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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밀서 외 4편
심사위원| 문정희(시인) 이숭원(문학평론가)
권혁웅(시인ㆍ문학평론가)
밀서 외 4편
내 몸에 들어가 있는 밤이 빠지지 않는다 나는 어제의 바람과 어제의 공
기에 익숙하여 두 번의 커피를 마시고 49년 전 죽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햇빛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놓는 순간 한숨처럼 식어가는 햇빛이 내 등에
꽂힌다
나는 기침을 하면서 8시간 전 저녁을 열고 들어간 당신의 눈알을 뱉어낸다
등에 꽂힌 햇빛이 유일한 국적이다 국외자의 비자를 가지고 단순한 미래를
통과할 때 사과의 심장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사과꽃은 누군가 찢어놓고 간
벤치 위 흰 적막이다
여기 없는 당신을 처형하고 나를 처형한다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아직 눈이 검은 어제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없던 몇 개의 근심과
고독이 외래 식물처럼 혀끝에서 개화한다 나는 밤의 혀를 만질 수 없다
어제의 입술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여기에 없고 죽음의
손끝으로 붉은 하늘을 벗겨보면 울음 가득한 당신의 심장이다 밤이 올챙이
같은 햇살들을 쏟아놓는 순간 나는 비에 젖지 않는 빗방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현대시> 2012년 11월호
뱀의 전설
뱀을 목에 걸면 뒤따라오던 길과 함께 뱀이 사라집니다 뱀을 떼어낸 자
리에는 죽은 길이 엎드려 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는 길은 심심하여 콩새
나 멧비둘기를 불러다 놀지만 죽은 길을 견디지 못한 새들이 날아가고 걸
어온 백 년이 싱거워집니다
가끔 몸속에 숨어있던 뱀들이 발기하고 불의 광기를 물의 서체로 옮겨
적는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피가 묻어 있는 노래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합
니다 돌 속에서 불을 꺼내어 어둠을 태우던 술 취한 어릿광대만 파도처럼
너풀거립니다
휘파람 소리에 잘게 쪼개지는 바위틈에서 겨울을 벗은 뱀들이 구물구물
기어나옵니다 미루나무의 아랫도리가 툭툭 갈라지고 연초록 풀숲 사이에서
죽은 길이 다시 흘러나옵니다 달의 아랫배가 불룩해지는 보름입니다
— <시인시각> 2012년 여름호
사냥꾼
총에 맞은 꿩이 비로소 꿩으로 태어난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
꿩의 일생은 폭발할 위험이 없다
머리에 넣은 꿩의 무게만큼 몸이 무거워진다
총성이 울린다
짧고 또렷하게 한 획으로 갈라지는 밤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입안에 넣어주는 논리학자도 있다
총을 내려놓는다 다시 바다가 출렁이고
아이들과 고라니가 풀밭을 줄였다 늘렸다 한다 둥근 풀밭이 공처럼 굴러다닌다
꿩이 날아간다
수시로 폭발하고 수시로 사라지는
하늘 어디에도 꿩은 없다
갓 태어난 원시인이 하늘을 꿩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 <시와표현> 2012년 가을호
사행천
뱀이 남긴 것은 밀애의 흔적입니다 어디에 가도 꽃의 언저리를 감도는
붉은 숨결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시냇물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한 마리
뱀으로 당신을 휘감습니다 가끔 반짝이는 웃음소리에 돌들이 물방울처럼
튀어오르고 나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만조의 바다가 됩니다
풀숲을 빠져나간 뱀이 허리띠로 감겨 있습니다 진달래 눈부신 해안선을
들고 봄의 옆구리로 향하던 사랑이었습니다 머리 흰 사내였던가요? 파도를
타고 내달리던 미명의 노래였던가요? 동해를 묶은 길고 눈부신 바닷길에서
풀려나오는 푸른 뱀의 무리를 봅니다 수만 마리 불멸의 젖은 영혼들입니다
마침내 멀리 돌아온 길이 하늘로 향합니다 밤바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산과 바다를 지나 슬픔의 곡절 다하는 허공에 닿습니다 온몸이 붉은 몸부림
으로 뜨겁습니다 공중으로 날아간 뱀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타고 분홍빛 봄비
로 내려옵니다 눈 밝은 사행천이 장음의 맑은 곡조로 흘러가는 연록의 들판
입니다
— <창작과비평> 2013년 여름호
등대
등대는 배가 고픕니다 등대를 어패류로 분류하나요?
땅끝에 서서 바다를 읽습니다. 등대는 걸어온 길만큼 매일 자라고 온몸이
빳빳하게 발기된 불기둥입니다
바다는 출렁이며 다가오다 살짝 등을 돌리고 멀어집니다 붉게 달아오른
몸이 빗물에 젖고 불이 꺼진 등대를 해풍이 대신 울다 갑니다 아무래도 등대는
고등동물입니다
저렇게 여러 날 굶은 짐승도 있습니까?
