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 및 사당이 있는 곳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이범석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17인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두환대통령 일행의 미얀마 방문계획을 사전에 인지한 북한은 화물선에 북한군 정찰국 특공부대 소속 진모 소좌와 강민철 상위를 탑승 시키고 양곤항에 정박한 화물선에서 야간에 소형보트를 이용 침투하였고 아웅산 사당 천장에 크레모아형 폭발물을 2발을 설치하였는데 수행원들이 양쪽으로 도열할 것을 가정하여 크레모아 파편 비산 각도를 조정한 것입니다. 폭발 시키는 방법은 원격 무선 조종으로 준비를 하였습니다. 10월 9일 수행원들이 미리 도착하여 도열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 특공요원들이 전두환대통령이 입장한 것으로 판단하여 폭발 스위치를 작동 시켰으나 한발만 터지고 나머지 한발은 불발되어 수행원 약 30여명중 17명만 사망한 최악의 테러입니다. 테러 직 후 북한 특공요원들은 배를 타고 화물선으로 도망가다 미얀마 당국에 붙잡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강민철은 작년(2008년?)에 미얀마 감옥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국교가 단절되어서 그랬겠지만 지금 까지도 북한에서 자기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고 강민철에 대해서도 너무도 무관심하여 죽기전에 한국기자에게는 북한에 대해서 너무나 서운하다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용해 먹고 필요없으면 내팽개치는 의리와 인간미가 조금도 없는 집단입니다.
그러면 아웅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웅산은 현재 미얀마 군부에 의해서 가택 연금되어 있는 아웅산 수치여사의 부친입니다. 아웅산 또는 온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웅산은 버어마(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되어 있는 것을 독립 시키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미얀마에 있었는데 일본은 베트남을 점령하고 미얀마를 침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침략 목적은 미얀마와 인도 접경에 임팔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미얀마북부를 통과하는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를 통하여 수많은 군수물자가 중국 운남성 사천성의 중경 장개석 정부로 운반되고 항일운동에 사용되자 그것을 막기 위해 미얀마로 쳐들어 간 것입니다.베트남에서 미얀마를 침공하려면 태국을 거쳐야 하는데 일본군의 침공을 미리 감지한 미얀마와 태국은 협정을 합니다. 만약 일본군이 태국을 침공하면 미얀마에 연락을 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태국은 일본군과 미리 내통하여 일본군을 비밀리에 통과 시키고 대신 일본군은 태국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고 통과하여 미얀마를 침공하고 아웅산 협조하에 영국군을 미얀마에서 몰아냅니다.
이사건 때문에 지금도 미얀마와 태국은 사이가 아주 나쁩니다. 유일하게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은 나라가 태국과 대만입니다.
영국 대신에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게 되었으나 독립은 요원하고 일본군의 만행이 심하자 아웅산은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이죠. 겉으로는 일본군에게 협조하는 척 하면서 은밀하게 영국군과 내통을 합니다.
드디어 준비를 완료한 일본군은 미얀마군과 협동으로 미얀마 정글을 관통하여 인도 접경 도시인 임팔을 목표로 진격하는데 사전에 영국군과 내통한 아웅산부대의 정보와 미얀마군의 역습,영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입고 대패한 전투였습니다.일설에 의하면 일본군 약 30만명이 정글속에서 굶어 죽고 영국군의 공격에 죽었다고 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아웅산장군을 수반으로 버어마 국명으로 독립을 하였으나 반대파의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우리나라로 보면 백범 김구선생님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미얀마(버어마)는 광대한 농토와 풍부한 지하자원,순박하고 근면한 국민성으로 1950년,60년대 아시아에서는 부국이였고 우탄트 유엔사무총장 까지 배출한 민주주의공화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부 독재하에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국가로 전락된 상태이며 미래가 불투명한 나라입니다.
국가체제와 지도자의 무능력이 국민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북한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