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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로 좌회전해서 약 1.5km 가거나, 경부고속도로 안성IC에서
서평택JC 방면으로 가다 청북IC에서 발안 방면으로 가다 고잔 저수
지(만남의 광장)에서 우회전하여 1.5km 가면 성지가 있다.
[대중교통]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발안이나 안중까지 오셔서 발안
에서 안중 사이에 있는 느런 휴게소 정류장이나, 고잔 저수지 정류
장에서 하차하신 후, 도보로 15분에서 20분 정도 걸어오시면 요당리
성지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요당리 성지는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은 양간 공소라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 공소(현재의 양지)와 깊이 연계되어 활발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또한 바닷물의 유입으로 뱃길이 열렸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앙의 요람지였다.
이곳 요당리 성지에서 태어났거나 순교한 분들 가운데에는 장주기 요셉 성인과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 중에 있는 장 토마스 등 여러 명의 순교자가 있다. 또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의 책임하에 이곳에서 운영되었고, 민극가 성인과 함께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활동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와 이분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의 얼이 서려 있다.◀
[굿 뉴우스 홈페이지에서]
◆요당리 성지? 도대체 어디에 있는 성지일까?
수원교구 ‘요당리성지’(전담 김대영 신부)를 찾아 나서는 길, 지명조차 생소한 곳이기에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어느 때보다 설렌다.
성지 누리방(www.yodangshrine.kr)에서 내려 받은 지도를 따라 발안에서 안중 방향으로 39번 국도를 달리다 보니 발안산업단지(향남제약공단)를 지나면서 ‘요당리성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안내대로 ‘고잔성농원’ 입구로 국도를 빠져나와 지하도 아래로 좌회전 한 후 2km쯤 시골길을 달리니 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년 넘게 우리들 기억에서 잊혔던 곳. 하지만 이곳만큼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얼과 발자취가 스며있는 곳도 드물다.
‘느지지’로 불렸던 요당리성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는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이 태어나 신앙 기반을 다지고 주위 친척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또 장씨 집성촌으로써 하느님의 종 125위에 포함돼 시복시성이 추진 중인 장 토마스(1815-1866, 장주기 성인의 6촌)를 비롯해 장씨 일가의 터전이기도 하다.
◆ 장주기(요셉) 성인 신앙의 요람터
장주기 요셉 성인은 이곳에서 성장하며 세례를 받고(1826) 가족과 일가친척에 복음을 전했다. 박해를 피해 배론성지(원주교구)로 이주(1843)한 후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봉헌하고,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등 신학생 및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이후 병인박해(1866)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1866년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충남 보령, 현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황석두 루카 회장 등과 함께 참수치명 당했다.
이곳 출신 순교자로는 지 타대오, 림 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흥원여(가롤로)와 장주기 성인의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또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지낸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이 신앙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체포되어 순교한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이를 도운 손경서(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있기도 하다.
◆ 선조들의 숨결과 얼, 박해의 피로 이룩한 요당리
특히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옛 지명 : 양간공소)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바닷물이 유입돼 뱃길이 열렸던 당시에는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며,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를 통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했던 신앙의 요람이라고 전해진다.
약 2만 500㎡(6200평) 부지에 아담한 성전과 깔끔한 조경이 참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예쁜 성지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그 흔한 십자가나 성모상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천막 성전과 컨테이너 사무실, 화장실이 전부이던 성지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불과 2년 반 전이다. 요당리성지 전담 김대영 신부는 2006년 12월 24일 이곳에 천막을 세우고 첫 미사를 봉헌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계단을 몇 개 오르니 ‘기도의 광장’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중앙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왼쪽으로는 로사리오 길(묵주기도 길)이 조성돼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묘사한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가 이숙자(체칠리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가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많은 기도와 묵상 끝에 나온 걸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도의 광장’ 중앙의 성모자상은 어딘지 낯이 많이 익다 싶더니 남양성모성지의 성모상과 같은 것이다. 요당리성지 개발 초기에 남양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14처를 따라 십자가의 길 기도가 끝날 무렵이면 ‘성역화 광장’에 이른다. 대형 십자가 아래로 앞서 언급한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물론 시신이 안장돼 있지 않은 의묘(擬墓)지만 성지에서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순교선조들을 현양하고 있다.
묘역에 참배한 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잔디밭 너머로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08년 3월에 착공해 1년 3개월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9년 6월 4일 입당미사를 봉헌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 나무 기둥과 서까래에서 솟아나는 은은한 나무향기를 맡고 벽화의 아름다움을 즐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대성당과 소성당 성전 벽화는 도예가 박성백(모세, 대구 신암동본당)씨 작품이다.
제대 앞 십자고상은 지금까지 본 성전 십자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십자가상이다. 힘없이 늘어진 팔과 어깨를 보면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느껴진다.
