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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입니까?(2)”
+ 본 문 : 누가복음 18장 1절 - 8절 (신약성경 126쪽)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서로 축복 / “잘 되고 있습니다. 기도한대로 됩니다. 축복한대로 됩니다.”
“선포한 대로 됩니다. 내게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저를 따라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 “예수님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 “나는 예수님을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
지금 이 예배시간은 물론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입니까?”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참 믿음입니까?
다함께 따라서 선포하며 고백하겠습니다. “내 믿음은 참 믿음입니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참 믿음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용기 있는 믿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다루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일 낮 예배시간에 말씀드린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들’ 이었습니다.
다섯째로, 지금 우리가 가녀야 할 참 믿음은 ‘신실한 믿음’ 입니다.
흔히 ‘저 사람 참 믿음 좋다.’ 하는 말은 ‘저 사람 참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신실한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살아가는 삶에서 신실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아직도 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러분! 믿습니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해 준다고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입술로 고백했다고 해서, 다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 안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구하면 다 받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신실한 것만을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실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부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감정대로 살고 싶은 나를 자꾸 못 박아 가고, 부인해 가는 것이 신실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그만한 아픔을 내가 감수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잘못된 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가려고 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과 대가를 통해서,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확인되어지는 믿음’ 입니다.
신실하게 변화되어 가는 사람의 믿음과 삶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으니 좀 고쳐 주십시오."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쾌히 허락하시고 가서 고쳐 주시겠다고 말하자,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류하면서 말합니다.
“예수님!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명령만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집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칭찬하신 것은, 백부장의 믿음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진실 된 그리스도인인지, 누가 엉터리 그리스도인인지, 우리가 가진 믿음은 다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볼 수 있고, 우리 믿음 역시 다른 사람의 눈에 다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집과 좋은 가구입니까? 많은 돈입니까? 지식이나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십자가의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불평불만 전혀 없이, 늘 미소 지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편한 일, 칭찬받고 인정받을 만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하려하지 않는 궂은 일들을 찾아, 남모르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다시 채워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자기의 것을 포기하면서도 주님의 의를 드러냅니다.
나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인지, 자신의 삶을 믿음의 눈으로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을 향해 보여 줄 예수님의 흔적이 없다면,
아직도 우리의 믿음은 부족한 믿음이며, 아직까지 성숙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아, 저 사람은 참으로 멋진 그리스도인’ 이라는 칭송을 받고, 그로 인해 날마다 믿는 사람이,
나로 인하여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된 믿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확인되어지는 믿음’ 입니다.
일곱째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은 ‘자기를 발견하는 믿음’ 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는,
성경 말씀처럼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모두 합치면 42대이어야 하는데, 사람의 이름은 41대만 나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족보에 빠진,
1대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속의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발견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덟째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은 ‘자기를 사랑하고 가꾸는 믿음’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기를 발견하는 믿음’ 을 가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자동차가 고물차이면, 주차도 아무렇게나 하고, 그러다가 누가 부딪쳐도 별로입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주고 새 차를 샀을 때에는, 혹시라도 누가 와서 긁지나 않을까 정말로 조심하고,
차를 주차할 때도 아주 신경을 써서 안전한 곳에 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새 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였다면,
또 다시 더러운 세상 욕망이나, 죄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더럽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신을 발견했다면, 말씀으로 아름답게 가꾸고 사랑해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정말 나 자신을 사랑하고 가꾸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진정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정말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 8장 1절 말씀입니다.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꾸는 사람은 그 얼굴에 광채가 나고,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가꾸어 가면, 정말 우리의 속사람은 물론 겉 사람도 아름다워 집니다.
가끔 식당에 갔을 때, 벽에 성경 구절이 적혀 있거나 교회 달력이 붙어 있으면 그 주인에게,
“교회 다니시나 보지요?” 하고 물으면, “목사님이셔요?” 아니면 “교회 다니시는 분이셔요?” 하면,
기분이 좋은데 “아저씨도 교회 다니셔요?” 하고 되물으면, 기분이 씁쓰레 하면서 좀 그렇습니다.
얼마나 목사처럼 안 보였으면 “아저씨도 교회 다니셔요?’ 하고 물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식당이나 가게에 갔는데, 종업원들이 "목사님이세요?" 하고 물으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별로 안 맛있는 음식도 입맛이 땡기고, 맛있었다는 칭찬까지 해줍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 가게 됩니다.
속사람이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으면, 그 입으로 나오는 말이나 행동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 ‘자기를 사랑하고 가꾸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홉째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믿음’ 입니다.
