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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시인의 만남
-2008년도 출판 동시집 총평
오 인 태
1. 문제는 상상력이다
지난 1월 마지막 날, 한국작가회의 총회가 있어 서울 가는 길에 회의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의 네버랜드 픽처북 뮤지엄에 들렀다. 때마침 아티누스 지하1층에서는 ‘프랑스 그림책 원화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필요한 책이 있어 찾은 데는 한 내로라하는 출판사가 자사 책들을 전시해놓고 파는 곳이었는데, 매장이 온통 어린이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출판시장에서 어린이책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세가 새삼 실감났다. 픽처북 뮤지엄에서는 출판시장에 나온 어린이책의 방대한 물량과 다양한 그림책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역시 어린이책의 대종은 그림책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그림책 대부분이 바깥나라 책들이었고, 우리나라 그림책은 어쩌다 눈에 띄는 정도였다. 글은 살필 겨를도 없었지만, 우선 표지 그림이나 대충 넘겨본 속 그림들이 한 눈에 보기에도 외국 것에 견줘 사뭇 엉성하고 빈약했다. 『엔젤맨』과 『안녕? 미스터 지구인』을 그린 마티유 루셀, 『볼레뷔리에서의 흔적놀이』를 그린 막스 뒤코스 등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30명이 그린 그림책 원화 150점을 선보이고 있는 ‘프랑스 그림책 원화전’ 앞에서는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치열한 작가정신, 그리고 높은 장인정신이 한껏 부럽고 우러러보였다. 조금은 주눅이 든 채.
우리 그림책의 글이나 그림세계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이 도대체 뭘까. 나는 우리나라 어린이문학 작품, 특히 동화나 그림책이 다른 나라에 견줘 허약한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이 모자란 탓이 아닌가, 여긴다. 우리에게 판타지소설이나 판타지동화가 턱없이 부족하고 소소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테다. 상상력의 빈곤 문제가 동시라고 크게 다를 바 있겠는가.
2. 2008년에 읽은 동시집, 두 현상
네버랜드 픽처북 뮤지엄의 그 숱한 어린이책 가운데서도 동시집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리만큼 드물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장르 어린이문학 출판물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동시집만 떼어놓고 보면 2008년은 동시집 출판이 그런대로 활황을 이뤘던 해가 아닌가싶다. 스스로 애써 구했든지, 고맙게도 저자에게 받았든지 내가 읽은 동시집만 해도 스물세 권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이만하면 지난해는 내겐 어느 때보다 동시집을 많이 읽은 해였다.
양인숙의 『뒤뚱뒤뚱 노란 신호등』<청개구리>, 조소정의 『여섯 번째 손가락』<청개구리>, 전원범의 『해야 해야 노올자』<청개구리>, 정진아의 『난 내가 참 좋아』<청개구리>, 김종순의 『어린 새싹의 외출』<청개구리>, 김은영의 『선생님을 이긴 날』<문학동네>, 이안의 『고양이와 통한 날』<문학동네>, 곽해룡의 『맛의 거리』<문학동네> 박성우의 『불량 꽃게』<문학동네>, 신현득의 『공룡을 타고 지구 한 바퀴』<섬아이>, 김종상의『숲에 가면』<섬아이>, 한인현의『섬집 아기』<섬아이>, 유은경의 『생각 많은 아이』<섬아이>, 김용택의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창비>, 최명란의 『수박씨』<창비>, 김미혜의 『아빠를 딱 하루만』<창비>, 신형건의 『엉덩이가 들썩들썩』<푸른책들>, 이옥용의 『고래와 래고』<푸른책들>, 류선열의 『샛강 아이』<푸른책들-재출간>, 오규원의 『나무 속의 자동차』<문학과지성사>, 서정홍의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 김명수의 『마지막 전철』<바보새>, 도종환의 『누가 더 놀랐을까』<실천문학사>가 모두 지난해에 나온 동시집이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내가 읽은 책 목록이고, 미처 구해 읽지 못한 동시집도 많으리라.