등대는 조금씩 기울어지며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길게 자라는
손톱을 물의 요정들이 다듬고, 파도를 이어 만든 옷자락을 숭어 떼가 들고
따라옵니다
물속에 가라앉은 등대는 이목구비 뚜렷한 태아입니다
등대는 아침마다 태어나 물 밖으로 나옵니다 갓 건져올린 커다란 물고기
입니다 온종일 서서 바다를 숨 쉬고 파도로 격동합니다
등대는 오늘도 목마른 불길입니다
— <문예중앙> 2013년 여름호
[수상 소감]
하이데거가 <언어로의 도상>에서 언급한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를 보면서 전율한 적이 있었다. 그런 시의 힘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등단 25년 만에 첫 상을 받게 되었다. 부족한 작품에 비점(批點)을 찍어주신 심사위원님들의 덕분이다. 돌아보니 문학에 대한 열망 하나로 버텨온 신산한 날들이었다. 좌절과 절망이 많았다. 다행히 지난해 펴낸 시집 <매혹의 지도>가 내 문학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동안 끝없는 모험과 갱신을 통해 나름대로 시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시인은 극한까지 가보는 자이다.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가는 그 길은 대중들의 시선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외진 곳이어서 누구나 쉽게 가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이 그 길 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상당수의 시인들이 주저하고 망설이는 곳. 그래서 아무도 근접하지 않는 곳. 바로 그 자리에서 시는 죽음을 먹고 태어난다. 주체가 소멸하고, 인습과 관념이 사라지는 낯설고 기이한 곳. 내던지고 저질러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곳. 그곳은 기호의 용량 밖으로 넘치는 잉여가 있는 곳이고, 혼돈과 무질서의 자리인 동시에 시의 원질이 꿈틀거리는 성소이다. 무정형의 에너지로 부글부글 끓는 땅이며 관념과 의미가 범접하지 못하고 눈부신 광휘와 원시의 숨결이 살아 붐비는 곳이다. 오랫동안 그곳이 내 시의 고적한 아지트였다.
시는 밀란 쿤데라의 말대로 ‘先 해석의 커튼’을 찢으며 매 순간 충돌하고 의외의 방향으로 확산하는 감각의 경련이며 파장이다. 그러한 인식을 동력으로 막다른 벽에 몸을 부딪치며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고자 하였다. 내 시는 정체불명의 물질이며 허깨비다. 눈이 여섯 개 달린 짐승이며 가까이 다가가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카프리섬의 돌멩이다. 그리하여 사막의 한가운데 떨어진 낯선 시의 운석을 들고 이게 뭐지, 뭐지 하다가 사람들의 눈과 고개가 180도 돌아가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지금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는 시가 없다. 이탈리아 밀라노에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도 스위스의 융프라우에도 시가 없다. 런던 템즈강에도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도 가회동 골목에도 시는 없다. 동해안 봉포항 밤바다에도, 거문도 앞바다에도 시가 없다. 나는 지금 그 ‘없는 시’를 쓰고 있다. 가당치 않은 짓이라고 지리산 노고단이 슬며시 돌아앉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그 ‘없는 시’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나는 다시 혼자 걸어간다. 그 길, 참 멀고 아득할 것이다.
[홍일표 연보]
1958년 충남 천안군 입장면 흑암리 17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71년 도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본격적으로 갖게 됨. 친구들과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하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냄. 당시 헤르만 헤세, 생텍쥐페리, 카프카, 다자이오사무, 카잔자키스, 도스토옙스키, 손창섭, 장용학, 정현종, 황동규 등의 작품을 읽음. 고2 때 교내 백일장에서 운문부 장원을 함.
집 가까이 살던 박석수 시인(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등단)을 만남. 박석수 시인이 선망의 대상이 됨. 그가 부인과 함께 운영하던 <현대서점>을 자주 찾게 됨.
1976년 12월 학원문학상, 학생중앙문학상을 동시 수상하여 큰 기쁨을 누림. 이 일을 기회로 당시 <학생중앙>에 근무했던 소설가 조세희 선생을 처음 만남.
1977년 전국 규모의 시동인회 <새벽>을 결성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함. 김요섭 시인의 권유로 시를 접고 소설을 쓰게 됨. 각종 문예지 및 신춘문예 공모에서 번번이 최종심에서 낙선함.
1982년 9월 이천양정여고 국어교사로 부임함. 1987년까지 소설 습작을 계속함. 극도의 절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함.
1987년 <동서문학> 장편소설 공모에서 최종 낙선한 후 습작한 소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함.
1988년 6월 <심상>신인상에 당선되어 시단에 나옴.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상찬을 듣고 등단은 했으나 선배도, 후배도, 지인도 없는 상태에서 악전고투하며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섬.
