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는 역사의 비의를 찾아낼 수 있는 별들이 있다. 조상들이 별에 역사를 숨겼기 때문에 비의라 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비의를 밝혀낼 수 있는 별들이 많이 있지만 견우별 자리에서만 비의를 밝혀 보기로 한다.
만약 견우성에서 비의를 밝혀 사라진 역사를 찾아낸다면 칠월칠석날 지내는 칠석제가 세시풍속을 뛰어 넘어 역사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 천문에서 비의秘義를 해석하면 역사를 추론할 수 있는 열쇄가 된다. 그 한 예가 견우직녀별자리이다. 견우牽牛에서 비의를 해석하면 삼한시대에 사라진 모국왕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 |
견우성은 칠월칠석 때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별이다. 정월보름과 칠월칠석이 2대 명절이다. 묘하게도 음기와 양기가 1:1을 이루는 날을 택하여 명절을 정했다. 이들 두 명절 중에서 천문에 기록한 명절은 “견우직녀가 은하수銀河水에 놓은 오작교烏鵲橋에서 만난다”는 설화를 남긴 칠월칠석뿐이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는 무슨 이유인지 이날 견우와 직녀가 이별하는 장면을 그려 후대에 전하고 있다.
이 날의 천문도를 보면 북방현무칠수분야 분야分野의 자미원紫微垣 쪽에 직녀가 있고, 적도 밑에 견우와 수녀가 있다. 견우와 수녀가 적도 밑에 있다는 것은 이 시간이 해가 질 무렵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 시간에 해와 달은 서쪽 하늘에 일직선으로 떠있다. 그래서 음기와 양기가 1:1이 된다고 본다.
왕의 무덤에 견우와 직녀를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이 무덤의 주인을 그린 것은 아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견우성牽牛星을 문자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보기로 하였다.
견牽자는 북방현玄+덮을 멱冖+소울음모牟자로 완성된 문자이다.
해석하면 “북방현무별자리에 있는 별들이 소울음 소리를 덮어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이 미스터리를 풀려면 소울음 소리를 해석해야만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우선 모牟자를 해석해 보기로 한다.
모자는 기성己姓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다. 우리 역사에 기성이 등장하는 때는 단국시대檀國時代 이전 시대가 된다. 기성은 풍성風姓에서 나온 성이고, 풍이족의 족성族姓(어머니의 성)이다.
모자가 지나 역사에 기록되는 때는 춘추시대이다. 단국시대와 춘추시대에는 시대적 간극間隙이 있다. 단국이 존속했던 때가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이므로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역사에 나타난 춘추시대보다 앞선 시대가 된다.
“기성에 연원을 두는 설은 거국莒國의 공족公族의 봉지封地인 무루읍無樓邑에 모국의 기원을 두는 설이다. 당시에는 봉지의 이름으로 씨칭氏稱(아버지의 성)을 삼았기 때문에, 무無가 무母로 변음이 되어 옛 모이국의 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로史路>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에 유소有巢씨가 다스리는 석루산이 있었다. 즉 모루지이다. 모이국의 근본이 되었다.(古有巢氏治石婁山,即牟婁也,本牟夷國)”
유소씨씨는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의 직계인 소희巢姬의 후예로 볼 수 있는 성이다.
모이국에 대한 설명을 보면, “상말주초商末周初에 기국杞國의 모루牟樓 이전부터 있었던 일개 소 제후국이었다. 그 규모는 모루국이 되기 전후에 일개 성에 불과했다”고 하였다.
춘추시기는 주周의 한왕桓王 희림姬林 원년(BC 719년)이다. 거오목공莒敖穆公이 군사를 일으켜 기국을 공격하여 기국의 모루성을 점령하고 나서 모루읍牟樓邑으로 개칭하였다. 모루읍은 무루읍無樓邑으로도 불렀다.
