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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3월 06일(목요일).
월령능선/화엄사 : 전남 구례군.
▣산행코스 : 운조루-월령봉-형제봉-밤재-구층암-의상암들매화-화엄사-화엄사주차장.
▣산행시작 : 운조루 09시 16분.
▣산행종료 : 화엄사주차장 15시 27분.
▣전체거리 : 약14.4km.
▣전체시간 : 06시간 10분.
▣운동시간 : 05시간 36분.
▣휴식시간 : 00시간 34분.
▣누구하고 : 화랑산악회.
09 : 16 운조루.
10 : 54 삼밭재.
11 : 39 월령봉.
12 : 03 863m봉.
12 : 32 형제봉.
13 : 01 밤재.
14 : 32 구층암.
14 : 37 의상암들매화.
14 : 44 화엄사.
15 : 27 화엄사주차장.
▲ 09시 19분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에서..
▲ 집 앞의 연당(蓮塘).. 물이 채워져 있지 않아 황량해 보인다.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 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
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세가지형의 길지(吉地)는...
첫째..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으로 미녀(美女)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금가락지를 풀어 놓은 형국(形局)이며..
둘째.. 금귀몰니형(金龜沒泥形)은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는 형국(形局)이고..
셋째.. 오보교취형(五寶交聚形)은 금(錦)․은(銀)․진주(珍珠)․산호(珊瑚)․호박(琥珀) 등 다섯 가지 보물이 쌓여 있는 곳이다.
▲ 운조루를 관람하려고.. 다가 가니..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운조루(雲鳥樓)는 이 집의 택호(宅號)이기도 하며..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라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내용중에서 머리글자를 따와서 운조루(雲鳥樓)라고 하였다고 한다.
▲ 운조루 소슬대문..
운조루(雲鳥樓)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영조1726∼정조1797)는 조선 후기 무신(武臣)이자 건축가(建築家)이며 풍수지리
(風水地理)에 밝은 사람이었다. 호는 귀만(歸晩),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경북 대구(大邱) 해안면(解顔面) 입석동(立石洞)
에서 태어났다. 유이주(柳爾胄)의 건축기술은 궁궐공사와 수원화성, 남한산성, 상담산성, 낙원읍성 축성(築城)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1773년(영조 49)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있을 때 궁궐에 올리는 세미선(稅米船)이 파손 침몰되어 그 죄로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구례군(求禮郡) 문척면(文尺面) 월평으로 이사 왔다가 다시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로 이주하였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아 전국을 답사한 경력이 있어 유이주(柳爾胄)
스스로가 이곳 지리산밑을 길지(吉地)임을 알고 선택한 것이다.
“젊었을 때는 설악산이 좋고, 나이 먹어서는 지리산이 좋다”는 옛말도 있다.
류이주(柳爾胄)가 이곳을 길지(吉地)라고 확신한 까닭은 강 건너 오봉산이 아름답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가지 모양(五星)
을 갖추었으며, 물이 풍부하고, 풍토가 후덕하며, 대지(垈地)가 덕(德)을 베풀기에 좋다는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운조루의 쌀뒤주.
타인능해(他人能解).. 식구가 아닌 타인도 열게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라는 뜻이다.
운조루(雲鳥樓)는 99간의 대저택에 논이 약 2만평으로 1년지은 쌀 수확량이 약200가마 였는데 남에게 적선하기 위해
2가마 반이 들어가는 둥근 나무속을 파서 쌀뒤주를 만들어 1년에 36가마를 넣었다고 한다.
운조루(雲鳥樓)에는 10대 정신(精神)이 있다고 하였다.
1. 적선(積善)을 베푸는 정신.
2. 기록(記錄)정신.. 3대에 걸쳐 100여년 동안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기록하였다
3. 풍류(風流)정신.
4. 효도(孝道)정신.
5. 분수(分數)에 맞는 정신.
6. 여성존중(女性尊重) 정신.
7. 선정(善政)을 베푸는 정신.
8. 건축(建築)을 사랑한 정신.
9. 절개(節槪)를 지키는 선비 정신.
10. 이웃 사랑 겸애(兼愛) 정신.
▲ 운조루앞의 사각 연못에 둥근섬이 있다.
과거 조선시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고 생각하였다..