1990년 서울 대동중학교로 전근. 이듬해 대동세무고등학교로 다시 자리를 옮김.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재등단의 과정을 거침. 등단 후 세 권의 시집을 상재했으나 모두 폐기처분함. 약력에서도 시집 출판 건을 밝히지 않음. 인연, 지연, 학연 없이 철저한 무명시인으로 외로운 시절을 보냄.
1994년 월간 <한국인>의 청탁을 받고 본격적으로 역사에세이를 쓰기 시작함. 그 후 <지방행정><디지털포스트>와 각종 사보 등에 약 15년간 역사 에세이를 연재함.
1998년 역사에세이집 <죽사발 웃음 밥사발 눈물>을 펴냄
2002년 선배 시인들과 함께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을 창간하고 초대 편집장을 맡아 5년간 일함.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을 받아 역사에세이집 <조선시대 인물 기행>(화남)을 펴냄.
2006년 1월 백담사 만해마을 집필실에서 한 달간 생활함. 가장 충일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음. 그 후 철원 호국사, 제주도 마라도, 담양 세설원, 강원도 고성, 거문도 등을 전전하며 시를 씀.
2007년 시집<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천년의 시작)을 펴냄.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지원금을 받음.
2010년 10월 시단에서 가까이 지내던 신현정 시인 1주기를 맞아 미망인 이정휘 여사, 최호일 시인 등과 함께 유고시집 <화창한 날>(세계사)을 간행하고, 출판문화회관에서 추모 시제를 치름.
2011년 <문화저널21>편집위원, <詩로 여는 세상>주간을 맡아 일하기 시작함.
2012년 4월 시집<매혹의 지도>를 문예중앙에서 출간함. 새롭게 시작 방향을 바꾸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 시집으로 주위에서 호평을 들음. 등단 25년 만에 처음으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짐.
2012년 5월 <문화저널21>에 연재했던 현대시 평설을 모아 평설집<홀림의 풍경들>을 푸른사상사에서 출간함. 노작문학상 추천 우수작으로 선정되었고, 그 후 여러 문학상 후보로 거론됨.
2012년 8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영국 등을 여행하고, 이듬해 1월에는 호주, 뉴질랜드 등을 여행함.
2012년 11월 월간 현대시에 <이달의 시인>으로 집중 소개됨.
2013년 1월 '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 (시 부문) 시집 <매혹의 지도> 선정
2013년 3월 무기명 심사로 이루어진, <시로여는세상> 제정 제2회 창작 지원금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주관 잡지사 주간이라는 위치 때문에 수혜 포기함.
2013년 7월 제8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됨.
[지리산문학상 심사평]
이번 제8회 지리산문학상 후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시산맥시회 회원들의 1차 추천을 받았다. 추천 받은 시인들 중 이미 문학상을 여러 개 받은 시인, 그리고 중견 시인 이상은 시산맥 편집부에서 제외를 하고 득점순으로 8명의 후보를 2차로 추천하였다.
심사대상은 최근 1년간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 및 최근 1년내에 발간한 시집이다. 심사대상이 된 작품과 시집은 김륭 시인의 「무릎 외전」 외 11편, 김이듬 시인의 「내 눈을 감기세요」 외 9편, 류인서 시집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침묵 수도원」 외 9편, 복효근 시인의 「영원에 이르는 법」 외 9편, 서안나 시인의 「애월 혹은」 외 10편 및 시집 <립스틱 발달사>(천년의 시작), 이영식 시인의 「폐가의 식사법」 외 9편,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 외 9편, 홍일표 시인의 「밀서」 외 9편으로 무기명 심사를 하였다.
좋은 시인들, 뛰어난 시들 앞에서는 심사평이란 걸 쓰기가 쑥스럽다. 좋은 시는 심사를 받는 게 아니라 심사자의 안목을 심사하기 때문이다. 빛나는 시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세 분의 시인이 남았다.
서안나의 시들은 간절한 그리움을 중심선으로 삼고 있다. 그리움이란 삶의 무게중심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이다. 그것이 한없는 기울어짐을 낳는다. 이 기울기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간절하지 않은 그리움까지 품는다면 그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효근의 시는 평이해 보이지만 그 속에 품은 촌철살인은 결코 평이하지 않다. 부드럽게, 사물의 윤곽을 있는 그대로 흉내 내는 물의 언어 같다. 사물을 감싸 안아 흐르고 때로는 부질없이 두들기는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 바위를 쪼개는 서슬 같은 언어가 있다. 자유자재가 전지전능으로 느껴지지만 않는다면, 곧 시단이 흥건해질 것이다.
홍일표의 시를 수상작으로 골랐다. 만장일치였다. 이 시인의 빛나는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충돌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섬광과 의미들 너머에 숨 쉬고 있는 사유의 크기는 우리 시가 다다른 한 정점이다. 이 정점이 바로 지리산문학상의 높이일 것이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문정희(시인) 이숭원(문학평론가) 권혁웅(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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