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의상은 8년 나이 차이가 나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로 서로 경쟁적인 관계였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각각 자기 종파를 확립하였다.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무덤 속에서 잠을 자고 께어나 큰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와 분황사에 거주하면서 민중들 속에 들어가 불교 보급에 힘썼다.그 때 깨달은 바는 모든 것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였다. 즉 “一切唯心造”였다.지옥도 극락도 마음속에 있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법성 즉 부처의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원효의 께달음이 였다.
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법이요
心滅則髑髏不二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과 다름이 없도다.
그는 다른 스승으로부터 교육도 받지 않고 스스로 불법을 깨달았는데 후세 사람들이 원효의 가르침을 원효종. 또는 통불교.분황종,해동종으로 부른다.그는 대단한 천재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화엄종과 정토종의 선구자이며 불교사상의 통합과 실천에 앞장섰다 대승기신론은 지금도 불교학도들의 중요 과목으로 채택되어 있다. 그가 아니였다면 신라의 불교가 민중 속으로 펴지지 못하고 왕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경전을 읽고 외우는 문자불교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그래서 원효는 우리나라 불교사에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그도 삼국 통일 후 백제땅 변산반도에 가서 신라군에게 거의 몰살당한 백제군의 원혼을 달래고 진표율사와 함께 백제사람을 포용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의상은 중국의 終南山 至相寺에서 화엄종이 시조인 智儼스님으로부터 화엄의 이치를 깊이 공부하였다. 이 무렵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자 당 고종이 크게 화를 내고 金欽純 (김유신의 아우)金人問(김춘추의 둘째 아들)을 옥에 가두고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급히 귀국하여 이 사실을 문무왕에게 알려 위기를 극복하였다.문무왕은 그 공을 인정하고 사찰을 세우도록 지원하였는데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옛고구려 땅으로 갔다. 동해안 관음굴에서 100일 기도를 한 후 관음보살을 친견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 관음 도량 낙산사를 세운다. 지금도 낙산사는 강화도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와 여수 향일암,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동서남북 4대 관음도량중 의뜸이다.
다시 소백산 부석으로 와 자기의 전공인 화엄종찰을 세울려고 하였지만 이곳은 옛 고구려 땅이라 고구려 유민 900여명이 완강하게 저항하였다.이들은 선량한 고구려 백성으로 나라가 망하자 갈곳을 잃고 유민이 되어 산중에서 거지꼴로 도적이 되어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였다.
부석사 창건설화에 도적의 무리를 선묘낭자의 용신이 도와 돌을 3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여 이들을 물리쳤다고 전하고 있는데이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이고 어쩌면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불하면 다음생에는 극락왕생한다는 의상대사의 설법을 듣고 유민들이 의상을 믿고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따랐다고 보면 된다.
의상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내세에는 극락세계에 환생하도록 빌어주고 유민들을 교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아미타불의 공덕으로 서방정토의 극락환생을 바라는 종파가 정토종이다.사바세계는 예토(穢土)요 극락은 정토(淨土)이다.
정토에는 아미타불이 관장하는 극락정토가 있고 약사여래불의 동방유리광정토도 있고 미륵불이 관장하는 미륵정토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토는 아미타불의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말한다.
부석사를 창건하고 의상은 이곳에서 화엄종을 설법하며 10대 제자를 길렸는데 이들이 후일 전국에 흩어져 화엄사찰을 짓고 화엄사상을 펴뜨렸다.
지금 전국 곳곳에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 수도없이 많은 까닭은 그 제자들이 지은 사찰 때문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을때 화엄종의 가람 배치와 정토종의 가람배치를 절묘하게 가미하였다. 화엄사상의 기초위에 정토사상의 가람을 지어 유민들을 구제하며 한편 화엄사상을 펴도록 한 것이다. 화엄 사상은 석가모니가 부처의 께달음을 얻고 처음 설법한 것으로 연기설이다.모든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는 공(空)사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9개의 석축을 쌓아 화엄의 9품정토를 상징하고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계단을 108계단으로 만들어 화엄세계를 상징하였고 화엄종의 법당은 대적광전에 법신불인 비로나자불을 모셔야 하지만 정토종의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짓고 무량수전이라 하였다. 아미타불은 영원한 불빛이요, 영원히 살아 우리를 구제하기 때문에 “무량광불”또는 “무량수불”이라 부른다.부석사의 대법당이 “무량수전”이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아미타불 즉 무량수블을 모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락세계에 들어가는 문이 안양문이기 때문에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가 있어 영원히 안락한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의상대사가 불안에 떨고 있는 유민들을 모른체 하고 자기가 배운 화엄종만 주장하였다면 지금과 같은 사찰이 아니였을 것이다.
현실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토사상과 관음신앙을 모두 수용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모두 회유하고 통합하였기에 통일신라의 기틀을 튼튼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역시 야천다운 명쾌한 해설일세.
화엄 9 품, 하 3 품, 중 3 품, 상 3 품을 밟아오르고 나면
안양문이 아주 절묘하게 동선에서 빗겨 서 있어서
극락세계, 극락정토에 오르게 되어있는 가람배치는
우리나라 사찰이 법에 벗어나도록 마구 증축 신축을 일삼아
가람배치가 뒤죽박죽이 되어있는데 부석사는 정토종 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자네가 제대로 설명해 주시는 구먼. 한번 직접 답사하면서 해설해 주시게나.
따뜻한 봄이 되면 번개팅을 한번 하세나.. 건강하시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