97년 환란사태와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때보다 더하다는 경제 불황 속에서 출판사들이 시집 출간을 꺼렸을 것이 빤한데도 <청개구리>에서는 5권의 동시집을 냈다. 동시집을 많이 펴냈다는 그 자체가 우선 대견스럽다. 내가 읽은 2008년도 동시집 목록에 있는 출판사로서는 가장 많은 분량이다. 뒤를 이어 <문학동네>에서 김은영이 쓴 『선생님을 이긴 날』을 비롯해 4권, <섬아이>에서 신현득이 쓴 『공룡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비롯해 4권, 그 다음으로 <창비>에서 김용택이 쓴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를 비롯해 3권, <푸른책들>에서 신형건이 쓴 『엉덩이가 들썩들썩』을 비롯해 3권, 그 밖에 <문학과지성사>, <우리교육>, <바보새>, <실천문학사>에서 각각 낸 1권씩을 읽었다.
무엇보다 2008년에 동시집을 낸 작가 명단에서 낯익은 시인들의 이름이 눈에 많이 띈다. 이안, 박성우, 김용택, 최명란, 오규원, 서정홍, 김명수, 도종환 시인이다. 이 가운데서 이안, 박성우, 오규원, 도종환의 동시집은 이들의 첫 동시집이 된다. 김용택, 최명란, 서정홍, 김명수는 시인으로서의 명성과는 별개로 한 두어 권씩의 동시집을 내고 이미 이름난 동시인의 반열에도 오른 사람이다. 김용택, 서정홍, 오규원, 김명수의 동시집은 내가 이런 저런 지면에서 서평을 썼던 적이 있다. 해서 이번에는 한 쪽으로 제쳐두려 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현상은 <문학동네>에서 동시집을, 그것도 한 해에 네 권이나 펴냈다는 것이다. 예전엔 동시집을 내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유력한 출판사에서 동시집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동시를 쓰며 공부하는 입장에서 더없이 반갑다. 이 출판사에선 3월에 김은영의 『선생님을 이긴 날』을 ‘문학동네 동시집’으로 처음 출간하고, 이안의 『고양이와 통한 날』(문학동네 동시집 02), 곽해룡의 『맛의 거리』(문학동네 동시집 03), 박성우의 『불량 꽃게』(문학동네 동시집 04), 이 세 권을 11월에 한꺼번에 냈다. 이로 보아 김은영의 동시집이 시리즈의 ‘01’에 해당하고, 나머지 세 권은 특별한 궁리와 속셈에 따라 낸, 이른바 ‘기획출판’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가운데 김은영을 제외한 이안, 곽해룡, 박성우의 동시집은 모두 그들의 첫 동시집에 해당하는데, 이안과 박성우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들이고, 곽해룡은 어른문학 동네에서도 어린이문학 동네에서도 내겐 퍽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이 세 시인이 동시와 전혀 무관한 이들은 아니다. 이안은 『어린이문학』에 동시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동시를 써왔고, 박성우는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미역」이 당선되면서 어린이문학 동네에 이미 얼굴을 내밀었다. 곽해룡도 알고 보니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며 동시를 쓰고 있다는데, ‘제15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동시부문 당선’과 ‘제6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을 받은 걸로 보아 만만찮은 역량을 인정받은 시인일 테다. 그럼에도 그 이름이 낯선 것은 순전히 내 눈과 귀가 어두웠던 탓인 셈이다. 도종환 시인은 실천문학사에서 그의 첫 동시집으로 『누가 더 놀랐을까』를 냈다.
