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본문 11절은 1-10절까지에 대한 작은 결론(結論)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12절부터는 새로운 문단으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1절은 좁게는 5:1-10절까지, 넓게는 본격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3:21절부터 이제까지의 말씀을 참으로 이해(理解)하였는가를 점검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11절은 단순합니다. 엄마 품에 안기어 즐거워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하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끌어안아 주듯이, 하나님과 화목 된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마냥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①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합니다.
㉠ 이렇듯 단순한 말씀 같지만 여기에 담겨져 있는 실제적인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기대하고 있는 것만큼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지 못한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선물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는 자녀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해할 것을 기대했는데 도리어 시무룩하고 무슨 불만이 가득해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면 그 아버지의 실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② 11절은 “이뿐 아니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으며, 진노의 날에 구원되고, 구원의 완성인 영화롭게 될 것이 보장되었다면, 이 복락들을 가능하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함에도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신앙에 심각한 결함(缺陷)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중대한 검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씀드린다면 여기까지 와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보았자 그에게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러므로 “즐거워하느니라” 한 말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 1-11절 안에는 “즐거워한다”는 말씀이 3번(2, 3, 11) 등장합니다.
㉮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이는 장차 그 나라에 가서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소망(所望)의 즐거움입니다.
㉯ 그런데 3절에서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합니다. 이 즐거움은 현재 당하는 환난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이 모든 것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11절의 즐거움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물론 11절의 즐거움 속에는 구속의 은혜를 기뻐하는 즐거움도 있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는 소망의 즐거움도 들어 있습니다만, 11절의 즐거움은 조건부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즐거움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놓여 있는 위치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④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씀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는 말씀이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3)의 즐거움과는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게 무엇을 행해주셨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네게 무엇을 줄꼬” 하신다면 “오 주여 당신 자신(自身)이니이다. 하나님 자신을 주옵소서” 하는 단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축복, 건강축복, 은사 충만을 주셨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즐거움은 욥과 같은 순전(純全)한 즐거움인 것입니다.
㉡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한 그런 즐거움인 것입니다.
⑤ 사도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고 묻고 있는, 소요리 문답 제1문(問)에 정확하게 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⑥ 다음으로 생각할 점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자랑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역본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자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하고 말씀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을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즐거워할 것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⑦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자랑하지 못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원인이 무엇이라고 여겨지십니까?
㉠ 이제까지 상고한 영광스러운 복음을 알아야할 만큼 모르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었다는 점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 시편 42:3절에는,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비웃는 말이 있습니다. 왜 비웃고 있을까요? 이 시편 기자는 낙망 가운데 빠져 있으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3절에 보니 그는 울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불신자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즉 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네가 이 모양 이 꼴이냐 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 “너를 사랑 한다”는 그 하나님, 너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그 하나님이 어디 가고, 버림당한 자처럼 외톨이가 되어 이렇게 처량한 꼴을 하고 있느냐는 거지요.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나,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⑧ 어떻게 하면 즐거워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자랑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점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후에는, 소처럼 새김질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주야로 묵상(黙想)하는 자로다”(시 1:2) 하고 말씀합니다. “기쁨, 즐거움, 감사, 찬양” 등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영원불변한 약속의 말씀을 앞에 두십시오. 성난 파도 같은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점을 히브리서에서는,
㉮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3) 하십니다.
㉡ 또한 내가 어떤 일을 했는가? 또는 내가 무슨 일을 하지 못했는가 하고,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해주신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우선적으로 더 많이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비결입니다.
⑨ 11절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가 중요합니다.
㉠ “연약, 죄인, 원수 되었던” 이전(以前)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습니다.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며, 살으심을 인하여” 영화될 소망이 있습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그래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 그러므로 여기까지 와서도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로마서 1장으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만족하십시다. 하나님만을 자랑하십시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십시다. 이것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의 의미입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