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은 천애 멀리 있는데(故人多憶在天涯)
삶의 여정을 끝까지 동행하며 서로 믿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벗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그의 저서 “네 가지 사랑”에서 참다운 우정은 먼저 서로 추구하는 삶의 좌표가 같아 동일한 인생관으로 세상에 나아감이 전제되어야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했고, 공자는 일생에 참다운 친구 셋을 얻기가 어렵다고 했다.
동고 이수록 선생과 청음 김상헌 선생은 이러한 참다운 우정의 교제를 이어 갔는데 이를 묘사한 우정의 시(詩)가 있으니 담담하게 그린 깊은 벗과의 정(精)이 더욱 새롭다.
동고(東皐) 이수지(李綏之)가 봉산(鳳山)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 청음 김상헌 선생
산속 살자 장맛비에 띠풀 지붕 비 새거니 / 山居積雨漏茅茨
병석 누운 외론 회포 내 자신만 홀로 아네 / 病臥孤懷只自知
뜬세상 일 꿈속 같아 몇 차례나 놀랐던가 / 浮世幾驚如夢裏
친구들 다 천애(天涯) 멀리 있는 것을 생각하네 / 故人多憶在天涯
양중(羊仲)만이 부지런히 오고 가서 어여쁜데 / 獨怜羊仲勤來往
어느 누가 용표(龍標)가 또 떠나간다 말하는가 / 誰道龍標又別離
이별의 쓸쓸한 마음에 모두 마음 편치 못하니 / 離恨愁心摠無賴
소식 전함 빙자하여 상루(湘纍) 근황 물으리라 / 且憑消息問湘纍
<동고(東皐) 이수지(李綏之)의 큰형 성지공(成之公)이 당시 인근 고을에 유배되어 있었다.>
(출처 : “청음집” 제5권)
[주-1]동고(東皐) … 전송하다 : 동고는 이수록(李綏祿: 1564-1620)의 호이며 자는 수지(綏之)이다. 이수록은 1605년(선조 38년)에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오르고, 통례원상례를 거쳐 외직으로 나아가 봉산군수(鳳山郡守), 광주목사(廣州牧使)등을 역임하고 광해군의 폭정에 물러났다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2]양중(羊仲): 한(漢)나라 장후(蔣詡)가 왕망(王莽)정권 때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둔한 뒤, 집 안의 대나무 밭 아래에 세 개의 오솔길을 내고는 오직 친구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만 종유(從遊)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蒙求 上 蔣詡三逕》
[주-3]용표(龍標): 당(唐)나라의 시인인 왕창령(王昌齡)의 별호이다. 왕창령이 일찍이 범수위(氾水尉)로 있다가 좌천되어 용표위(龍標尉)로 갔었다. 이백(李白)의 시에 이르기를, “버들꽃은 다 떨어지고 두견새는 우짖는데, 말 들으니 용표가 오계 지나간다 하네.〔楊花落盡子規啼 聞道龍標過五溪〕” 하였다.
[주-3]상루(湘纍): 굴원(屈原)이 유배 갔다가 죽은 것을 일컫는 말인데, 흔히 굴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수록의 큰형인 성지 이성록(李成祿)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양웅(揚雄)의 반이소(反離騷)에 “초(楚)의 상루(湘纍)에 조상(弔喪)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죄 없이 죽은 것을 누(纍)라 하는데, 상강(湘江)의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으므로 상루라 한다.” 하였다.
[주-4]성지공(成之公) : 이성록(李成祿 : 1559- ?)이다. 본관은 완산(전주 全州)이고 자는 성지(成之)이다. 1602년(선조 32)에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있던 중 최영경(崔永慶)의 옥사가 일어나자 성혼(成渾)을 옹호하다가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 이수록 [李綏祿, 1564~1620]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완산 (전주 全州)이며 자는 수지(綏之), 호는 동고(東皐)이다. 세종의 6대손이며, 첨정(僉正) 극강(克綱)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입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그 후 승문원정자·병조좌랑을 거쳐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라 수많은 기민(饑民)이 있었는데, 창고를 풀어 진휼(賑恤)하고,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큰 치적을 세웠다. 그 뒤 곽산군수(郭山郡守)를 거쳐 세자시강원문학·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602년에는 서북면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전후의 질서 회복에 공헌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1605년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오르고, 통례원상례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봉산군수(鳳山郡守)·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광해군 때 상의원정(尙衣院正)·봉상시정(奉常寺正)·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1617년(광해군 9) 의정부사인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였다.
그해에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이 대두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여 이원익·정엽(鄭曄) 등과 교유하였다. 뒤이어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제수 받고,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으나 광해군의 패륜에 동조할 수 없어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