요컨대, 2008년 동시집 출판의 뚜렷한 특징은 유명 시인들이 이미 어린이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앞 다투어 첫 동시집을 내며 어린이문학 동네의 새 얼굴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의 현상, 또는 추세인 듯하다. 아무래도 이런 현상과 추세는 더욱 활발해질 것 같다. 이를 주도하는 출판사가 <문학동네>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주로 어른을 독자대상으로 삼아 시를 써오던, 그것도 시에서 꽤 역량을 인정받는 시인들이 어린이문학 동네로 몰려오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3. 상상력 수혈,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동시가 기존의 우리 동시에 많이 부족해 뵈는 ‘시적 상상력’을 수혈해줄 것인가. 일단, 나는 그럴 걸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지금 새로운 상상력의 옷을 입지 못한 우리 동시는 너무 왜소하고 남루하다. 상투성의 덫에 단단히 걸려있다. 상상력이 거세된 무미건조한 리얼리티만 앙상하게 남았거나 오해한 교육성을 앞세워 훈계를 늘어놓기 일쑤다. 더러는 여전히 동심천사주의에 빠져 유치한 말장난이나 일삼는다. 시의 짜임새도 조악하고 시어도 풀죽어 시들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우리에게 좋은 동시를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서 나는 늙거나 쇠약해버린 우리 동시의 피를 젊고 싱싱한 피로 바꿔 채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던 참이다. 이럴 때 나타난 역량 있는, 젊은 시인들이 쓴 동시를 일단은 긍정과 기대의 시선으로 읽었다.
비닐하우스에 해바라기 씨를 널었다
마을 안길에 심을 해바라기 씨다
근데 해바라기 씨를 쥐가 다 까먹었다
나란히 간격 맞춰 설 샛노란 해바라기
씨이,
쥐 새끼가 마을 안길을 다 먹었다
마을 안길을 똥구멍으로 다 빼냈다
- 박성우,「쥐」전문, 『불량 꽃게』에서
“마을 안길에 심을 해바라기 씨”를 먹어버린 “쥐 새끼”가 “마을 안길을 다 먹었다”고 보는 시적 상상력이 기발하고 참신하다. 그렇게 먹어버린 “마을 안길을 똥구멍으로 다 빼”낸, 곧 ‘쥐똥’에까지 시인의 상상력은 비약하는데, 이 상상력이 빚은 은유를 공식화 하자면, ‘해바라기 씨 = 마을 안길 = 쥐똥’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고 보니 해바라기 씨는 쥐똥을 쏙 빼닮았지 않은가. 그 작은 쥐똥 안에 마을 안길이 다 들어앉아있다니, 이쯤 되면 차라리 제목을 ‘쥐똥’으로 할 수도 있겠다싶다. 마지막 행은 좀 느닷없이 읽히기도 하는 탓이다. 그런데 이 ‘느닷없음’이 오히려 ‘해바라기 씨 = 쥐똥’이라는 기발한 은유의 등식을 만들어냈다. ‘느닷없음’ 또한 아동성의 한 속성1)이라는 걸 시인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시를 잘 쓰는 시인이 꼭 동시도 잘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동성과 시성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거의 동일한 속성과 원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 개연성을 무턱대고 부정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어른이 쓰는 동시는 어린이, 곧 ‘아동성’을 모방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뛰어난 시성을 가진 시인이 그렇지 못한 시인보다 빼어난 동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높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도 시이니만큼 언어를 다루는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은 동시를 쓰는 동시인에게도 꼭 필요한 자질이다. 3연 2행을 보라. “씨이,” 말이다. 이 “씨이,”는 같은 연의 1행에도, 3행에도 중첩되어 읽히거니와, 시인이 어느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시를 구조화 하고 시어를 가려 배치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치밀하고 정교하게 언어를 매만지는 솜씨는 같은 동시집 안에 들어있는 “너도 쑥/나도 쑥//너도 나도 쑥쑥(「쑥」전문)”과 같은 동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시든, 동시든 마치 기계가 하듯이 너무 매끈하게 다듬어 정형화되면 오히려 그 맛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새길 필요가 있겠다. 동시가 터무니없이 무거운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가벼워서도 안 될 일이다. 안일하고 가볍다는 느낌을 주는 동시들이 『불량 꽃게』에서 더러 눈에 거슬린다.
