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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평론 2022년 6월 칼럼
제목: 아동 인권과 교육 : 능력주의 vs 학벌주의
저자 : 안재오
1. 어린이날 100주년
이달 5일은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일이다. 100년 전 소파 방정환은 당시의 참혹한 어린이 인권 상황을 보면서 어린이날을 제정, 선포했다.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였던 방정환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교리를 따라 어린이를 ‘인내천의 천사’로 보았다. 수필 ‘어린이 예찬’에서는 어린이를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이라고 했다. 그가 아이를 인격을 갖춘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배경이다. (세계일보)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보다 어린이들의 인권은 크게 개선이 되고 아동 노동 같은 비인간적인 상황들은 지양(止揚)이 되고 어린이들의 복지가 향상되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100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은 아동을 어른과 같이 인격을 가진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5월 어린이날을 선포하며 어린이날 선언문을 배포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기반해 전세계 모든 아동을 권리의 주체로서 특별한 보호와 존중을 받을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중앙일보)
소파 방정환 선생은 위의 인용문처럼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라고 하면서 미래 세대인 어린이를 중요시하라고 갈파했다.
공자는 후생가외(後生可畏)에서 '뒤에 난 사람들(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의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이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해야 한다. 장래의 그들이 오늘의 우리만 못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린이들의 상황은 어떤 면에서 여전히 고통과 압박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다. 아동의 삶의 질은 열악하다. 부모의 보살핌하에 걱정없이 밝고 행복하게 삶을 누려야 할 어린이들이 공부 때문에 다들 힘들어 한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게 정말 큰 문제이다. 어린이들, 자녀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준비 즉 학교공부를 너무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이런 세태풍조와는 반대로 필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그 스스로 책임진다는 믿음 하에 “무엇이든 너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라고 자유방임적인 교육 방침을 지니셨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학벌주의 풍조에 병들어 어린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앞으로 자신의 생을 책임질 존재로 키우기를 포기했다.
이런 풍조의 약점과 모순은 사회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이다. 즉 일자리와 기업도 다 미래에 새롭게 형성이 되는데 이를 무시하고 주어진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본다. 물론 좋은 일자리와 그렇지 못한 일자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도 인간성과 일치한다. 즉 인간의 머리도 상중하가 있고 일자리도 그렇다. 이런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모두 상층만을 노린다는 것은 안된다. 가령 최근의 뜨는 직종인 물류업의 경우 여기는 대학은 커녕 초등학교만 나와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학진학률이 70%가 넘는다. 교육과 직업의 불일치, 이것이 우리 시대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9∼17세 아동·청소년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57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최하위였다.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가 2019년 35개국 만 10세 아동의 행복도를 비교한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에서도 한국(10점 만점에 8.41점)은 31위에 그쳤다.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시행하는 ‘아동종합실태조사’ (2018년)에서 한국의 9∼17세 아동·청소년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57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최하위였다.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가 2019년 35개국 만 10세 아동의 행복도를 비교한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에서도 한국(10점 만점에 8.41점)은 31위에 그쳤다. 한국 아동은 특히 △학습에 대한 만족도(25위) △안전한 환경에 대한 만족도(26위)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도(28위) △시간 사용에 대한 만족도(31위)가 낮았다. (동아 2022.05.02.)
