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은 선사시대부터, 즉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공도읍의 고인돌이나 원곡면의 무문토기 그리고 안법고등학교 전시장에 있는 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안성곳곳에서 발견되는 석기시대의 유물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도 흔적이 나오는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남방한계가 안성 훨씬 이남이었던 점과 안성의 옛지명에서 나타나는 ‘홀’이라는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안성의 옛지명이 사복홀, 내혜홀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 ‘홀’이라는 명칭은 고구려의 옛지명에만 나타나는 명칭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흥왕 이후 신라말기 까지는 대략 신라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안성지역에는 지금 남아있는 확인된 산성의 수만 14개에 달하는 만큼 옛부터 그 지리적 요충지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삼국간에 치열한 각축이 있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안성이 사서를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근래 드라마 태조왕건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말기 이곳 안성의 죽주산성에 <기훤>이 자리잡고 <궁예>가 그 휘하에서 ‘미륵’의 꿈을 키우면서라 할 것입니다.
나말려초의 혼란한 시기--호족들이 제각기 한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왕을 꿈꾸던 시기--에 안성은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어 진 듯 합니다. 이는 근래 그 2차 발굴조사가 끝난 ‘봉업사’의 위상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 창건 시기가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신라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봉업사를-- 奉(받들 봉)들어가는 사찰이 태조 왕건과 밀접한 연관을 맺은 태조왕건의 진영이 모셔졌던 사찰--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안성은 뭐니 뭐니 해도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낳게 한 안성장의 번성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요건을 갖춘 안성은 상업이 크게 발달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국 3대시장의 하나로 그 시장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박지원의 소설<허생전>의 배경이 안성인 점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안성장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각종 생활용품관련 수공업의 발달을 낳았고, 그 대표적인 것이 유기, 꽃신, 한지, 백동연죽장, 복조리 등이라 할 것이면 그 솜씨가 뛰어나 “안성맞춤”이란 말이 있게 한 것입니다. 장시의 발달은 그리하여 ‘바우덕이’로 대표되는 전국 으뜸가는<남사당>의 전설을 낳았으며, 그 맥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미륵은 대승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3번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살로 지금도 천상의 도솔천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답니다.
미륵은 아직 현실의 부처가 아니기에 땅에 발이나 허리까지 묻혀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많은 미륵이 있는 고장이 바로 안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