로 빈센트 권, 일본서 화형당한 이유는?」김효정 기자, 부산일보, 2012년 3월 8일.
33)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徳川 시대라고도하며,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은 시간을 가리킨다.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 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연 시기를 에도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868년 5월 3일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에 함락되는 때까지의 265년간을 가리킨다.
34) 이찬수, 일본 교성학림 객원강사, 종교문화연구원장,「일본의 장례문화와 불교」금강신문 2008.06.05.
35) 메이지明治 천황의 즉위는 메이지 유신 전의 1867년 2월이지만, 메이지(明治: 1868~1912) 시대는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12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죽을 때까지의 44년간을 가리킨다. 메이지의 정치 체제는 크게 둘로 나뉜다. 메이지 정부의 시기(1868~1890)와 일본제국 헌법 시행 이후(1890~1912)이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제국의 초기 정부이며, 소련의 볼셰비키에 해당한다.
36)「한일 불교의 전반적인 비교」 (웹문서)
37) 이희익李喜益 지음,『선禪과 한국문화재韓國文化財』p. 29.
38)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7)은 중국 선종의 하나인 우두선牛頭禪의 종조이다. 윤주潤州 연릉(延陵:江蘇省) 출생. 19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정통했으나,『대반야경大般若經』을 읽고 진공眞空의 이치를 깨닫자, 그때까지 배운 유교와 도교의 학문에 회의를 느끼고 모산茅山의 삼론三論 경법사炅法師를 찾아 출가한 뒤 20년간을 숲속에 묵좌하여 깨우침을 얻었다. 그 후 우두산의 유서사幽棲寺에 머물면서 칠장七藏의 경서經書를 풀어 8년 만에 그 초략抄略을 지었는데, 이어서 우두라는 호칭이 붙었다. 643년에 사찰 북쪽 벼랑 아래 선실을 짓고 좌선을 계속하자, 100여 명의 수행자가 그의 지도를 받고자 모여들었는데, 선문 제4조 도신道信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법융으로부터 선맥을 이어받았다. 652년 건강(建康: 현 南京)의 건초사建初寺에 초빙되어 승도僧徒 1,000여 명을 모아『대반야경』을 강론하였다. 656년 원선元善의 청으로 건초사에 머물다가 그 이듬해 죽었다. 문하에 지엄智儼, 도기道基, 도빙道憑 등 유명한 제자들이 있었다. 그의 선풍을 그가 머문 곳의 이름을 따서 우두선牛頭禪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삼론학적三論學的 요소가 짙다.
39) 도선(道璿, 702~760)의 속성은 위衛. 허난성河南省 쉬저우許州 출생. 뤄양洛陽 대복선사大福先寺의 정빈定賓에게 계를 받고, 쑹산嵩山의 보적普寂에게 선을 배웠는데, 천태 ·화엄에 모두 통하였다. 일본의 입당승入唐僧 에이에이(영예榮叡), 후쇼(보조普照)의 소청을 받고 736년 계율을 전수할 수 있는 최초의 자격승으로 인도의 승려 보디세나(보리선나菩提僊那)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다이안사大安寺 서당원西唐院에서 계율을 강의하였다. 저서에는『범망경소梵網經疏』가 있다.
40) 불해 혜원(佛海慧遠, 1103~1176)은 임제종 양기파로 원오극근圓悟克勤의 법사法嗣이다. 남악하南嶽下 15世.『불해혜원선사광록佛海慧遠禪師廣錄』 4권이 있다.
41)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pp. 72~76.
42) 명암영서(明菴榮西, 1141~1215)는 일본 불교 임제종 건인사파의 개조이다. 14세 때 삭발하고 비예산에 들어가 유벤有弁으로부터 천태학을 배웠다. 1168년 일본 불교의 현상에 의심을 품고 중국 송나라로 건너가 천태산, 아육왕산阿育王山을 순례한 뒤 돌아왔다. 1188년에는 인도의 석가모니 유적을 순례하기 위해 다시 송나라에 갔으나 국교 문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태산 만년사萬年寺의 허암 회창虛庵懷敞에게 임제종 황룡파의 선禪을 전해 받고 인가를 얻었다. 4년 동안 송나라에서 공부한 뒤 1191년 귀국하여 잠깐 규슈九州 지방에 머물다가 교토에 진출하여 도겐道元과 함께 선종禪宗을 열고 신도들의 귀화를 받았다. 그러나 선종을 달가워하지 않는 비예산 승려 등 기존 교단의 저항에 부딪혀 간토關東 지방으로 옮겨 1209년 호조사法乘寺 9층탑을 재건하고, 1215년 수복사壽福寺를 창건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다가 75세로 수복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출가대강出家大綱』『일본불법중흥원문』『일대경론총석一代經論總釋』『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등이 있다. (불교경전총론)
4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원뢰조源頼朝, 1147~1199)는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 가마쿠라鎌倉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초대 쇼군將軍이다. 헤이平씨를 멸한 후 무가 정권을 확립하였다.
