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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25절 보십시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욥이 전에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고 정직하게 살며 어찌하든지 아이들도 잘못될까 싶어서 성결하게
하고는 ‘어쩌면 하나님께 화를 입지 않을까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또는 내 재산과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지금 현실로 와 버렸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릅니다(요일4:18) 바로 자기 의, 자기 열심, 자기 안전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막연한 두려움이
항상 떠나질 않아요.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의 복은 원인 모를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어지는 겁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의 인간은 욥과
같이 완벽한 외양을 갖춘 부자이며 잰틀맨이어도 잘 못될까 하는 두려움이 늘 있습니다.
누구나 천국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있다는 말은 실제로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그 희망이 모든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파라다이스라고 여기는 곳입니다.
무시무시한 지옥도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 심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실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천국의 소망이 있고, 지옥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마르다 이 말은 물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에 목이 마릅니다.
물이 없으면 우리에게 목마름을 주지 않으십니다. 배고프다 하면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배고픔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렇듯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실제로
천국이 있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이고,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옥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불신자들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입으로는 천국 지옥이 어디에 있어 큰 소리를 칠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욥처럼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이 병이 드는 요인 중에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무섭습니다. 병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멕시코에 있는 어느 한 암 병원은 암을 치료하기 위해 약물 치료를
안 한답니다. 의사가 환자들하고 재밌게 놀아 준답니다. 환자들에게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의식을 잊어버리도록 한답니다. 병은 그 병에 걸렸다는 의식을 없애면 낫습니다.
그 방법이 약물치료나 방사선치료보다 훨씬 치료가 잘 된다고 말합니다.
욥에게는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고자 함은 있었지만 마음속에 불안이 항상
떠나질 않았어요.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망하겠지, 이러다가 내가 한번 된통 당하지,
이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런 막연한 불안감과 원인모를 두려움이
욥에게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버렸습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렇지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요일4:1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정부에서 무상으로 진행하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습니다. 검진을 받으라는 뜻은 대장암이나 위암에 걸려도
초기에 발견하면 수술하여 낫는다는 전제로 검진을 받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죽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검진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담력이 없을 때는 혹시 병이 드러날까 봐 겁이 나서 검진을 피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검진을 받아 암이라도 발견이 되면 너희들이 어떻게 할 건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신유는 병에서 낫는 것이
제일이 아니라 병에 안 걸리는 것이 최고의 신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검진을 안 받아요.
믿음이 어렸던 청년 시절에는 언제나 입으로는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만
속에서는 ‘네가 뭐 할 수 있다고 까부느냐’ 하는 자조의 음성이 항상 들려 왔습니다.
환경과 사정을 바라보면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만 감으면 좋은 기억이나 좋은
추억보다 나쁜 것이 더 많이 생각나고, 내게 아픔을 줬던 사람들이 항상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긍정보다 내게 불행한 일이 있을 것 같고, 언제나 행운은
나를 비껴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격지심이
긍정적이지 못하고, 밝고 명랑하지를 못했어요. 그야말로 네가티브의 대명사였지요.
나중에 성경을 알고 보니 그건 ‘저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어둠’이며 곧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옛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과 사랑 안에 있는 순간부터 생각이
긍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게 있는 불안한 생각,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앞날이 잘못될 것이라는 불안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내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소망”이 생겼습니다. 진리를 따라 오메가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내게 주신 약속을 다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저는 행복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긋지긋한 불안과 두려움과 부러움이 사라지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따르므로 드디어 제게 껄떡거림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때에 미친 체 하고 이런 말을 합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목사들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부러운 대상이 없노라 하고요.
26절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이 표현이 무섭습니다. 내게 평강이 없고 쉴 날이 없다 수고와
무거운 짐 밖에 없다. 아이구 내 팔자야 아이구 죽을 지경이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이런 홍역의 기간이 있었습니까? 욥과 같은 상황이면서도
교회에서 ‘아무개님 어떠세요?’하고 물으면 ‘아 예 목사님 주님의 은혜로 다 좋습니다’
하고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교회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말하고, 신앙이 잘못된 것처럼
정죄해 버리기 때문에 약자일수록 자기 속에 있는 문제를 솔직히 고백 못합니다.
엘리바스나 소발이나 빌닷과 같은 교우들이 항상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이리저리 살피고, 도끼눈을
뜨고는 ‘철야기도 안 나올 때 나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절대로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습니다. 얼굴에는 나 괴로워요 하는 팻말을 붙이고...
그래서 웬만한 사고는 교회에서 말 안하고 지납니다. 이게 잘못된 겁니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이 나의 길을 다 책임지신다,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거기다가 인간만사
새옹지마야 하는 얼뜨기 타령까지 내뱉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패 주고 싶습니다.
어디서 주워온 온 신앙인지 모릅니다. 이런 개똥같은 신앙이 유통이 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입니다. 주여! 내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내가 참된 평강을 맛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참된 기쁨을 맛본 적이 없어요.
나는 주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지만 너무 피상적이고 껍데기만 맛보았을 뿐입니다.
진짜 사랑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는 이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제발 욥처럼 자기의 목숨을 챙기지 마세요.
저는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하는 찬송의 마지막 영어 가사로
While on others Thou art calling Do not pass me by 하는 부분이
너무 좋아 ‘Do not pass me by’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부를 때가 있습니다.
갈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gav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만일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리스도만 믿는다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자신의 노력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면 당연히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는 것이라
이때부터 나는 주님 앞에서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경외감을 갖습니다.
왜요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주이십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까?
다 압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내가 그를 주로 믿는 믿음으로 그분이 나와 하나 되었습니다. 이제 그 분이 나를
주장하시며 ‘이제는 네 인생을 네 맘대로 살지 말아라 내가 네 인생을 복되게 하리라
네가 네 인생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네 인생을 운전하리라’ 하십니다.
그때부터 평강도 없고 안온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노라가 아니고
‘주의 평강이 내게 있습니다. 그리고 안전함도 있습니다. 요동치 않습니다’라고
크게 외치며 노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나는 수고만 했구나 지금끼지
헛발 질 만 했구나’가 아니고 ‘이제 내게 복이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11장 28절-3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멍에라고 하면 무조건 무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은 하나님과
그 멍에를 항상 쉽고 가볍게 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터득하지 못할 때에는 멍에를 메라고
하시면 짐이나 수고나 희생인 줄 알 때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부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매는 진리를 터득하는 길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몸소 터득하여 체험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하며 주님과 하나로 연합이 되는 멍에가 그렇게 가볍고 좋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덧 주님을 사랑하여 그 하나 되는 계명이 즐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점은 욥처럼 자신의 의로 주를 섬길 것인가, 시편의 의인들처럼 주를 사랑하고
노래하며 섬길 것인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대접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할렐루야!
늘 염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