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최 화 웅
바다물빛이 한결 맑고 푸르다. 시선이 에메랄드빛 바다로 향한다. 우리 모두의 영혼이 맑은 물빛 따라 맑아지는 것 같다. 봄이 이제 계절의 기적을 펼치려나 보다. 동백꽃은 이루지 못한 애달픈 사랑을 전한다.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동백꽃의 꽃말은 지금 절정을 이룬 동백꽃이 노래하는 사랑의 아리아로 들려온다. 동백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동백꽃송이 속에는 못다 핀 사랑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사랑은 오랜 기다림과 아픔을 견디고 꽃송이처럼 피나보다. 원래 섬이었던 해운대의 동백섬은 오랜 세월 퇴적작용과 연육교로 뭍과 이어졌으나 아직도 섬이라 부르고 듣기에 자연스럽다. 일찍이 신라시대 고은 최치원 선생 같은 문장가는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이곳을 거닐며 그 감흥을 후세에게 전했다. 최치원은 해운대라고 써서 새긴 각자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인도 아유타국의 황옥공주로 전해지는 전설의 인어상이 동백섬을 찾은 사람들에게 동백섬 둘레길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건너편 청사포와 미포의 해안선과 맞닿은 달맞이 언덕, 부산바다의 상징 오륙도, 바다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안대교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봄이면 피고 지는 동백꽃이 송이 채 떨어지는 모습이 애절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동백꽃 부인(La Dame aux camelias)》을 일본 범역가가 붙인 제목 그대로《춘희(椿姬)》를 읽었다. 그 뒤 사회인이 되어서 베르디의 오페라〈라 트라비아타〉를 몇 차례 보았다. 우리 작가들의 시적 번역으로 읽고 보았으면 감동이 더 했을 것이다.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리에는 미모의 콜걸로 동백꽃을 매개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명문가의 청년 아르망 뒤발과 순수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아르망 뒤발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폐병으로 숨지고 마는 비극적 스토리로 끝난다. 시선을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오른쪽으로 백사장으로 돌리면 그 끄트머리에 호텔이 그 너머에는 동백섬이 말없이 자리 잡았다. 겨울이면 동백꽃이 만발하는 섬, 동백섬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명승지로 부산시가 기념물 제46호로 지정했다. 나의 서재 오른쪽 창 한 가운데로 내다보면 동백섬 남쪽 기슭의 누리마루가 선명하다.
동백섬의 정상에 마련된 동백공원은 겨울해풍만 세차게 불뿐 한적하다. 해발 56.6mdp 이르는 해운대 동백섬 정상에는 최치원 선생이 남긴 해운대 각자와 동상이 외롭고 황옥공주의 전설을 담은 인어상과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겨울을 지나 봄이 다가오는 물 맑은 바다를 배경으로 붉게 핀 동백꽃이 대비를 이루며 화려하다. 동백섬에는 고은 최치원 선생이 직접 쓰고 새겼다는 ‘해운대’ 석각이 아직도 천년의 풍상을 전한다. 고려 때 문신이었던 정포의 시에서 “대(臺)는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海雲)의 이름만 남아 있구나.”라고 읊었다. 동백섬의 남단에는 지난 2005년 APEC 정상회의 때 국제회의장으로 세운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세계적인 풍광을 자랑한다. 우리네 토종 동백꽃은 모두 붉은 홑꽃이다. 동백꽃은 붉은색이지만 간혹 흰색이나 분홍색도 있다. 그것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드문 꽃들이다. 동백꽃은 왜 꽃피우기 좋은 제철을 마다하고 한겨울에 필까?
엄청난 정력을 쏟으며 경쟁자를 따돌리고 종족보존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길이었으리라. 동백꽃은 어찌하여 춘삼월의 벌과 나비도 없는 한겨울에 꽃가루받이를 할까? 이 어려운 숙제를 아주 작고 귀여운 이웃 동박새와 해결해나가고 있다. 잎사귀 크기에 버금가는 큰 꽃이 많은 양의 꿀을 만들어 동박새를 불러들인다. 동백꽃은 꽃통의 맨 아래에 꿀 창고를 두고 그 위에 노란 꽃을 피워 동박새를 유혹한다. 동박새로서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열량이 높은 동백나무의 꿀을 열심히 따먹고 그 대신 꽃가루를 전해주는 것이다. 꿀을 가져갈 때는 깃털과 부리에 꽃밥을 잔뜩 묻혀 여기저기 옮기는 일에 부지런을 뜬다. 동백꽃의 그 진하고 붉은 꽃잎과 샛노란 꽃술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초록 바탕에 펼쳐지는 강렬한 붉은 색깔의 동백꽃을 쉽게 알아보듯이 동박새의 눈에 잘 띄도록 배려했으리라. 이렇게 새에게 꿀을 주고 꽃가루받이를 하는 꽃을 일컬어 조매화(鳥媒花)라고 한다. 동백꽃에 동박새가 날아들어 꿀을 따먹는 모습은 정겹고 사랑스럽다.
동박새는 연약한 꽃잎에 몸을 지탱하고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꿀을 딴다. 그때 동박새는 여린 꽃잎에 생채기 하나 내는 일이 없다고 한다. 동백꽃이 동박새에게는 먹이를 주는 대신 종족번식을 꾀하는 공생(共生)의 관계다. 나는 화려한 겹꽃보다 소박한 동백의 홑꽃을 좋아한다. 동백의 홑꽃은 겹꽃보다 단순하며 청순하다. 내가 동백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 꽃잎을 하나둘 차례로 바람에 흩날리지 않고 송이 채 단한 번에 지우고 마는 결기가 대단하다. 둘째는 나무 밑으로 떨어진 꽃들이 그대로 말라버리지 않고 다시 꽃을 피운다. 그만큼 동백꽃은 끈질기고 영원히 살려고 한다. 셋째 꽃이 떨어진 나무 밑을 부드러운 카펫으로 깔 듯 부드럽게 사랑을 간직하려고 애쓴다. 구정 연휴와 새봄이 시작하는 주일 오후 이제 생후 8개월 된 외손녀 유나와 함께 첫 문화나들이로 시립미술관을 찾았다. 지하의 어린이미술관에서는 동아시아 현대미술전 보태니카전시가 열려 꽃과 나무를 소재로 한 전시로 인류가 자연과의 공존은 풀어야할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