44) 다선일미(茶禪一味·Same sense in tea & buddhism)는 선미禪味와 차미茶味는 동일한 종류의 흥취임을 가리킨다. 본래 송대 원오극근이 선수행을 하던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네 글자로 이루어진 진결로, 일본 나라奈良현의 다이도쿠지에 보관되었으며, 나중에 불교계와 민간에 널리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중국차엽대사전, 중국 경공업출판사 (2001년 5월), 박정진의 「다선일미 묵적은 한중일의 미스터리」에서 인용)
45) 원오극근 (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20여 년간 협산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와 선禪의 관계에 몰두하여 마침내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참뜻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하여 ‘다선일미’라는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중국의 선풍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원오선사의 문하에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7년(1137년) 종고 선사는 승상 장준張浚의 추천으로 황명을 받들어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선일미’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종고선사가 경산사의 주지로 온 이듬해 여름에는 설법을 듣고자 참가하는 승속僧俗이 무려 1,7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위한 각종의 다연茶宴이 베풀어지고, 이에 따라 ‘선원청규禪院淸規’를 바탕으로 한 각종의 사찰다례의 의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바로 그 유명한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하게 되었다. (촌안村顔 박영환,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동국대학 겸임교수,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연원淵源」계간『다담茶談』2007년 봄호)
46)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p. 130.
47) 한보광韓普光 저著, 『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p. 117~118.
48) 일본 고불서古佛書인『속시청초續視聽草』와『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는 ‘난포 쇼묘가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차 탁자와 차 도구를 숭복사에 가져왔다’고 하는데, 일본 다도의 본격적인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때 경산徑山에서 중국의『차전茶典』7부도 일본에 전해지는데 차전 중에『다도청규茶道淸規』3권도 들어 있었다.
49)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은 비록 나이는 젊었지만 막부의 기반을 공고히 해야겠다는 야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막부 세력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다이묘들을 견제하는 한편 천황을 잘 조종, 그 힘을 이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굳게 다졌다. 의만은 유력한 다이묘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다이묘들을 차례로 토벌했다. 그중에서도 서부에서 방대한 영토와 재력을 갖고 있던,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단인 대내大內(오우치)가의 대내의홍(大內義弘, 오우치 요시히로, 1356~1399)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차였다. 결국 11월 29일부터 1월까지 의만의 군대와 의홍의 군대가 사카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결과는 의홍이 화살에 맞아 죽음으로써 의홍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응영應永의 난이다. 묘심사 6세인 졸당종박拙堂宗朴은 평소 의홍의 귀의를 받아 서로 인연이 깊었는데, 반란 중에 졸당종박이 의홍의 진중을 방문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반란이 진압 된 후 졸당종박은 유폐되고 묘심사는 용운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사원의 토지는 몰수되었다.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p. 153.) 50)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51)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79.
