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음식의 추억
박 은 주
긴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된 지난주, 작은 시누이 농막에 모여 콩국수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집에 돌아와 봉지 봉지 싸준 것을 푸니 여름 입맛 살리는 매콤한 고추멸치 다짐장, 새콤한 양파 장아찌도 한 통씩 담겨있고 상추, 양상추, 부추, 고추, 가지, 호박, 치커리…. 없는 것이 없다. 또 제일 큰 봉지에 한가득한 호박잎과 깻잎! 내가 유난히 그것들을 좋아하는 걸 시누이는 알고 있다.
당장 그날 저녁 멸치육수에다 된장 풀고 호박잎을 줄기째 쑹덩쑹덩 썰어 국을 끓였다. 애호박도 큼직하게 썰어 넣고 마늘과 청 홍고추도 다져 넣으니 구수하고 시원하다. 남편도 ‘장모님 국 맛’이라며 엄지를 치켜든다. 호박잎은 쪄서 자작하게 끓인 된장 얹어 쌈 싸 먹는 줄로만 알았는데 언젠가 친정엄마가 끓여주신 호박잎 국을 먹어본 뒤 여름이면 몇 번씩이나 만들어 먹는다.
다음 날은 깻잎으로 점심을 준비했다. 채 썰어 비빔국수에 넣고 전도 부쳤지만, 양이 워낙 많다. 마침 큰 시누이 전화가 와서 어떻게 해 먹나 물었더니 깻잎 김치 담는 방법을 알려준다. 깻잎을 살짝 데치고, 양념은 이러이러하게 하면 된다는 것을 가만히 들으니 시어머니가 하신 방식인 것 같다. 그 순간 어머니가 해마다 주시던 여름 밑반찬에 빠지지 않던 깻잎 김치가 눈앞에 아른대며 군침까지 돈다. 차곡히 쌓인 파란 잎 사이사이 곱게 채 썬 당근과 양파가 얹힌 윤기 자르르한 그 때깔이며 밥에 한 잎 착 걸쳐 입안에 넣으면 달콤하고 짭조름하게 퍼져가던 깻잎 향! 이럴 줄 알았으면 배워둘 걸, 그땐 먹을 줄만 알았지, 음식 만들기에 통 관심도 시간도 없었으니.
모양과 향이 다른 호박잎과 깻잎처럼,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두 분은 외양도, 음식 만드는 재료와 방식도 달랐다. 두 분의 외모를 여름꽃으로 비유하자면, 친정어머니는 채송화같이 아기자기하며 여성적이시고 시어머니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서글서글한 다알리아꽃 같은 분이셨다. 또 음식 만드시는 방식도 달랐는데, 찍먹파나 부먹파니 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친정엄마가 된장, 참기름파라면 시어머니는 들깻가루, 들기름파에 속하신다고 할까.
엄마는 근대, 아욱 같은 나물국에 주로 된장을 풀어 넣어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는 토장국을 잘 끓이셨고 나물도 된장으로 무치거나 고소한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치셨다.
시어머니는 가을 겨울의 들깨 무 배춧국뿐 아니라 들깻가루를 듬뿍 넣은 상춧국, 머윗대 나물무침이나 들기름 두부 지짐이를 여름 밥상에 자주 올리셨다.
친정이나 시집 모두 여름에 자주 해 먹던 음식은 국수인데 친정에서는 여름 하루 한 끼가 국수였을 정도였다. 엄마는 면에 숭숭 썬 부추를 넣고 함께 삶아 찬물에서 건져 애호박 고명 얹어 식힌 멸치육수에 말거나, 열무김치에 비벼주시기도 했다. 시집의 여름 국수는 으레 콩국수로 불린 메주콩을 삶아서 간 걸쭉한 콩 국물에다, 어머니 손수 반죽해 홍두깨로 밀어 썬 국수를 오이 넣고 통깨 뿌려 주시곤 했다.