직사각형은 땅을 의미하고.. 연못 가운데의 둥근섬은 하늘을 의미한다..
▲ 운조루를 나와서 마을 앞을 바라보니..
▲ 구례의 또다른 명문가인 <곡전재> 너머로 계족산의 산그리메가 아름답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오봉산과 어우러진 들녘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제 곧.. 봄기운에 취해 생명을 키운 들판에는 나물
캐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판에 가득 할 것이고... 지난 세월 저 들판은 끊임없이 곡식을 내서 마을을 키워 왔을 것이다.
풍수가들이 이곳을 생리(生利)의 명당으로 꼽는 까닭이다. '생리'는 경제적인 이로움을 뜻한다. 사람들은 이 땅이 그들을
부유하게 할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아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해 주었다. 운조루(雲鳥樓)의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으로
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 곡전재는...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 이교신(호-곡전)씨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 목조 건축 양식의 주택으로서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金環洛地 : 선녀가 금반지를 떨어뜨린 자리)에
해당한다고 보아 집터 자체를 반지 모양으로 둥글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 오미정...
오미리(五美里)라는 마을 이름도 운조루를 지은 류이주(柳爾胄)가 지은 것이라 하는데.. 오미리(五美里)는 글자 그대로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깃든 마을이라 한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땅이 기름지며, 인심이 좋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 운조루유물전시관...
▲ 문이 열린것으로 보아 관람이 가능할것 같은데... 15km에 가까운 오늘의 산행거리에 마음이 바빠서 통과다..
유물 관람은 별도의 스케쥴을 잡아서 가까운 쌍산재.. 곡선재.. 운조루를 연계 하는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
▲ 산행들머리인 오미저수지로... 가는길에 오산의 사성암과 둥주리봉의 추억이 새롭다.
▲ 도로에서 오미저수지 둑길을 따른다...
▲ 오미저수지구간은... 지리산둘레길 18구간이다.
▲ 지리산둘레길 안내를 받으며 가다가...
▲ 데크계단을 올라서면... 지리산 둘레길은 좌측으로 간다고 한다.. 이별이다.
▲ 09시 38분 : 월령봉 주능선상의 법등재에 올라 선다.
▲ 여기서부터는... 지리산 월령봉능선의 시작이다.
월령봉능선은 노고단(1507m)에서 섬진강까지 도상거리 11.5km에 걸쳐 남쪽으로 내리뻗은 능선이다.
▲ 운조루를 지은 "류이주"의 유택이다..
삼수공 류이주는.. 남한산성 보수와 수원 화성 축조에 관여한 건축에 능통했던 무관인데,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수원 화성 건설시,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느냐고 신하들이 물으니, 정조임금은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느니라!”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류이주(柳爾胄)는 정조(正祖)가 등극하면서 관직에 복귀했고 주로 대규모 건축공사 업무를 맡았다.
▲ 섬진강이 보이고.. 구례읍소재지도 보인다.
▲ 당겨 본 섬진강..
진안에서 발원하여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들며,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 그리고 낙남정맥이 둥글게 감싸안은 그 안쪽을
흐르며 젖줄의 역할을 한다.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삼진강 하구로 침입해 왔을 때이다. 수많은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겁을
먹은 왜구는 광양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고서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 육산으로 이어지던 능선이..
▲ 방구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 고도를 높혀가니.. 꽉막혔던 조망도 터진다.
▲ 멀리.. 지리산 주능선으로 오르는 문바위봉도 보이기 시작하고.. 왕시리봉은 구름에 싸여 있다.
▲ 다시 바위돌들이 지루했던 육산을 깨운다..
▲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문수저수지와 구례군 토지면소재지 방향...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 구례의 넉넉한 인심을 빗댄 말이다. 이는 모름지기 어머니와도 같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낳고
기른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말일 터이다. 조선 중기 이 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구례를 가리켜 볍씨 한 말을 뿌려 백마흔
말을 거둘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의 하나로 꼽았다. 또한 지리산을 일러 두툼하고 기름진 땅이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 했으며, 산속에 대나무와 밤, 감이 많아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리고 저절로
떨어지고 높은 봉우리 위에 기장과 조를 뿌려도 무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지리산이 가져다 준 기름진 땅은 다시 섬진강이란 젖줄을 만나 한결 살지고 튼실해진다 하겠는데, 지리산이 낳은
풍요를 섬진강이 길러 주는 셈이다. 예부터 구례는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 불려 왔다.