52)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53) 앞의 大應국사 ‘三門의 체계’를 받고, 다음 大燈국사에게는『大燈百二十則』이라는 일본 독자의 公案集이 편집되었다. 그 후 京都 근세 임제종 각파 속에서 각종 공안집이 형성되었지만 에도시대가 되어서 그것들은『宗門葛藤集』에 집대성되어, 17세기 후반 元綠2년(1689)에 처음 간행되어 安政연간에 이르기까지 禪院의 공안 참구에 널리 이용되었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54) 白隱은 이 세 종류의 공안군을 더욱 세분화하여, 간화수행을 한층 효과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는 大慧의 ‘정규안장삼백칙正規眼藏三百則’등에 보이는 고칙화두를, 선심의 심화에 있어서 효과 있도록 다시 배열하여, 그들 화두의 하나하나를 ‘본참本參의 화두’로서 단계적으로 참구되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오늘, 일본 임제선의 도장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안의 조사’도 이를 표방하여 아래와 같이 단계적으로 되어있다. 1. 법신法身…우주의 본체, 또는 진정한 실재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공안. 선종에서 말하는 ‘자기의 심성’이라든가 ‘본래 면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2. 기관機關…‘법신’에서 얻어진 견해를, 어떻게 일상차별세계(日常差別世界の中)에서 활용해 나갈 것인가를 추구하는 공안이다. 3. 언전言詮…깨달음의 내용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가를 배우기 위한 공안이다. 이에는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는 ‘종통’과 ‘설통’의 두 종류가 있다. 또, ‘언전’의 공안에는 불조의 어떠한 말에도 헷갈리지 않는 눈의 힘을 기르는 것도 있다. 4. 난투難透…위인도생爲人度生하기 위해서 깨달음의 경애境涯를 연마하기 위한 공안이다. 大慧가 ‘큰 깨달음(大悟)은 18회, 작은 깨달음은 그 수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5. 향상向上…이미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모두 버리고(선에서는 ‘파가산택破家散宅’이라고 한다. 학인을 깨달음의 귀신 굴(鬼窟) 속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공안이다. 이리하여 ‘깨달음의 끝(悟了)은 깨닫지 못함(未悟)과 같다’의 경지를 연마하게 되는 것이다. 6. 동상오위洞上五位…중국 조동선中國曹洞禪의 이론인 ‘편정오위偏正五位’를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깨달음의 내용을 이론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공안이다. 7. 십중금계十重禁械…삼취정계三聚淨戒나 십중금계(선에서는,‘불심종정계佛心宗正戒’라든가 ‘무상심지대계無相心地大戒’등으로 말한다)를, 선의 입장으로부터 다시 검토하여,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계戒를 지켜 나갈 것인가를 연마하는 공안이다. 8. 말후의 뇌관末後の牢關…이것에는 특별히 정해진 공안은 없고, 예를 들면 “‘임제록臨濟錄’을 한 글귀(句)로 말하라”는 등, 사가師家의 실내室內에 따라 각각 다르다. 수행과정에 대한 “최후의 일결一訣”을 확실히 하기 위한 공안이다.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55)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56) 大本山 佛通寺 (廣島縣三原市) 開山 愚中周及禪師, 대본산 天龍寺 (京都市嵯峨) 개산 夢窓疎石선사, 대본산 妙心寺 (京都市花園) 개산 關山慧玄선사, 대본산 大德寺 (京都市紫野) 개산 宗峰明超선사, 대본산 相國寺 (京都市今出川) 개산 春屋妙葩선사, 대본산 南禪寺 (京都市東山) 개산 無關普門선사, 대본산 建仁寺 (京都市大和大路) 개산 明庵宋西선사, 대본산 東福寺 (京都市東山本町) 개산 圓爾辯圓선사, 대본산 永源寺 (滋賀縣高野) 개산 寂室元光선사, 대본산 國泰寺 (富山縣高剛市) 개산 慈雲妙意선사, 대본산 方廣寺 (靜岡縣奧市) 개산 無文元選선사, 대본산 向嶽寺 (山梨縣鹽山) 개산 拔隊得勝선사, 대본산 建長寺 (膁瘡市山之內) 개산 蘭溪道隆선사, 대본산 圓覺寺 (膁瘡市山之內) 개산 無學祖元선사의 14파와 黃檗宗대본산萬福寺 (宇治市) 개산 隱元隆琦선사. (앞의 논문)
57)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58) 관장管長은 불교나 신도神道에서 한 종파의 우두머리, 종정宗正을 말함. 관장은 우리나라 총림의 방장보다는 규모가 크지만 조계종 종정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종정을 종파의 우두머리라고 정의했듯이 일본의 경우 임제종 14개 파를 각각 주관하는 대본산 사찰의 우두머리를 종정이라고도 한다.
59)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p. 106.
60)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pp. 110~111.
61)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p. 108.
62) 죽내도웅竹內道雄 저著, 이건희李乾熙 역譯,『日本의 禪』 p. 183.
63) 죽내도웅竹內道雄 저著, 이건희李乾熙 역譯,『日本의 禪』 p. 196.
64)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우리출판사, p. 53.
