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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양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law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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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송은 양양 석보면 답곡리의 마을 뒷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나무의 가지가 아주 많아 ‘만지송’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옛날 어떤 장수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 나무를 심으면서 자기의 생사를 점쳤다 하여 ‘장수나무’라고도 불린다.
만지송의 나이는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12.1m, 둘레는 3.94m이다. 3개의 줄기가 합쳐져 한 줄기가 된 것 같으나 실제로는 땅에서 50㎝까지만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줄기가 4개로 갈라져 올라가면서 매우 많은 가지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렇게 뻗은 가지는 거의 땅바닥에 닿아 나무의 모양이 무덤모양과 비슷하다. 만지송의 바로 옆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가지와 만지송의 가지가 어우러져 언뜻 보기에 한 그루인 것 같이 보인다.
답곡리 마을 사람들은 만지송을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라고 여겨 왔으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만지송에 정성스럽게 소원을 빌어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만지송은 오래된 나무임에도 가지가 많아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잘 보존되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고,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어져온 나무로서 민속적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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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골은 예전에 강씨들이 살았던 마을로 전해지고 있으나 대홍수로 마을을 떠난 후 주곡공 이도(1636~1712)와 주계공 이용(1640~1693) 형제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풍치, 수해방비 및 방풍 목적으로 본 숲을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사골이라는 지명도 주곡공과 주계공의 호를 좇은 것이다.
이 숲은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의 흔하지 않은 구성과 위 숲과 아래 숲으로 구분하여 중첩시켜 놓았다는 점에서도 다른 곳의 여느 비보림보다 이색적이며, 오래된 수해방지 숲으로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시무나무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고 느릅나무과(科)에 들어가며, 비교적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하여 차축의 재료로서는 박달나무 다음가는데 어디서나 자라는 흔한 나무라서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세계적으로는 희귀한 나무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우리나라와 중국에만 있는데 이십 리마다 심어 이정표구실을 하기도 했다.
김삿갓의 시 [二十樹下三十客 / 四十村中五十飯 ‘시무나무 아래 서러운 손님이 망할 놈의 마을에서 쉰밥을 얻어먹었다'] 에도 나오는 시무나무는 흔히 동네를 지켜주는 당산목이나 성황림의 나무로서 따뜻한 밥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김삿갓과 울분을 같이 했던 나무로, 봄에는 새싹으로 떡을 만들어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 경북대 박상진교수 -
※비술나무
중부 이북에 자라는 큰키나무로, 오래된 줄기에 세로로 마치 흰 페인트칠을 한 것 같은 기다란 반점이 특징이다. 반점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멀리서도 금새 다른 나무와 구분할 수 있다
3.석계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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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현종대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의 옛 집이다. 인조 18년(1640)에 석계 위에 집을 짓고 호를 석계라 하였다. 선생과 정부인 장씨가 살던 집으로 선생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정부인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一자형의 사랑채와 안채는 흙담으로 막아 허실감을 메우고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사랑채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으며, 왼쪽에는 마구간과 창고방을 시설하였다.
4.원리 주곡고택
종 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4호
지 정 일 1996.12.05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5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곡 이도(1636∼1712)가 주남리에 지었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 30년(1830)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ㅁ자형 구조이며, 사랑방의 편리를 위하여 다양하게 꾸민 벽장과 감실방 벽장 아래 끌어내릴 수 있는 널로 된 제사상이 돋보인다. 또한 부엌에 물을 길어 담아 두고 쓰는 큰 독인 물두멍도 남아있는, 예가 드문 옛 생활문화의 흔적이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건물로 중요한 자료이다.
5.석천서당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
시 대 조선시대
석계 이시명(1590∼1674)이 네 아들과 함께 생활하던 곳이다.
이시명은 조선 후기 학자로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국정이 혼란스러워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이곳은 네 아들과 은거생활을 하며 지은 석계 초당이 있던 곳으로, 순조 31년(1831)에 후손들이 지금의 서당을 지었으며 고종 28년(1891)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당고에는 『석계선생운집』, 『항재선생운집』, 『영천집』등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6.남악정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 147
시 대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온 숙종(재위 1674∼1720) 때 성리학자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정자이다.
이현일이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위하여 숙종 2년(1676) 2칸짜리 초가집으로 지은 것인데, 순조 22년(1822)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출입문에는 ‘홍도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숙종의 글씨라고 한다.
7.오류정 종택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2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 31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영조 11년(1735) 오류정 김두행(1705∼1785) 선생이 지은 살림집이다. 선생은 중국 진나라 도연명의 뜻을 따라 집 뒤뜰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정자를 지어 오류정이라 하였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5칸 규모이며 ㅁ자형 평면구조를 이룬다. 사랑방 왼편으로는 2칸을 내어 마루를 깔고, 좁은 마루를 돌려 조각한 난간을 설치하였다.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양반집의 대표적인 예로 귀중한 자료이다.
8.영양 화매동 백자도요지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지 정 일 1985.12.30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 산155
시 대 조선시대
요지란 자기나 기와, 그릇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화매동 백자 마가터는 15∼16세기경에 운영되던 백자 가마터로 추정되며, 2∼3곳의 가마터가 넓게 퍼져 있다. 지름 10∼20m 안에 자기 조각이 흩어져 있고, 불에 구워진 흙 덩어리도 많이 발견되었다.
어두운 청회색·연한청색·백색의 접시와 대접이 발견된다. 그릇의 모양은 대체로 낮으며, 굽은 얇으나 그릇의 모양에 비해 지름이 넓은 편이다. 도자기의 품질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두가지 모두가 발견되었다.
9.유우당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5호
지 정 일 1994.04.16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포면 원리 106
시 대 조선시대
이상도(1773∼1835) 선생이 지은 살림집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33년(1833) 석보면 주남리에 세운 것을 선생의 후손인 이돈호(1869∼1942)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돈호는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한 바 있으며 그의 조카인 병각은 조지훈·오일도·조세림과 함께 항일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건물 이름은 이상도 선생의 첫째 아들인 기찬의 호를 따른 것이며 제사를 지내는 곳과 사당 2채로 구성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은 전형적인 민가 건물로 ㅁ자형을 이루고, 사당은 1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첫댓글 조상님네...숨소리가 느껴지고... 훌륭한 자료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