그래도 이젠 어딜 가도 맛볼 수 없는, 잊지 못할 음식은 엄마의 추어탕과 시어머니의 돼지 배춧국이다. 청도태생이신 아버지가 추어탕을 유독 좋아하셔서 엄마는 부엌 몇 안 되는 그릇 중에도 추어탕 뚝배기는 식구 수대로 따로 마련해두었다. 더위에 지쳐 몸이 허해진 늦여름, 미리 시골 친척에게서 구해온 미꾸라지를 손질하고 갖은 푸성귀를 다듬느라 엄마는 부엌으로 수돗가로 종종걸음이셨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고 끓여낸 추어탕에 다진 땡고추와 마늘을 넣고 산초 가루까지 뿌려 먹으면 알싸하고 시원하고 속이 다 든든해져 왔다. 두레상에 둘러앉은 식구들 얼굴엔 숭굴숭굴 땀이 맺혔지만, 여름내 무르고 찬 배를 따뜻하게 데워주던 엄마의 추어탕!
시어머니는 여름휴가 때 시골집에 식구들이 모이면 마당 아궁이 큰 가마솥에 불을 지펴 돼지고기를 삶으셨다. 뜨끈뜨끈한 고기를 대청마루에서 기다리던 식구들에게 일단 한 접시 수북이 담아 묵은김치와 함께 내어주시고는 그 고기 삶은 국물에 고춧가루 풀고 단 배추와 열무, 파, 마늘 등을 듬뿍 넣어 국을 끓이셨는데, 기름기가 둥둥 떠 있지만 일단 숟가락을 담그면 어느새 국그릇이 깨끗이 비워지는 개운하고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많은 식구 먹이려는 일념으로 여름날 뜨거운 불 앞에서 음식 장만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셨을까. 정작 당신들은 편히 앉아 그 음식들을 드시지도 못하셨는데…….’ 엄마와 어머니가 해주셨던 이런저런 여름 음식들을 떠올리다, 두 분께 나는 뭘 해드렸나 돌이켜보니 딱히 특별히 해드린 음식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처음으로 두 분을 함께 모시고 저녁 식사했던 날이 떠올라 왔다.
결혼한 첫해 늦여름이었다. 결혼식 때 폐백으로 안사돈끼리 인사는 나누었지만 뵐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물어와 이참에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리자고 남편과 계획을 짰다. 내 방학과 남편의 휴가일이 겹치는 날로 잡고 장소는 일단 어머니들이 좋아하실 듯한 영화를 막 개봉한 대구 동성로 한 극장으로 정했다. 영화관람 후에 근처 알아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드디어 약속 장소로 나타나신 두 분의 모습! 친정엄마는 고전적인 흰 모시 저고리에 치마를 받쳐입으시고, 평소 로션조차 바르시지 않던 시어머니는 현대식 스타일로 옥색 모시 저고리에 바지로 한 벌 곱게 차려입으셨다. 예쁜 손가방에 꽃무늬 양산까지 드시고서! 사돈 만난다고 은근히 신경 쓰셔 차려입고 나오신 어머니들 모습에 남편과 내 입가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영화가 끝난 후 영화관을 나서며 “사돈,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은 아무도 없지예?” 하며 흐뭇해하시고 식당에선 정답게 담소를 나누며 냉면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엔 해드린 것 없이 큰일을 한양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고기를 구워 드리면 당신들은 몇 점 드시지도 않고 자꾸만 남편과 내 앞에 놓아주시는 것이다. “젊은 얘들이 많이 먹어야지.” “몸이 재산이란다. 많이 먹거라.” 하시며 밀어주시던 손길, 그 따스한 손길과 음성이 기억 속을 스쳐온다.
외모와 성격은 다르셨지만, 한결같이 자정慈情 넘치시던 엄마와 어머니. 이제 나이 들고 살림도 조금 알게 돼 내 손으로 장만한 음식을, 맛난 음식도 사 드리고 싶어도 그 어머니들은 안 계시니, 자식이란 존재는, 나라는 존재는 왜 이렇게 항상 한 발짝 늦기만 한 것인지…….
장마가 지나간 파란 하늘 두둥실 뜬구름을 올려다본다. 그날처럼, 곱고 곱던 두 어머니가, 흰 모시, 옥색 모시 저고리를 입은 두 분이 반갑게 손 맞잡고 계시는 듯하다. “엄마! 어머니! 사랑의 손길로 키워주시고 먹여주신 덕분에 올여름도 잘 건너가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막내딸 막내며느리의 안부 인사에 두 어머니가 빙긋이 웃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