65) 북조시종(北条時宗, 1251~1284)은 가마쿠라 막부 제8대 싯켄(執權, 쇼군의 섭정)이다. 5대 싯켄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의 적장자로 태어나 불과 17세의 나이로 싯켄에 취임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몽골 제국의 공격을 2번이나 받았다. 내속來屬을 요구하는 원元에 대하여 시종은 강경 대처하여 1274년 원의 침공을 격퇴하였고, 1281년 원의 재침도 방어하였다. 북조시종은 해안에 성을 쌓고 필사의 공방을 벌여 몽고군의 상륙을 저지함과 동시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은 배들을 이용해 몽고군을 괴롭힌다. 우리는 신풍神風, 즉 태풍이 불어 몽고군이 스스로 무너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태풍 이전에 5~60일 동안 몽고군의 상륙을 막아 함선에만 머물게 함으로서 이미 질병으로 3,000여명의 병사를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몽골의 침입은 근대 이전에 일본 열도를 위협했던 유일한 침략행위였다. (죽내도웅竹內道雄 저著, 이건희李乾熙 역譯,『日本의 禪』 p. 151)
66)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67) 명법,『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p. 75.
68) 잇큐 소준(一休宗純,1394∼1481)은 임제종의 고승으로 무로마치室町시대 사람이다. 139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천국환千菊丸이었다. 諱는 宗純 혹은 狂雲이라고 하며, 호는 一休로서 남북조 시대의 산물로서 탄생한 인물이다. 잇큐가 태어나기 얼마 전까지 일본은 두 개로 양분되어 있었다. 즉 막부와 천황사이의 갈등 대립의 결과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北朝와 요시노를 중심으로 하는 南朝로 나뉘어져 있었다. 일본의 남북조시대는 57년 동안 계속되다가 세력이 약해진 남조의 고가메야마後龜山 천황이 1392년, 북조의 고꼬마쓰後小松 천황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남북조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잇큐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바로 이 북조의 고꼬마쓰 천황이다. 남북조가 통일될 당시 고꼬마쓰 천황은 25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였으니 패배한 남조측의 한 아름다운 여인에게 손을 뻗친 것은 승리자의 특권이었는지도 모른다. 잇큐의 어머니가 되는 그 여인은 공교롭게도 북조에 철저히 대항하면서 남조를 섬겼던 후지와라藤原씨의 딸이었다. 그녀가 고꼬마쓰 천황의 총애를 받아 임신하게 되자 일부에서는 그것을 남북조 화합의 표시로서 받아들이려고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때문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또 한 궁중에 있던 女官들이 그녀를 질투하여, ‘소매 속에 칼을 숨겨놓고 천황을 노리고 있다’며 중상모략을 하였다. 이 때문에 잇큐의 어머니는 결국 궁중에서 나와 평민의 집에 호적을 넣고 잇큐를 출산하게 된다. 그러나 궁중 밖에 있더라고 황족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었다. 결국 통일된 남북조가 잇큐로 인해 다시 분열될 것을 우려한 당시의 장군 아시까가 요시마쓰足利義滿의 뜻에 의해 잇큐는 여섯 살 때 교토 安國寺의 조오가이 간꼬오像外鑑公화상에게 보내져 출가하여, 슈우껜周建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415년 교토 대덕사의 고승 카소우 소우돈華叟宗曇의 제자가 되었으며 잇큐一休라는 호를 받았다. 27세 때인 1420년 어느 날 밤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고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일본 불교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pp. 91~92)
69)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p. 106.
70) 충본극기沖本克己(오키모토 가쓰미)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사토 시게키)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p. 295.
71)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72)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p. 301~302.
73)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p. 304.
7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대장경 인쇄본도 일본 오타니 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75) 최석환 지음,『정중무상평전』(茶의 세계, 2010)과 변인석 지음,『정중 무상대사』(한국학술정보(주), 2009)).
76) 스즈키 다이세쓰 (Suzuki Daisetsu, 鈴木大拙)는 일본 북부 이시카와현 가네자와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스즈키 데이타로鈴木貞太郞이다. 불교의 선禪사상을 서양에 소개한 주요인물이다. 와세다대학교의 전신인 도쿄대학東京大學에서 공부했으며 가마쿠라 엔카쿠사圓覺寺에서 당대 선사상의 대가로 유명하던 샤쿠쇼엔釋宗演의 제자가 되었다. 쇼엔宗演 노사로부터 다이세쓰大拙라는 법명을 받았다. 13년간(1897~1909)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잡지편집인으로 폴 케이러스와 함께 일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불교연구를 계속해 나갔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The Discourse on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1900)로 영역하고,『대승불교개론大乘佛敎槪論 Outline of Mahayana Buddhism』(1907)을 간행하였으며, 선학논문집,『Essay in Zen Buddhism』을 내어 주목을 받았다. 생애 후반기에는 일본과 해외, 주로 미국 등지에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지냈으며 서양사회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에 따르면 동양 정신세계의 근본적인 특징은 불이성不二性을 강조하는 데서 발견될 수 있으며, 근대과학으로 구현되는 서양의 정신은 이원론적 특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서양의 정신은 일상적인 행위에는 필요한 것이지만 궁극적인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스즈키의 철학에서 궁극적인 실체는 논리적인 탐구보다는 체험과 직관의 대상이며 따라서 비이원적인 종교적 체험, 특히 선불교의 전통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77) 이민용, 한국불교연구원,「미국의 일분 불교의 수용의 굴절 - 헨리 올콧트, 폴 케이러스, 샤쿠 쇼엔, D. T. 스즈키의 경우」, 佛敎學硏究會 2010년 추계학술대회 <일본불교의 기원, 토착화, 영향>.