웅장한 지리산과 젖줄 구실을 하는 섬진강, 지리산과 섬진강에 얽혀 있는 너른 들판이 세 가지의 큰 것이고, 산과 강이
어우러져 빚어 낸 빼어난 경치와 기름진 들판에 넘치는 곡물과 푸성귀, 순박한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 세 가지의 아름다움
이다. 이 가운데서도 국립 공원 제1호인 지리산은 빼놓을 수 없는 자랑으로, 구례에는 지리산자락을 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이름난 곳이 많다.
▲ 왕시리봉은...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우리 옛말 " 살 " 에서 유래하고, 초기 삼국시대 관직에 백제의 달솔, 신라의 수마로, 고구려의
욕살 등에서 나타나며, 정수리란 의미도 "살"로 삼아 발달한 단어라고, 살 - 술 - 술이 - 수리 - 시리 또는 시루 등으로 변천
한 것이 아닌가 한다.
▲ 10시 54분 : 삼밭재.
이곳까지가 구례에서 관리하는 구간이고 삼밭재 이후 부터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해당되는 구간으로 비탐구간이다.
▲ 삼밭재를 지나서부터는 길도 거칠어진다.
▲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바위밑을 지나가려니 오금이 저린다.. 봄철 해빙기에는 조심해야 할 곳이다.
▲ 11시 39분 : 월령봉이라길래... 왠지 신비감과 함께 이유없이 정겹게 들리는 이름.. 월령(月嶺)..달재..달고개인데
정상부에는 조망은 전혀 없고.. 처음으로 만나는 시그널이 반갑다.
▲ 발디딤이 쉽지 않은 월령봉 내림길을 내려 오다가 전망좋은 바위가 있어 올라가 본다..
▲ 노고단(老姑壇)의 노고할미가 시원하고 너런품으로 품어 준다..
신라의 화랑들이 탑(塔)과 단(壇)을 설치하고 수련을 하면서 천지신명과 노고 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물기가 많은 습설과 젖은 낙엽이 매우 미끄럽다.
▲ 숲이 우거진 녹음철에는 와서는 안될것 같은 곳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조심...
▲ 바위지대를 벗어 난다.
▲ 앞서간 두명의 선답자의 흔적을 따라 7~8분가량 올라가니..
▲ 12시 03분 : 863m봉에서 바라본 형제봉이다... 진행은 오른쪽으로 내려 갈것이다.
▲ 오늘 최고의 전망좋은 곳이다. 탈출구인 밤재도 가늠된다.
▲ 조금전에 지나온 조망없는 월령봉 보다는.. 이곳을 월령봉이라 하면 격에 맞을것 같다.
▲ 형제봉재..
▲ 12시 32분 : 형제봉..
▲ 밤재로 내려가서 의상암들매화를 보고 화엄사로 갈것이다.
▲ 형제봉에서 좌측능선을 따르면 화엄사주차장으로 바로 가는 길이다..
▲ 형제봉을 내려와서 우측으로 노고단능선을 따른다.
▲ 불과 조금전에 지나간 짐승 발자국인데 멧돼지 족적은 아닌것 같다.
▲ 밤재로 내려가면서 지나야 하는 산죽길인데..
▲ 꽤나 길게 이어진다.. 바닥이 보이진 않지만.. 길은 뚜렷하다.
▲ 13시 01분 : 밤재 도착..
산죽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 직진하면 노고단 가는길..
▲ 고로쇠물을... 채취한다고 해야할지.. 착취한다고 해야 할지.. 조건없이 내어주는 자연이다.
▲ 이런 첩첩산중에도 민초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 화전터다..
▲ 14시 09분 : 보적암 차도 갈림길..
▲ 좌측으로 내려간다.. 오른쪽은 연기암으로 가는 차도다.
▲ 용소갈림길에서 내원사 방향으로 가는 시멘트길을 버리고 계곡길을 따른다.
▲ 용소갈림길에서 좌측이 화엄사길이고 오른쪽은 연기암 길이다.
▲ 의상암 들매화를 보기위해 구층암방향으로..
▲ 구층암..
▲ 구층암의 모과나무기둥.