‘빠삐용’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주인공이 그가 갇힌 감옥에서 수차례 탈출을 시도한 끝에,
비로소 감옥이 있는 악마의 섬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합니다. 주인공인 스티브 맥퀸은 탈출하기 전,
자기 친구인 더스틴 호프만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는 가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그렇게 주인공이 악마의 섬에서 벗어나 자유를 외칠 때, 남아 있던 친구는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네가 아무리 탈출에 성공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너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영화 주인공의 실제 인물은 프랑스의 ‘앙리 샤리에르’ 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원작소설 ‘빠삐용’ 을 보면, 왜 앙리 샤리에르가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앙리 샤리에르가 쓴 ‘빠삐용’ 의 속편 ‘방꼬’ 에 나옵니다.
1930년 앙리 샤리에르가 스무 살 때, 빠리 시내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그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실적에 눈이 먼 검사가 그 현장 근처에 있던 샤리에르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살인자로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검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아홉 번의 탈출 시도 끝에, 14년 만인 1944년에 악마의 섬에서 탈옥을 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여기까지가 끝이지만, 샤리에르는 남아메리카 곳곳을 다니면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형법상 30년이 지나 범죄 시효가 만료된 1967년에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빠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젊었을 때 지나다니던 추억의 거리, 부모님과 함께 지나다니던 장소들, 어릴 때 꿈꾸던,
미래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바꿉니다. 그때부터 샤리에르는 복수와 증오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37년 동안이나 자기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던 “자기” 라는 복수의 감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샤리에르는 정말로 행복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인이 진짜 행복자입니다.
이와는 반대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뒤마의 전기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 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14년 만에 탈옥을 합니다.
그는 그렇게 도망을 가다가, 어느 섬에 들어가 보물을 발견하여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모함했던 모든 사람들을 철저하게 다 죽입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피가 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것 같은데도, 그에게는 참 자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를 탈출하지 못한 채, 감옥 속에서 불행하게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을 합니다.
“요한아, 너의 어머니시다.” 하시면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유언에 제자 요한은 20대 청년시절부터 70대까지 근 50년간 예수님의 모친을 봉양합니다.
그렇게 약 50년이 지난 후 마리아가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유함을 주셨고, 자유함은 얻은,
제자 요한에게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요한이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믿음은 자유입니다. 우리가 모든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자유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참 믿음’ 입니다.
열 번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참 믿음은 ‘후회가 없는 삶이 있는 믿음’ 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호소하는 이야기를 통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가 계속 찾아가서 사정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한 일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그 다음 ‘그러나’ 라는 말 이후에 나옵니다.(눅 18:8하)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기도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하는 믿음을 참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은 ‘네가 원치 않는 상황 속에 빠져도, 네 계획이 어그러져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갖겠느냐? 하나님을 향해 네 시선을 고정시키겠느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해지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 믿음이 남에게 보이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너 자신을 가꾸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가 정말로 오직 믿음으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아쉬울 때, 내 욕망과 필요만을 위해 주님을 찾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나의 삶 자체가, 자식을 위한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됩니다.
출애굽기 29장에 보면, 아론이 죽은 후에 그 아들이 대제사장 자리를 이어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7일 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는데, 이 때 아론의 아들은 반드시 아론이 입었던 거룩한,
제사장의 성의를 입어야 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입었던 성의를 자식에게 이어받아 입도록 합니까?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제사장 옷을 입고, 성막에서 일주일 동안 예배드리면서 무얼 생각했을까요?
아론은 한때 금송아지를 만든 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성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성의를 입고 ‘아, 나도 내 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 고 생각하며,
아버지 아론 제사장처럼 살기를 힘썼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남기기를 원하는,
믿음의 유산이요. 우리가 부모로서 우리 자식들에게 입혀 주어줄 거룩한 성의가 되어야 합니다.
클레어 부츠 루스 여사는 ‘모든 인간은 단 한 줄로 그 일생이 표현되어진다.’고 말했습니다.
클레어 여사의 말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억할 때, 그에 대해 쓰여 진 한 권의 책으로 기억합니까?
아닙니다. 단 한 줄로 기억합니다. / ‘그 사람 어때?’ - ‘아, 그 사기꾼!’ 한 줄로 끝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 어때?” “그 사람? 진짜 예수님 같은 사람이야.” 단 한 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저와 여러분의 자식들도 그 부모를 한 줄의 글로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아휴!’ 하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그 자식들에게 참 믿음이라고 하는 거룩한 성의를 입혀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녀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요. 그분들의 믿음으로 우리가 이만큼 살지요.’ 합니다.
그 부모가 그 자식들에게 본이 되는 믿음과 삶으로, 거룩한 제사장 성의를 입혀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진심으로 가지기를 원하는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 / 용기 있는 믿음 /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심을 믿는 믿음 / 신실한 믿음 / 다른 사람들의 눈에 확인되어지는 믿음,
자기를 발견하는 믿음 / 자기를 사랑하고 가꾸는 믿음 /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후회함이 전혀 없고 아름다운 삶이 있는 정말로 복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할 참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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