78)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일본불교日本佛敎』 pp. 18~19.
79) 삼보교단三寶敎團은 구라파에서 간화선 수행을 가르치는 최대의 종파로서 수행자들이 3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그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수행방법이 주어진다. 첫째로 ‘지관타좌只管打坐’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냥 여기에 앉아 있으면서 호흡이나 몸의 감각을 느끼고, 혹은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을 받아들이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다가 원하는 사람들은 날숨을 쉴 때 無자를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발음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 삼보교단의 수행자들 가운데 반 정도는 지관타좌를 사용한다. 두 번째 방법은 지관타좌에 입각한 것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삼보교단의 나머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선호한다. 삼보교단에서는 대략 700여개의 공안을 다섯 공안집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수행자는 모든 공안들을 순서대로 투과해야 한다. 첫 번째 공안집(22칙)은 삼보교단의 창설자들이 서양인들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대체적으로 다른 공안집에서 발췌한 것으로 중국 배경이 많이 들어있지 않은 것들이다. 나머지 공안집은『無門關』『碧巖錄』『從容錄』『傳燈錄』등의 것들이다. Yamada Koun Roshi(1907-1989)는 이 모든 공안집에 나오는 화두들을 제창提唱하였다. 그분은 학생들을 영어로 가르치면서 중국의 文化的, 靈的, 宗敎的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공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제창이란 공안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공안이 던지는 질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Yamada Koun 노사의 提唱들은 독어, 불어, 영어 등의 구라파 언어로 번역되었다. 제창은 공안에 입각해서 만들어진다. 공안들이 다양한 만큼 제창을 통해서 수행자의 삶의 내외적인 모든 면들을 다룰 수 있게 해준다. Yamada Koun 노사는 선원을 창설하거나 기존의 선원을 책임진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구라파 언어로 자신들의 제창을 만들었다.(서명원, 서강대 종교학과,「歐羅巴의 看話禪 修行 - 現況과 前望」(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80) AZI, 175 rue de Tolbiac, Paris, 75013, France (http://www.zen-azi.org/index_f.html).
81) http://www.terebess.hu/zen/mesterek/harada.html.
82) http://www.geocities.com/jiji_muge/.
83) http://www.ciolek.com/WWWVLPages/ZenPages/DiamondSangha.html.
84) http://www.tnh2005.com/html/LesQuatorzeEntrainementsalaPleine Conscience.
85) http://www.buddhaline.net/dossiermotcle.php3?id_article=92.
86) 숭산 스님(1927-2004)께서 15개국에 창설하신 觀音禪宗은 歐羅巴 국가에서 삼십 여개의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http://www.pariszencenter.com/rubrique.php3?id_rubrique=13). 파리 중심지의 선원들의 주소, http://www.pariszencent er.com/rubrique.php3?id_rubrique=14; 歐羅巴에 전체에 있는 명상 센터들의 명단, http://kwanumzen.org/centers/. 숭산 스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우봉 선사(본명 야콥 펄)는 파리에 있는 선원을 근거지로 하여, 동서유럽 10여 개국에 韓國의 看話禪 修行을 퍼뜨리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신문 2004년 10월 21일자를 참조할 수 있다.
87) Philippe Cornu가 다음의 책에서 소수 교단들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Dictionnaire encyclopédique du bouddhisme, Paris, Seuil, 2001, p.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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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원 법사님!
고생 하셨습니다!
득 로 합장
우리 법사님의 한계는 어디까지 이실까?
매번 느끼는 마음이지만, 정말 대단하세요.. ^^
우와!더 이상 무슨말이 필요하리오?
법사님!짱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