2. 아동·청소년 삶의 만족도 최하위 한국
위의 기사처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어린이들의 삶의 만족도가 최하위하는 조사가 나왔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라는 소파 방정환의 뜻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어린이들을 불행으로 몰아가면서도 이렇다 할 반성이나 개선이 없이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잘못된 교육제도 탓이다. 이른바 단선적 학교제도 (single ladder system)은 미국에서 시행하는 제도인데 해방이후 우리 나라도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미국 드라마를 보면 자주 보이는 것처럼 미국은 “대학 못가면 허드렛 일을 해야 한다”는 관념이 온통 전 국민에게 퍼져 있다. 우리 나라도 물론이다. 이런 제도는 원래 민주주의, 평등주의 교육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학력을 통하여 부와 권력의 세습을 바라는 기득권층 (the establishment)의 목적과 요구에 봉사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이런 고정관념을 부수어야 한다. 물론 단순한 일을 하면 임금도 작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다 머리를 쓰는 일에 종사할 수는 없다.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근육(筋肉)을 쓰는 직업을 구해야 한다. 또 필자가 교육 평론 칼럼에서 여러번 지적한 바와 같이 독일이나 스위스 같은 복적적 학교제도 (double ladder system)을 도입하면 불공정의 피해는 없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미국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3. 능력주의 비판(批判)과 반비판(反批判)
최근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 이란 책을 통해서 능력주의(meritocracy) 비판을 한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능력있는 자가 출세한다는 능력주의는 실은
많은 불평등한 전제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수백만 달러를 받는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받던 시대에 태어난다면 어땠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 샌델이 유도하는 결론은 이렇다. “재능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고(샌델이 아무리 노력한들 르브론 제임스만큼 농구를 할 수는 없다) (…) 내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농구가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인 여건)에 산다는 것도 역시 우연의 산물”이기에 “능력에서 비롯된 혜택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는 판단은 실수이자 자만”이라는 것이다. (한겨레 신문 2020-11-27)
그러나 샌델의 이런 선천적인 조건에 대한 비판을 실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능력에는 이처럼 우연적인 요소가 숨어있다. 문제는 이런 선천적이고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실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의 고착이다. 그런 면에서 샌델은 문제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다. 이런 정도의 통찰력이 이 시대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는 것을 보고 고소(苦笑)를 금할 길 없다. 또 문제는 르블론 제임스 같은 선수는 극히 희귀한 경우라는 것이다. 이런 선수가 되는 것은 1억명 중의 한 명 즉 0.000001% 의 확률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조건 출세한다. 이런 사람은 절대적으로 후한 대접을 받는다.
아니 능력에는 이미 우연이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노력한다는 것도 실은 우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타고난 재능이 없더라도, 그리과 환경이 극히 불우하지만 자신의 초인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의지 라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약한가? 그것은 타고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성이나 신체가 선천적으로 탁월하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이 둘은 없지만 단지 의지 하나만으로 양자를 이길 수 있다. 정신력의 승리이다. 그리고 의지력으로 생득적인 지능이나 체력을 극복한 사람을 우리 사회는 더욱 존경한다. 따라서 센댈의 의견과 같이 천부적인 혹은 생득적인 특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능력은 우연적이니 당신은 당신이 받아야 할 사회적 보답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 라고 시비를 거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
능력 혹은 성취도에 의해서 사회적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그래도 공정한 편이다.
그리고 세금 제도를 통해서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회적 평등에 기여를 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
샌델 교수는 마지막으로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결정타를 날린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능력주의 찬성론자들은 이 ‘이동성’이 불평등 단차를 줄인다고 반박하지만, 이에 대해 샌델 교수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1950∼1960년대 명문대학들이 사립 기숙학교를 졸업해야 입학자격을 부여하던 방식에서, 인종·계급과 관계 없이 대학입학 자격시험(SAT·에스에이티) 점수로 선발하는 방식으로, 즉 ‘이동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입시 전형을 바꾸었으나 “노동계급과 빈민층 자녀들은 1954년에 비해 오늘날 빅3에 진학할 가능성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겨레 신문 2020-11-27)
샌델의 이 분석 역시 우물안의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다. 그의 논지는 이동성 즉 사회적 이동성의 기회는 (형식적으로) 주어졌지만 실질적인 이동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계층의 자녀들에게도 그들의 학업성적 (SAT성적)에 의해서 미국의 명문 대학에 들어갈 기회는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와 비교해서 오늘날 빅3 대학, 즉 하버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사교육 때문이다. 즉 미국이나 영국에 만연한 사교육 즉 가정교사 직업 때문이다. 대략 30~40%의 미국의 고등학교 가정이 튜터(tutor)를 쓰고 있고 이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미국의 상류청 가정들은 명문 고교나 기숙학교를 대신하여 튜터를 통해서 명문 대학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능력 조작주의”, 즉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한 부모들의 욕심과 사교육이 문제인 것이다.