◆ 관광 아닌 참 순례의 성지
소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역시 참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조각가 이효주(아나스타시아, 서울 중림동 본당)씨가 1998년 2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중림동(약현) 성당의 불에 탄 목재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불에 타다 남은 목재에서 아름다운 성물을 조각해 낸 것은 모진 박해를 겪고도 굳은 신앙의 싹을 피워낸 선조들의 숨결과 닮았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허허벌판의 초라한 모습이던 요당리성지에 이렇듯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지고 각종 성물이 갖춰진 데는 방윤순(마리아, 79, 수원교구 과천 별양동 본당)씨의 봉헌이 큰 힘이 됐다. 경제 불황의 여파로 성지에도 후원이 크게 줄고 있는 상황에서 일궈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지전담 김대영 신부는 “순례객들이 좀 더 경건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성당 건축과 조경공사를 서둘렀다”면서 “순교자들의 피와 얼이 서려있는 요당리성지를 순례하면 공경심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지순례는 관광이 아닌 말 그대
로 ‘순례’입니다. 단순히 볼거리를 찾기 보다는 가족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얻어 가시면 좋을 것입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성지미사가 봉헌된다. 단체 순례객들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별도의 미사봉헌과 하루 피정(묘역참배, 미사, 유해친구, 영성강의, 성시간)도 가능하다. 사무실에 미리 요청하면 식사(한식 뷔페)도 주문해 준다. [출처 : 평화신문, 2009년 9월 6일, 서영호 기자]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장주기 요셉 성인의 신앙 탄생지이며 성장지인 교우촌]
요당리는 박해 초기 시대부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서, 장주기 요셉 성인과, 하느님의 종 장 토마스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 최초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이다. 정화경 성인이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던 곳이다.
요당리(蓼塘里)란 지명은 ‘여뀌 풀(蓼)이 무성한 못가의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경우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 쪽에서 현재의 발안천을 따라 고잔 저수지를 거쳐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일대까지 밀려 들어왔다. 현재는 남양 방조제로 가로막혀 바닷물의 유입은 중단된 상태다.
이곳은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 성인과 장주기 성인의 6촌 장 토마스(1815~1866) 외에도 순교자 지 타대오(다두, 1819~1869), 임치선(1845~1871, 베드로), 조명오(曺明五, 1823~1872, 베드로), 홍기현(洪基賢, 1851~1871, 베드로), 홍원여(1850~1872, 가롤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1803년 요당리 느지지(현 요당3리) 마을에서 태어난 장주기 요셉 성인은 1826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에 의해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1843년부터 제천 배론에 정착하였다.
1855년 ‘성 요셉 신학당’이 설립되자 메스트르 신부에게 초가 3칸짜리 자기 집을 학교 건물로 내주었으며, 자신은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黃錫斗, 재건, 1813~1866, 루카)와 같이 충청도 갈매못으로 내려가 64세의 나이로 3월 30일에 참수 치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한국 교회 최초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서 그 책임을 맡았고, 끝내는 순교한 민극가(閔克可, 1787~1840, 스테파노)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 회장을 맡으며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1807~1840, 안드레아) 성인이 활동하던 곳이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성인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상게’로 피신하였다가 순교하였으며, 성인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1799~1839, 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공소 회장을 맡으며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은 충청도 정산 출신으로 양간 지방(화성시 양감면)으로 이사와 회장 소임을 맡았고, 앵베르 주교가 상게로 피신할 때 도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순진했던 정화경은 배교자 김여상의 꾀임에 빠져 앵베르 주교의 피신처를 알려 주었고, 또 다른 포졸에게 속아 모방 신부의 명을 받아 상경하던 최형 베드로를 잡히게 하기도 하였다. 결국 세번째 잡혀 포도청에 올라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교수형으로 치명하였다.
▒ 민극가의 《삼세대의(三世大義)》
기해박해 순교자 민극가 스테파노가 지은 천주가사다. 삼세(三世)는 천당·지옥·십계(현세)를 말한다. 신자들이 삼세의 의미를 잘 새겨 현세에서 교리를 실천해 내세에 천당에 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 저술했다. 총 287구로 형식상 4?4조, 4음 보격을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삼세대의》는 모두 원본의 전사본이다.
◆ 장주기 요셉 순교 이후 일화 : 시신 보존
갈매못의 수영에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요셉이 치명한 후 그 시신 중 황석두 루카만이 가족들에게 넘겨지고 나머지 시신은 조선 법에 따라 형장 모래밭에 묻혀 있었다. 근처에 살던 신자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낼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서슬퍼런 박해의 칼날이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순교지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이 내려와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다녔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장주기 요셉의 아들 장노첨이었다. 그는 만나는 신자들을 붙들며 순교자의 장례를 치르자고 설득하였다. 감시의 눈이 번뜩이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신자들을 찾게 되었냐고 묻는 말에 그는 "제 부친이 꿈에 와서 '아무데 사는 아무 사람이 내 시체를 거두려하는데 너는 무심히 있느냐?“하고 두세 번 나타나시기에 당신의 이름을 알고 찾아 왔습니다." 하자 그 용기에 감복한 신자들이 4월 8일에 같이 장사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때 장노첨은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 자기를 도와줄 사람들을 구해 약속한 날에 신자들을 찾아왔다. 그 중에는 장주기 요셉의 조카 장치선도 있었다. 그는 리델 신부를 조선 밖에서 탈출시켰던 사람으로 나중에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잡혀 교수 치명하였다. 이때 장치선은 직접 장례에는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조달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아무튼 장주기 요셉의 아들과 용기 있는 신자들이 모여 목숨을 걸고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나섰는데 시신을 묻은 곳에 잔돌로 봉분처럼 쌓아놓았기 때문에 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근처에 주막이 있으므로 소리를 낼 수 없어 맨손으로 무덤을 헐어 시신을 찾았다. 이때 시신들은 몸과 목이 맞춰져 있었고 허리에 두른 칡 줄기에 나무패가 달려 있었는데 한글로 성(姓)을 써놓아 시신을 구별할 수 있었다. 장노첨 등은 네 구의 시신을 널빤지에 놓고 삼베로 감은 다음 지게에 얹고 거기서 10리 밖에 떨어진 곳에 이장할 수 있었다. 남의 눈을 피해 밤에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멀리 가지 못하고 하나의 봉분에 구덩이를 네 개 파서 각각 모실 수밖에 없었다.