엄마가 안 오신다
배가 고프다
동생과 나는
자장면을 시켜 먹는다
단무지가 없다
배달 온 아저씨가
깜박 잊고 갔나보다
동생과 나는
긴 면발을 입에 물고
하늘을 본다
어! 저 하늘에
맛있는 단무지 하나
- 최명란,「보름달」전문,『수박씨』에서
최명란의 동시는 가볍다. 대체로 짧다. 그런데 이「보름달」은 최명란의 동시 가운데서는 드물게 긴 편인 데다, 리얼리티의 진정성도 어느 정도 느껴지는 시다. 일이든 모임이든 바쁘기 짝이 없는 부모님을 늘어진 “면발”처럼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따뜻한 밥 대신 피자나 “자장면을 시켜 먹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 하나의 문화현상인 탓이다. 만약에 이 동시에서 마지막 두 행이 없었다면 짠하면서도 궁상맞고, 서글프고, 궁색하기 마련이었던 70-80년대, 또는 90년대 초반, 리얼리즘계열의 시나 동시를 보는 듯했을 터이다. 그런데 보름달을 단무지로 환치하는 비유를 통해 비애와 반발의 파토스(pathos)를 단숨에 익살과 풍유의 유쾌함으로 환기시킨다. 내가 보기엔 최명란은 발랄함과 기지가 무엇보다 돋보이는 시인이다. 이 ‘발랄함’과 ‘기지’가 동시를 동시답게 하는 덕목들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좋은 동시를 쓰기엔 모자란다.
누가 막대기로 때린 줄 알았다
조각조각 껍질이 들떠
연둣빛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막대기가 닿을 수 없는
꼭대기까지
누가 이 모양을 만들어 놓았나?
아버지께 이르니,
자라느라 그렇다고.
꽃 진 자리마다
새끼손톱만 한 모과가 맺혀 있었다
- 이안,「모과나무」전문,『고양이와 통한 날』에서
이안의 시는 별스런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기발한 상상력이나 말을 용의주도하게 부려 쓰는 재주도 그다지 엿볼 수 없다. 그냥 수수하다. 그래서 편안하다. 그의 동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든, 동시든 실제현실 속에서 시가 될 만한 어떤 상황, 즉 ‘시적상황’을 포착해내는 그의 시선은 자못 날카롭다. 모과나무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 “조각조각 껍질이 들떠” 있는 속으로 마치 피멍처럼 드러난 나무의 “연둣빛” 속살을 기억하리라. 그것을 보고 “누가 막대기로 때린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뭇 어린이다운 발상이다. 한데, 이것은 나무가 “자라느라” 치르는, 이를테면 ‘성장통’이라고 아버지는 알려준다. 그 순간 시의화자의 눈에 들어온 건 “막대기에” 맞은 듯한 나무의 멍든 속살이 아니라 “꽃 진 자리마다” 맺혀 있는 “새끼손톱만 한 모과”다. 일순 시가 환해진다. 이처럼 발견의 날카로움을 부드럽고 환하게 환기시키는 재주를 그는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라 시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부드럽고 따듯한 시선과 착한 심성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러나 이안의 동시에서는 「모과나무」를 비롯한 몇 편을 제외하곤 여느 동시가 대체로 시인의 시적자아를 숨기고 어린이화자를 내세우는 데 비해 시인의 시적자아가 직접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른인 시인의 시적자아가 너무 두드러진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동시집의 그림 가운데는 영락없이 시인의 캐리커처로 보이는 어른화자의 모습이 수두룩하겠는가. 이안은 동시의 독자, 시의화자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듯싶다. “올해의 국화 향은//작년에 사라진 국화 향기(「국화」전문)”과 같은 경우는 누구를 독자로 상정하고 쓴 동시인지 도통 모르겠다.