주경왕周景王 희귀姬貴 22년(제경공齊景公 강저구薑杵臼 25년,BC 523년),거공공莒共公 기경여己庚輿(주, 己는 풍이족의 족성이다)가 온힘을 다하여 제국齊國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제국의 경공景公이 크게 노하여, 2차에 걸쳐 대군을 일으켜 거국을 공격하였다. 이후로 거국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두 번이나 무력해져 주변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을 포기하였다.
▲ 중여곤 명문(銘文, 문자를 금문金文으로 새겼다)이 들어 있는 청동술두루미. 청동으로 술두루미를 만들 때 코뿔소 형상으로 만들었다. 중여곤이 제관으로서 제사지낼 때 술을 담았던 청동항아리가 청동술두루미이다. | | 춘추말기에 주경왕周敬王 희개姬丐 39년(초혜왕楚惠王 웅장熊章 8년, BC 481년) 초혜왕이 친히 대군을 인솔하여 거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거국은 최종적으로 제국의 강토가 되었다. (주, 초국이 거국을 점령하여 장기간 다스렸는데, 제국의 공격을 받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건너갔다. 이들이 삼한시대에 한반도에 살았던 초리국楚離國 사람들이다.)
이상 춘추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牟자가 모이국牟夷國을 의미하는 문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산牟山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
牟山은 여요시余姚市에 속해 있는 모산牟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모산에 대한 섦명은 다음과 같다.
“원래 매년 뇌우가 치는 계절에 산속 깊은 곳에서 모모하는 소리가 나는데 마치 소가 꾸부정하게 하고서 길게 내뿜는 소리와 같아서 산 이름을 모산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牟山은 모평현 동북쪽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공식적인 이름은 동모산(京名東牟山)이다.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에 “모평에 모산이 있다. 산은 양산이고. 산세는 평평하고 넓어 모평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제승齊乘》에, 안구남安丘南 20리에 모루산牟婁山이 있다. 본래 모이국牟夷國이었다. 모산현에 있다. 지금은 와전되어 몽롱산朦朧山(주, 고구려시조 추모왕鄒牟王의 아명이 고주몽高朱蒙인데, 牟는 모이국을 의미하고, 蒙은 몽朦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견우직녀도>는 추모왕의 조상인 모국시조왕과 비를 그린 벽화로 볼 수 있다)이라 한다.
모산현牟山縣이 있는데, 수나라 때 생겼다. 성은 지금의 산동 안구현 서남쪽 모산 북쪽이다. 후에 안구安丘라 하였다.
모문수牟汶水가 있다. 산동山東 래무현萊撫縣 동쪽에서 흐른다. 서남쪽으로 가서 오문수浯汶水와 만난다. 현 남쪽으로 가서 영문수嬴汶水와 만난다. 서쪽에서는 대문하大汶河와 만난다. <수경주>에서, “물이 모현牟縣에서 성의 서남쪽 고부阜 아래 쪽으로 흐른다. 속칭 호로퇴葫蘆堆라 한다. 물 이름이 모문牟汶이 되었다.”고 하였다.
모정현牟定縣이 있다. 한漢 때 익주군益州郡 땅이다. 모주牟州라고도 한다. 이 곳을 몽씨蒙氏가 다스렸다. (주, 蒙은 고주몽高朱蒙의 씨칭이다. 고주몽의 모계족성은 고성高姓이었다.)
조선왕조시대에, 牟자의 의미만을 살려서 우명성牛鳴聲이라 말한 사람은 격암 남사고 선생이었다. 그는 “성주산에서 소울음소리가 울리면 나라가 멸망하고 세상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 하였다.
격암 선생이 500년 전 명종 때 사람이니까, 그가 말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멸망한 해가 경술庚戌년이므로 소울음 소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이 판명되었다.