임진왜란 때 암자가 불타면서 화를 당한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승화시킨 것이며 얼추 400년이 넘는 세월이다보니 그 자태
가 신묘하기 그지없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심재가 갈변하지 않고 회백색 자태에 골과 주름이 도드라진다.
일반적으로 모과나무는 주름이 많은데다가 골이 깊게 패여서 목재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한다.
▲ 구층암을 지나서 들매화를 보러 간다.
▲ 들매화가 만개하고 연못에 만수가 되면 물에 비치는 반영도 아름다울것 같은데..
매화는 눈뜰 생각이 없고.. 연못에는 물이 없다.
▲ 들매화는 2007년 10월 7일에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공식지정 되었다. 동물이나 사람들이 먹고 버린 씨앗이 싹이터서
자란 나무로 짐작되기에 "들매화" 불린다. 개량종 매화보다 꽃이 작고 듬성듬성 피지만 단아한 기품과 향기는 개량종 매화
가 따라오지 못한다. 토종매화 연구의 학술적 가치가 높다.
▲ 화엄사 대웅전..
대웅전 편액은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 광(珖)이 썼다.. 원래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모신 법당을 말하는데..
이 곳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시므로 "대적광전" 이나 "대광명전" 이라고 썼어야 되는데.. 대웅전이라고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고 한다.
▲ 화엄사 대웅전의 목조 비로자나 삼신불 좌상(국보 제336호)...
중앙에 법신 비로자나불이 지권인을 하고 계시고, 우측에는 보신 노사나불이 우리나라에서 는 유일하게 보관을 쓰고 손을
펼친 설법인을 하고 계시며, 좌측에는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신다. 위 삼신불은 1635년 청헌스님 등
18분의 스님이 조성하였으며, 위계에 맞추어 비로자나불은 3.8m, 노사나불은 3.7m, 석가모니불은 3.5m로 조성하였다.
후불탱화는 18세기 유명한 의겸스님이 참여해 조성하였다.
▲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각황전은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으로 단청은 없지만,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며, 외부는 중층구조이나, 내부는 위 아래가 트인
통층 구조다. 법주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불전중의 하나다. 각황전이 있기전
통일신라 때는 4.6m나되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둘러 깨달음의 세계가 장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숙종 때 계파대사가 4년에 걸쳐 중층건물로 재건하였다.
▲ 화엄사 홍매화.
문화재청이 2024년 1월 24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홍매화다. 아직은 깨고 싶지 않은 것 같다.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선사가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다. 화엄매라고도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꽃과 열매가 다른 재래종보다 작지만 꽃향기는 그보다 더 강하다고 한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과 향긋한 향기로 화엄사에서 인기있는 명물이다.
▲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사자탑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조성한 것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감로수를 받들고 있고, 네모난 돌에는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다... 네 마리 사자의 얼굴에는 인간의 희, 노, 애, 락을 표현하고 있다. "4사자 감로탑" 으로도 불리운다.
▲ 적멸보궁 가는길.. 각황전 왼쪽으로 올라간다.
▲ 적멸보궁 가는길의 108계단.
▲ 108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 본 각황전..
▲ 석등과 4사자상(국보 제35호).
▲ 석등.
연기조사가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탑을 이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차 공양을 하는 모습을 조각한 석등 조각상이다.
▲ 4사자상(국보 제35호)과 어머니상(가운데)..
▲ 4사자상(국보 제35호)과 어머니상(가운데)..
4사자삼층석탑은 2층 기단에서 희노애락 표정의 4마리의 사자가 머리 위에 탑을 이고 있고, 탑안에는 합장을 하고있는
어머니상이 조각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높이 5.5m의 불사리 공양탑이다.
▲ 견성전(적멸보궁).
▲ 적멸보궁.
부처님 사리탑을 볼 수 있는 통창이 있고.. 불상은 모셔져 있지 않다..
▲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불단..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다보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적보살,관세음보살이 모셔저 있다.
▲ 화엄사 각황전 내부 불전.
▲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과 석등(국보 제12호).. 둘다 국보급이다.
각황전 앞 석등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조성하였으며, 높이가 6.36m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크다.