낮에는 옥수수 한 알 갖고 싸우고
풀씨도 먼저 먹으려 부리로 쪼았는데
잘 때는 날갯죽지 붙이고 같이 잔다
아픈 데 서로 비비며 추녀 밑에서 같이 잔다
아침에는 지렁이 빼앗아 달아나고
물 한 모금도 먼저 먹으려다 엎질렀는데
밤에는 몸 찰싹 붙이고 같이 잔다
그래야 언니 동생인 거 병아리도 안다
- 도종환,「병아리 자매」전문,『누가 더 놀랐을까』에서
그의 시가 그렇듯, 도종환의 동시가 갖는 미덕은 뭐니 해도 시의 대상, 곧 세계에 대한 따뜻한 눈길이다. 그 대상이 공동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그 속의 생명체이든, 사물이든 간에 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시선은 사뭇 따뜻하고 세심하다.「병아리 자매」에서도 서로 “옥수수 한 알 갖고 싸우고”, “풀씨도 먼저 먹으려 부리로” 쪼아대고, “지렁이 빼앗아 달아나고”, “물 한 모금도 먼저 먹으려다” 엎지르는 병아리들을 짐짓이라도 눈 흘겨보지 않고 더없는 사랑과 연민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며 옹호한다. 그렇게 티격태격 부대끼면서도 “아픈 데 서로 비비며”, “몸 찰싹 붙이고” 같이 자는 사이가 바로 “언니 동생”이라는 거다. “그래야 언니 동생인 거 병아리도 안다”는 거다. 읽다시피 도종환의 동시에는 유달리 ‘안다’는 형용사가 숱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두 손 싹싹 빌었지만/네가 또 훔쳐 먹을 줄 알았다(「파리」일부)” “연못의 개구리는/구름과 비를 부를 줄 안다(「개구리 소리」일부)” “함께 가야 멀리까지/간다는 거 어려도 안다(「기러기」일부)” “추녀 끝에 낙숫물 지는데도/곧 그치는 비인 걸/잠자리 떼가 먼저 안다(「소나기」일부)”……, 도대체 누가 ‘안다’는 것인가. 도종환 동시의 화자는 어린이화자가 드물다. 어린이화자의 모습을 취하더라도 그의 자아의식이나 세계관, 그리고 말투는 영락없이 어른이다. 시의화자가 아예 드러나지 않거나, 얼핏 모습을 비추더라도 어른화자인지 어린이화자인지 헷갈리고, 어정쩡한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의 동시에서는 시의 대상이나 시 속의 상황이 대개가 어린이들의 현실세계가 아니라 자연과 동식물에 관련된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의 동시는 어른인 시인의 시적자아가 ‘어린이화자’를 빌리지 않은 채, 시 속에 곧바로 개입하여 어린이의 눈이 아닌 어른의 눈으로 시의 상황이나 대상을 그려내고 진술하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그의 동시 속 화자들은 ‘안다’ 따위, 일방적으로 단정하고 강요하는 말투를 일삼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그는 어린이를 잘 모르거나 동시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다. 이주영도 이번 도종환의 동시집을 여러모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더 깊이 살피고 새겨볼 필요가 있다.2)”며 애정 어린 지적과 권고를 한 바 있다. 맞는 말이다. 그는 어린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채송화”처럼 낮게 몸을 숙이고, 그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야 될 듯싶다.
4. 다시, 문제는 ‘어린이’다
살핀 대로, 시인들이 쓴 동시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과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장점과 미덕을 지닌다. 이것이 허약한 우리 동시를 살찌우는 자양분을 공급해주리라는 데는, 일단 긍정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동시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는 건 아니다. 동시는 어른들만을 상대로 하는 일반 시와는 달리 어린이를 주된 독자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이미 밝혔듯이 시인들이 쓴 동시가 장점과 미덕을 갖는 한 편으로 단점과 한계도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런 사정은 오랫동안 동시만을 써왔던 동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말하는 ‘어린이’란 어린이들의 인지나 사고특징인 ‘아동성’과 심리적, 정서적 상태라 할 수 있는 ‘동심’, 그리고 그들이 쓰는 ‘언어’와 그들이 현재 자리한 ‘현실’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의 ‘어린이’다. 이러한 ‘어린이’에 바탕을 두지 않는 시인의 상상이란 어린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고 공허한, 단지 어른들만의 ‘홀로 상상’일 따름이다. 요행히 ‘아동성’과 ‘동심’은 ‘시성’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어린이와 시인, 어린이와 어른이 만나는 통로는 마련되는 셈이다. 문제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나느냐다. 그것이 바로 ‘어린이의 현실’이고 ‘그들이 쓰는 언어’다. 요컨대, ‘어린이의 현실’을 ‘동시’라는 그릇에 담아 ‘어린이의 언어’로 소통하자는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어린이의 현실을 단지 그들의 직접적인 ‘체험 공간’으로만 한정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물론 상상의 세계도 포함된다. 어른들은 잘 이해되지 않는 판타지 이야기책이나 판타지 영상물에 어린이들은 곧잘 심취하고 몰입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가진 상상력의 영역과 범위를 가늠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또한, 나는 어린이의 언어를 딱히 고정된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어린이의 언어란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고 습득되고 변화 발전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를 만만하게 보아서 될 일이 아닌 데다, 동시 쓰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린이’나 ‘동시’가 하늘에서 떨어진 무슨 별종이거나 괴물이 아닌 바에야 우리가 그 정체를 전혀 모를 수는 없다. 우선, 우리 ‘어른 속의 어린이’를 통해 ‘요것’들을 어렴풋이나마 붙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못이
