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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꿈이던 동생의 죽음-
증언자: 임정식(남)/임정구(형)
생년월일: 1960.(당시 나이 20세)
직 업: 재수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1988.9
개 요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벽돌공장을 하는 집안일을 도우고 있던 임정식 씨는 1980년 5월 22일 오후에 화정동 인천약국 뒤에 있는 공터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어머니를 구하려다
동생 정식이는 1980년 당시 숭의실고를 졸업하고 화정동 영산강사업소 근처에 있던 집에서 벽돌공장 일을 돕고 있었다. 5월 22일 오후 5시경 동네 앞에서 느닷없이 총소리가 났다. 상무대 쪽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올라오는 계엄군들이 무조건 동네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무슨 협상인가를 하다가 잘 안 되어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은 깜짝 놀라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있던 외삼촌이 다리에 총알 파편을 맞았다.
우리 집은 도로변에 인접해 있어서 이 광경이 훤히 보였는데, 어머니가 삼촌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집을 나섰다. 이때 집 근처 인천약국 뒤 공터에 숨어 있던 동생이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어머니가 위험할까봐 골목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급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나왔다.
"어머니 위험해요."
순간 그곳을 지나던 군인들에 의해 동생은 총에 왼쪽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도 총알이 귀 부근을 뚫고 지나가는 상처를 입었고, 벽돌공장 기술자 한 사람도 총에 맞아 죽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당황한 어머니는 급한 김에 정식이를 아무 집에나 옮겨놓고 몸을 숨겼다.
나와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니 동생 정식이는 아직 죽지는 않고 한 시간 이상이나 피를 흘리며 방치되어 있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식이는 계속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말은 못 했지만 의식은 있어 보였다.
잠시 후 군인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골목에 들어와 부상자들은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나가 혹시라도 살릴 수 있을까 하여 군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군인들은 군용 트럭에 부상자들만 태우고 보호자들은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마침 외삼촌이 약하나마 부상을 입어서 함께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외삼촌에게 들으니 그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기갑학교로 싣고 갔다고 했다. 저녁 8시가 돼서야 통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때까지 치료를 받지 못한 정식이는 죽고 말았다. 외삼촌은 바로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고, 정식이는 군인들이 따로 격리시켜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23일 우리 식구들이 통합병원으로 가서 동생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동생이 죽었다는 것만 알려줄 뿐 보여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소식 오기만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사흘 만에 통보가 왔다.
25일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통합병원으로 가서 시체를 확인하고 오셨다. 통합 병원에 적혀 있는 사망자 명단의 각 이름들 앞에는 '폭도 000'이라고 씌어 있더라고 했다. 그날은 시체확인만 하고 돌아와 다음 날 다시 가니까 식구들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백일사격장에 매장해 버린 후였다. 즉시 그곳으로 가보니 우리 정식이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었다. 시체는 입관까지 시켜서 묻어놓았는데, 각 무덤 앞에 이름이 씌어진 팻말이 꽂혀 있었다. 우리 정식이가 묻혀 있는 곳을 파 보니 관 뚜껑이 벌어질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우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동생을 효천 연탄공장 건너편 산에 있는 기독교인 묘역에 묻어주었다.
폭도라는 누명은 벗겨졌지만
당시에 아버님은 무직이셨는데, 어머니께서 생활력이 강하고 강단이 있는 분이라서 직접 시멘트 벽돌공장을 운영하셨다. 벽돌공장이 잘 돼 우리 집은 그런대로 넉넉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동생 정식이는 별문제없이 자랐고, 중 1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 늘 목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교회의 학생부 회장을 지냈었고, 1980년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부에서 활동했다. 항시 어른스럽고 어른들 말도 잘 듣는 착한 애였는데 그렇게 비명에 가고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억울하다는 생각에 동생을 그렇게 죽인 놈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동생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고 나자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약 3개월 동안 곡기를 끊으셨다. 원래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3개월이 지나고 나니 뼈에다 가죽만 발라놓은 것 같았다. 벽돌공장도 제대로 운영이 안 되었다. 나는 그때 다른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상황이어서 공장일을 도와주지 못했다.
1981년 원기를 회복하신 어머니께서 다시 살아보시겠다고 아버님과 사업차 구례를 가신 적이 있었다. 섬진강 모래가 전국에서 가장 질이 곱고 좋다고 하여 외국에 한창 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그 일을 하시려고 가셨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돌아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목뼈를 크게 다치셨다. 어머니는 6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꼼짝없이 누워만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동생을 잃은 슬픔을 씻기도 전에 어머님마저 그렇게 돌아가시자 우리 집은 엉망이 되어갔다. 지금은 내가 사금 채취하는 일을 하면서 아버님을 모시고 살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일이 아니어서 생활이 곤란한 편이다.
동생은 현재까지도 기독교인 묘지에 그대로 있다. 망월동으로 이장하려고 했으나 현재 묘지가 부족한 상태라 넓은 곳으로 옮기면 그때 이장하려고 하고 있다.
유족회에는 아버님이 올 정월부터 나가시고 계시다. 그 전에는 유족회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1980년 이후 관에서 조사해 간 적이 두어 번 있었다. 한번은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법원 제7검사실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군측에서 우리 정식이가 죽은 것이 군인들의 총 M16에 맞은 것이 아니라 시위대들의 카빈총에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덮어씌우려 했다. 나는 사고 당시에 목격자가 많았음을 주장하면서 검사의 요청대로 몇 명의 증인 도장을 받아다 제출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던 검사의 말과는 달리 정식이는 폭도라는 누명이 벗겨지고 4백만 원의 보상금이 나왔다.
그 후로는 잠잠했었는데, 최근에 구청 복지과장이라는 사람과 동서기가 일종의 유족들 실태를 파악한다고 조사를 나온 적이 있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외의 탄압이나 간섭은 없었다. 아버님이 통반장을 11년이나 하셔서 동사무소 직원들과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생이 무고하게 죽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그런 것 같았다.
지금도 오월은
지금도 5.18에 대해서 유언비어라느니 하면서 터무니없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 나는 5월에 대한 일들이 역사적인 것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5공특위니, 광주특위니 하며 떠들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은 정확한 진상규명이 되기 힘들 것 같다. 학살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데 그들 밑에서 어떻게 진상이 밝혀질 수 있겠는가. 유족회에 나가 보니 유족들 사이에도 입장 통일이 안 되어 자꾸 정부의 회유나 이간 책동에 말려드는 것 같다. 5.18 이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니만큼 서로 힘을 합쳐 불의와 맞서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양동에 사는 유족이 불법오락실을 차리고 버젓이 '5.18 유족'이라는 간판까지 붙여놓고 영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그랬을까도 생각했지만 보기에 좋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생활이 어려운 희생자 가족들을 그런 식으로 회유하지 말고 피해자 모두에게 최소한의 생계보장이라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어려우면 부상자들이라도 하다 못해 정기적으로 치료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렵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내 힘으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조사.정리 장옥근, 임금옥)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한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