각황전과 조화를 위해 크게 조성했으며,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밝혀 지혜로 이끈 부처님의 다른 모습을 의미한다. 현재는
오염물제거, 파손부재 접합, 복원 등 작업을 위해 해체하여 보존처리 중으로 2025년 6월 이후에나 볼수 있다고 한다.
▲ 화엄사 각황전과 서 오층석탑.
▲ 화엄사 대웅전과 동 오층석탑.
▲ 화엄사 보제루.
▲ 화엄사 천왕문.
천왕문은 사천왕상을 모신곳이며 건물의 배치는 약간 비틀어져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찰의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사는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
되었다. 구례 화엄사의 사천왕상은 극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었다. 특히 머리장식이 화려하고, 목의 머플러는 거의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져 있다.
▲ 화엄사 금강문.
▲ 벽암국일도대선사비...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대사의 탑비다..
대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했었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도 지었다고 한다.
▲ 화엄사 불이문인데.. 양쪽으로 담장이 있는게 특이하지만.. 사연이 있다.
편액은 선조의 아들 의창군 광(珖)의 글씨로.. 지리산화엄사는.. "지혜가 뛰어난 산속에 화엄경을 모신 사찰" 이다.
임진왜란 때 주지 설홍스님 등 300여명의 스님이 구례의 길목 석주진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부 전사하였고.. 왜군이 화엄사
전각을 모두 불태웠다. 그래서 불이문에 대문과 담장을 만들어 중생에게는 문을 활짝 열고.. 관리들의 수탈과 왜적의 침략
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문을 굳게 닫았다.
▲ 화엄사 일주문에서 오른쪽의 대문도 성문처럼 굳게 만들어 놓았다..
▲ 방장교 측면에 방하착(放下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방하착(放下着)은... 내려놓다.. 라는 뜻으로.. 마음 속에 있는 집착이나 번뇌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 한다.
저 다리를 건너는 이 들중에 내려놓는이 얼마나 될까..
▲ 주차장까지 2~30분 걸어 간다.
▲ 일주문...
안쪽(좌측사진)에는 "해동선종대가람"이라 되어 있고.. 바깥쪽(우측사진)에는 "지리산대화엄사"라 되어 있다...
▲ 뒷면은 심무가애(心無罣礙).. 마음에 가리낌이 없다... 앞면은 대화엄성지..
▲ 집단 상가지역..
▲ 15시 27분 : 화엄사주차장 산행종료.
▲ 남원 광한루 식당가에서...
▲ 추어탕 한 뚝배기 게눈 감추듯.. 뚝딱.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운조루의 소슬대문 아래에 놓여진 통나무 뒤주에 새겨진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의미를 배웠고
월령봉능선에서는
습설(濕雪)로 고생하지 않을까.. 했던 우려는
노고단.. 노고할미의 보살핌으로 안전산행을 마쳤고
400년간 지붕을 떠받치고도 꼿꼿한 구층암의 모과나무기둥까지 만났다.
춘래불사춘이라.. 화엄사의 잠자는 홍매화와 들매화..
매화공주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나... 다 가질수는 없었다..
화엄사 부처님 세상에서 사바세상을 나오며 만나는 심무가애(心無罣礙)...
속인의 마음에 어찌... 일체의 거리낌이나 장애가 없으랴..
오늘도 고마움을 담아 가자~..
첫댓글 올만에 찾은 화엄사 홍매화는 피어날줄 모르고 국보와 보물 7암자 견학 올도 지도교수의 상세한 가르침 새겨듣고 나갑니당 수고마이햇슴다
조금은 기대하고 갔는데 아쉬웠습니다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지요
그래도 월령봉 능선이 좋았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실감나는산행기 잘앍었습니다 모든개인능력이 尹이보다났습니다 ㅋ 짐승발자국혹시곰아닙니까?
먼저 용기를 주시니 힘이 납니다 ㅎㅎㅎ
지리산 곰이었다면 잡아서 울러매고 갔을텐데 아쉽네요 ㅋㅋ
올만에 함께 해서 반가웠구요
감사합니다
광성식당에 미꾸라지가 패랭이 모자를 쓰고 있었네요. 유명 추어탕 집은 심벌도 남 다르네요.
그 바쁜 와중에 숨겨진 흔적들을 어떻게 찿아내시는지 새삼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월령봉 능선에 습설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추어탕 맛있게 먹었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