문을 닫았다
물자라 장구애비 물땅땅이 개아재비
감기 걸리지 말라고
단단한 통유리 문을 닫았다
- 곽해룡,「얼음 연못」전문,『맛의 거리』에서
소아과 병동에
밤이 오면
아이들 모두
엄마 찾아 잠드는데
종일 할머니랑 있던
건희만 혼자 잔다
건희가 잠든 침상 밑
간이침대엔
이불 밖으로 쑥 나온
건희 아빠 두 발
새벽이 되면 일어나
일터로 가실
발가락 열개
- 곽해룡,「발」전문,『맛의 거리』에서
2008년도에 나온 동시집 가운데 내가 가장 행복하고 감명 깊게 읽은 동시집이 바로 곽해룡이 쓴 『맛의 거리』다. 앞서 곽해룡은 내겐 퍽 낯선 시인이라고 밝혔는데, 그러나 이제 곽해룡은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만큼 그의 동시들은 아직도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고백컨대, 처음엔 그저 그렇겠거니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몇 장도 안 넘기고 이내 자세를 곧추세우고 앉아 그의 동시들을 읽어나갔다. 편편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책 뒤쪽에 붙인 김제곤의 해설을 빌리자면, 『맛의 거리』는 “세상을 보는 눈과 말법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동시들이다. 하지만 동시가 갖춰야 할 자질과 요소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취급하며 강조해온 내 입장에서 곽해룡의 동시를 달리 평가하자면 “동시가 갖춰야할 조건과 자질을 두루 갖춘, 높은 완성도를 지닌 동시”라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동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동시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2008년에 나온 동시집 가운데서는 단연 그렇다.
곽해룡의 동시는 참신한 시적 상상력과 함께 어린이들의 삶을 바탕에 깐 시적 리얼리티의 진정성, 용의주도하면서도 간결한 언어의 절제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얼음 연못」에서는 연못의 얼음장을 외부세상과의 ‘차단막’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뭇 생명들을 감싸 안고 살려내려는 ‘보호막’으로 인식하는 눈길에 우선 안도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시인의 눈길이다. 곽해용의 동시에서는 유난히 광물성 질료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는 ‘얼음’ ‘안경’ ‘거울’ ‘술잔’ ‘못’ ‘지팡이’ ‘가위’ ‘눈(雪)’ ‘물’ ‘무기’ 따위, 광물성 질료들을 동물성 ․ 식물성 질료로, 그리고 그것을 다시 ‘사람’의 문제로 변환하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시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그의 시가 좋은 시는 될지 모르되, 좋은 동시로 읽히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동시가 동시로서 감명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어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어린이’의 문제라는 점 때문이다. 이 ‘어린이의 문제’ 곧 ‘어린이들의 현실’에 줄곧 눈길을 주며, 다름 아닌 ‘어린이’를 화자로 내세워 이 ‘어린이화자’가 독자인 다른 ‘어린이’와 또 다른 독자인 ‘어른 속의 어린이’와 능히 소통될 만한 언어로 말하는 탓이다. 물론 동시의 화자인 ‘어린이’는 시인인 ‘어른 속의 어린이’다. 사실, 이렇듯 시나 동시의 시적자아는 모두가 시인 자신일 따름이다. ‘어른 속의 어른’을 독자대상으로 하는 일반 시의 시적자아, 곧 시의화자는 마땅히 그 시인의 ‘어른 속의 어른’이지만, ‘어린이’ 또는 ‘어른 속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시의 화자는 단지, 시인의 ‘어른 속의 어린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린이가 어른이 아닌 것처럼 어른은 절대로 어린이가 될 수 없다. 어린이화자의 어린이다움에 너무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어른 속의 어린이’가 실제 어린이와 동떨어져서는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른 속의 어린이’와 ‘실제 어린이’의 거리, 이 적당한 거리지점을 위의「발」이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시적 상상력과 시적 리얼리티의 적절한 결합, 그것을 시종 ‘어른 속의 어린이’ 즉, ‘어린이화자’의 시각과 진술을 통해 동시의 온전한 모습과 진정성을 확보해내는 곽해룡 동시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동시는「할아버지 안경」「맛의 거리」「가자미」「아무」「잘못 박힌 못」「시험 망친 날」「고요한 밤」「암탉」과 같은 것들인데, 너무 길어 여기에 소개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동시는 어떤가?