또 하나 牟자와 관련이 있는 지명은 동모산東牟山이다. 동모산은 모산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 산 역시 소울음 소리를 내는 산이므로 동모산이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모산은 발해의 건국과 관련이 있는 산이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건국하였다. 또한 고구려 시조 추모왕鄒牟王과도 관련이 있는 산이다. 추모왕의 牟자는 추모왕이 모이국 출신이라는 단서가 된다.
모이국 사람들을 역사에서는 래이족萊夷族이라 하였다. 래이족은 마한사람이고 백제를 세운 사람이었다.(<양직공도梁職貢圖>)
여요시의 余는 중여곤을 말한다. 余가 변하여 여餘가 되었다. 메를 올려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余가 변하여 여艅가 되었다. 작爵에 술을 부어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이들 문자는 중여곤이 메와 주를 올려 제사지냈기 때문에 생긴 문자로 본다.
▲ 양직공도. 百濟 來夷 馬韓이라는 문자가 들어 있다. | | 부여夫餘라는 문자가 생겨나는데 아버지가 메를 올려 제사지낸 여餘의 후예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조선의 서울을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조선의 서울에 살았던 인종이 부르는 명칭에 따라서 달리 불렀기 때문에 다양하게 불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부른 명칭을 보면 서울西菀, 부여夫餘, 말갈靺鞨, 평양平壤, 험독險瀆 등이었다. 이들 중에서 부여로 부른 인종을 余 중여곤의 후예로 볼 수 있다. 이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來로 불리게 되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을 래萊라 하였다.
여요余姚에서 요姚는 순舜의 사람들인데, 이들이 여요에서 떨어져 나가 래萊에 정착한 余의 후예들을 래이萊夷라 하였다. 래이는 來夷와 萊夷 2가지 호칭을 다 쓴다.
양나라 때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에서 해설하기를 “백제를 래이來夷이자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마한馬韓이란 ‘말을 타고 간 조선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韓자를 보면 조선朝鮮의 조자朝字에서 월자月字를 버리고 순임금을 의미하는 어길 위자韋字를 갖다 붙인 이름이므로 순임금 계열이 조선에서 떨어져 나간 인종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화이가 떨어져 나간 동이족東夷族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래이족이 시조로 삼았다면 중여곤을 시조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여곤衆艅鯀과 쌍벽을 이룬 사람이 장자가 <소요유逍遙遊>에서 곤鯤으로 말한 곤오昆吾이다. 곤鯀은 한웅천왕 때 농관을 지낸 고시高矢의 후예이고, 곤鯤은 한인천제의 직계 후예이다. 그의 성이 기성己姓인데 이름을 풍豊이라 하였다. 그의 이름을 딴 곤오昆吾로 불리는 지명이 중원지방에 있다. 기풍은 단국檀國의 홍제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하여 소성이 되었다.
그의 후손에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있는데, 전국시대 초기에 그의 조상인 소씨 일족이 소도蘇塗를 침범한 제군齊軍을 피하여 소래蘇萊에 상륙하였다. 소래란 소성蘇姓을 가진 래이족萊夷族이라는 뜻이다. 래이족 중에서 부여계는 백제를 세웠고, 소래계는 신라를 세웠다.
격암 남사고는 이 사실을 그의 예언서인 <남사고비결>에 후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의秘義로 남겨 두었다. 남사고 비의는 소울음모牟자에 숨겨져 있다. 그는 성주산(부천의 진산)에서 소울음소리가 울리면 조선이 멸망하고 세계가 단일국가로 통일 되고 이때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성주산에서 도부신인桃符神人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소울음이 울 때란 모이국의 후예들이 스스로 깨어나 모국을 성주산에 다시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시조로 볼 수 있는 분이 견우이다. 견우牽牛의 견자에서 현玄자는 견우와 직녀와 수녀가 속해 있는 북방현무칠수를 말하고, 소울음모자는 모국을 의미한다. 견牽자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견우를 모이국의 시조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견자에는 견우가 하늘에서 소를 끌고 내려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그는 견우성에서 내려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노중평 역사천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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