7월에 가서야 다시 신자들이 모여 시신을 남포 서들골로 안전하게 이장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장 때는 장노첨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의 노력과 주선이 없었더라면 네 명의 순교자 시신이 안전하게 보존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신은 1882년 블랑 주교의 명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1900년 명동 성당에 옮겨졌다가 1967년 절두산 지하 성당에 모셔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장주기 요셉 순교 이후 일화 : 가족들의 운명
장주기 성인의 치명 이후 가족들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박해가 극심해지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에 따라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가서 어떤 동네에 숨어살았다.
어느 날 장주기 요셉의 손자가 길에 나가 놀다가 포졸들이 앞잡이 배교자를 앞세우고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손자가 급히 들어와서 본 대로 얘기하자 어른들이 상의하여 다른 곳으로 피하기로 했다. 하지만 때마침 장주기 요셉의 아들이 외출하여 날이 저물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온 집안이 다 마음을 졸이고 오장이 타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도망갈 차비를 하여 옷가지와 물건을 모두 싸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마음이 답답해지자 포교들의 눈을 속이려고 다듬이질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우고 집안으로 처 들어 왔다.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배교자가 큰집 식구들만 대어주고 무슨 마음인지 장주기 요셉의 아내와 손자는 대어 주지 아니 하며, '저 사람들은 다 모르는 사람이다' 하였다. 포교들이 그 말을 듣고 큰집 식구들만 묶어 앉히고, "저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이냐?' 묻자 묶여있던 이들이 한결같이 "저 사람들은 이사 가는 사람으로서 날이 저물어 더 가지 못하고 내 집에 우연히 들어와 오늘 밤에 머무는 중이다"고 대답하였다. 포교들이 살펴보니 이삿짐도 한편에 있고 또한 배교자도 대어주지 아니 하여 그들을 가만 두었다.
조금 지나서 밖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나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려 할 때에 별안간 방에 켜놓은 불이 꺼져 버렸다. 여러 식구들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가 온 줄을 알고 포교의 눈에 들키지 않게 할 생각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느냐?" 하였다. 방으로 들어오려 하던 장주기 요셉의 아들이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아뿔사! 밤에 길을 잘못 들어 남의 집으로 들어왔으니 대단히 미안합니다." 하고 바로 도망을 쳤다. 그가 다른 데에서 밤을 새고 그 이튿날 와 보니 큰댁 어른들은 전부 포교의 손에 잡혀가고(여기서 잡혀간 큰댁 식구들은 1868년 서울에서 잡힌 장치선의 가족일 가능성이 있다) 자기 식구들만 남아 있었다.
■ 순교자
◆ 성 장주기 요셉(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민극가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7년 뒤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극가는 집을 나와 서울 경기 지역을 전전하며 교리 서적을 팔아 생활하였다. 또 어디서나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 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하였거나 마음이 약해진 교우들에게 신앙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충청도 정산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은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이곳에서 회장을 맡아 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의 마음을 북돋아 주었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 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9월에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이듬해 1월 23일 33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 장주기 요셉, 성 민극가 스테파노, 성 정화경 안드레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장주기 요셉, 성 민극가 스테파노, 성 정화경 안드레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전교에 대한 열의를 키우도록 빌어 주소서.
◆ 장 토마스 (1815∼186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 찾아가는 길
요당리성지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
T. 031) 353-9725 F 353-9785 미사 오전 11시
요당리성지는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은 양간 공소라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 공소(현재의 양지)와 깊이 연계되어 활발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또한 바닷물의 유입으로 뱃길이 열렸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앙의 요람지였다.
이곳 요당리 성지에서 태어났거나 순교한 분들 가운데에는 장주기 요셉 성인과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중에 있는 장 토마스 등 여러 명의 순교자가 있다. 또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의 책임하에 이곳에서 운영되었고, 민극가 성인과 함께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활동하셨던 곳이기도 하다,(후략)
-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著
< 성지 입구 >
< 묵주의 기도 들어가기 >
< 십자가의 길 >
< 성당 전경 >
< 성전 내부 >
< 스테인드글라스 >
< 제 대 >
< 순교자 무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