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분인 구상시인을 찾아서.. 구상문학관 소재지; 경북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5-84번지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문학관"은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른 구상선생의 선양과 한국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고 22년간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관수재를 복원하여 시인의 삶과 문학과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건립되었습니다.
"구상문학관"은 200여평의 규모의 2층 건물로, 1층에는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문우와 주고 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2,000여권의 소장도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렀던 관수재(觀水齋)는 관람객들에게 시인의 문학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자료; 구상문학관홈페이지,http://kusang.chilgok.go.kr/)
▲ 그리스도폴의 강 구상시비
구상문학관은 시인의 생존 시기였던 2002년 10월 4일 개관하였다. 2004년 작고하셨다.
본명은 상준(常浚). 초기에는 공산치하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극복하고 상승하려는 동경과 희구를 노래하다가 차츰 그리스도교 사상을 읊었다.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 "여명도 黎明圖" "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 "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 "유언"(1948) "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대리석에 정을 치듯 피땀을 흘려가며 온정신을 기울여 시를 써야 한다'는 그는 시창작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는 동시에 이것의 융합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경주했다. 희곡과 시나리오에도 손을 대어 "수치"(자유문학, 1963. 2) "갈매기의 묘지"(세대, 1967. 4) 등을 썼다.
'6·25전쟁중 고초를 함께 한 대구 시민'에게 바친다는 사회시평집(社會時評集) "민주고발"은 (대구매일신문)에 발표했던 칼럼을 모은 것으로 자유당 때의 불의를 고발한 것이다.
수상집 "부언부어 浮言浮語"(1961)와 사회문제논쟁집 "예술과 인생의 시비"(1963)를 펴냈다.
▲ 수주 변영로회갑에서 뒷줄의 정덕창(장군),이상로,조경희,전숙희등이 보이며 우츨앞줄에 변종하(화가)변영로,이종(음악가)와 좌측끝이 이무영,구상시인이다.
▲ 관수재(觀水齋)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는다란 뜻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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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타리 너머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노루귀
첫댓글 정말 한달에 한번이라도 여행가는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학기행이라도 올해는 실천해 보아야 겠어요..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