아가는
자꾸 거울을 뒤집어 본다
아가는
제 뒷모습이 궁금해
- 곽해룡,「거울 보는 아가」전문,『맛의 거리』에서
5. 마침표를 찍으며
새삼 되묻건대, 동시를 누가 읽는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 속의 어린이’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실은 동시의 독자, 또는 구매자는 거의가 어른이다. 어린이는 동시든 동화든 책을 사서 볼 구매력도 없고 동시에 대한 흥미도 이미 잃은 탓이다. 그래서 혹여 오늘의 동시작가나 출판사들은 아예 동시집 따위는 읽지도 않고, 구매력도 없는 어린이들을 멀찌감치 제쳐둔 채, 오로지 어린이문학 비평가나 어른 독자만 겨냥해서 동시를 쓰고, 책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어린이문학’에 정작 ‘어린이’는 없이, 어른들만의 말잔치, 또는 장사놀음이나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린이문학, 우리 어른들의 미래까지도 암담할 수밖에 없다. 멀리 내다보면, 어린이문학에 어린이를 임자로 들여앉히는 일이야말로 가장 많이 ‘남는 장사’에다 우리 어른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세워놓는 일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특히, 기왕에 동시를 쓰고자 어린이문학 동네에 발을 들여놓은 시인들에게 부디 어린이가 좋아하고 읽을 만한 동시를 많이 써주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 나는 그들이 그럴만한 역량을 충분히 지녔다고 믿는다. 스스로도 좀 지나치다싶게 꼬집고 까탈을 잡은 것은 이런 특별한 기대에서다. 나 또한 시와 동시를 함께 쓰며 동병상련하는 처지다.
아, 참 놓칠 뻔했다. 동시의 구두점 문제를 한 번쯤 짚고 싶었는데, 앞에서 인용한 모든 동시들이 하나같이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대체로 어른들의 시에서는 시상의 흐름을 끊고 시를 읽는 호흡을 방해할 것 같아서, 뭔가 단정하는 것 같아 오만하게 비칠 수도 있겠다싶어서, 따위 이유를 들어 한사코 ‘마침표’ 찍기를 꺼려한다. 사실 나도 시를 쓸 때는 그렇다. 그러나 ‘어린이’가 읽는 동시에까지 별 근거가 없어 보이는 이런 터부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싶다. 동시는 시이면서 어린이들에겐 더없이 좋은 모국어 텍스트이기도 한 점을 고려해서 해보는 말이다. 사소한 시빗거리라 여겨 뭉개버리면 할 말은 없다. 서정홍 시인의 동시집 『닳지 않는 손』에 들어있는 모든 동시들은 ‘마침표’를 비롯한 구두점들이 정확하게 찍혀있다.
오인태『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아버지의 집』등, 몇 권의 시집을 펴냈으며,『어린이시의 생성심리와 표현상의 특징』이란 논문으로 경상대학교대학원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 다. 초등학교와 교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와 동시를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