4. 영미권의 사교육 튜터 (tutor) 제도의 문제점 – 능력주의가 아니라 학벌주의가 문제이다.
최근 미국 드라마 넷플리스 연속극 “이글레시아스 선생의 즐거운 교실”에서 보면 마리솔 이라는 여학생은 머리가 영리하고 리더십도 있지만 집이 가난하여 알바하느라고 대학에 진학할 꿈도 못꾼다. 그러나 그녀를 동정하는 이글에시아 교사의 도움과 격려로 그녀는 명문대학에 들어가려는 소망을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미국 사회와 학교의 단면은 바로 부의 기준이 사교육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은 가정교사(tutor)가 없어서 대학 혹은 명문 대학에 입학할 꿈도 아예 가지지 못한다.
대학 입학 성적을 기준으로 명문대에 들어 가는 것은 한국에서 확실히 파악이 되는 것처럼 전혀 기회 균등의 정신에 맞지 않다. 부의 독점이 지식의 독점, 교육의 독점을 불러 오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같은 곳은 학원 대신 가정교사(tutor)가 있고 또 각종 비교과 활동은 돈있고 열심히 있는 어머니 – 이른바 호랑이 어머니, tiger mom – 들에 의해서 좌지 우지 된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능력사회라기 보다는 학벌사회 (academic meritocracy) 해야 옳다.
이처럼 샌델의 분석은 영미권과 아시아 권에서 두루 퍼져 있는 개인과외 학습 내지 사립 학원의 현실을 무시함으로서 영향력을 잃고 있다. 그냥 막연한 능력주의 비판이 아니라 부와 권력으로 학습 능력을 독점하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해야 옳았다. 즉 능력주의 비판이 아니라 가장된 능력주의 곧 학벌주의 비판이 문제의 핵심이다.
5. 지나친 사교육과 아동 발달 장애
아동의 발달권도 문제다.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에는 ‘모든 아동은 충분히 쉬고 놀 권리가 있다’라고 돼 있지만 한국 아동들은 과도한 학습과 경쟁으로 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9∼17세 아동·청소년 중 70.4%가 ‘학교와 학원, 과외 등 공부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평상시 스트레스를 대단히 많이 혹은 많이 느낀다고 답한 아동·청소년은 16.0%였다. 그 원인(중복 응답)은 △숙제와 시험(64.0%) △성적 때문에 부모님으로부터(55.9%) 순이었다. (동아 2022.05.02.)
학벌주의 교육은 이처럼 아동들의 발달권을 저해하고 있다. 성적, 시험 그리고 이와 관련된 부모님의 압박 등이 청소년들의 여가를 뺐고 있다. 이런 입시위주의, 시험 위주의 학습은 아동들의 정신적, 신체적 발전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온갖 종류의 피해를 끼치게 된다. 우선 우리 나라 학생들은 건강하지 못하다. 대신 온갖 질병을 호소한다. 특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의 경우 여러 가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멀리 갈 것없이 벌써 거의 50년 전인 필자의 고교 시절에 필자는 성적 부진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렸고 따라서 고 3 내내 신경-정신과 병원에 다니면서 수면제를 먹고 살았다. 그런 필자의 경력에 비추어 유학시절 관찰한 독일의 학생들의 자유로운 생활은 경이로왔다. 그곳은 가히 교육의 천국이었다. 우선 대학입시가 없으니 그만큼 학생들의 학업적인 스트레스는 적었다.
그래도 필자는 한국의 교육을 개혁한다는 실천적인 목표는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들판에서 기도하던 중 교육을 고치라는 계시를 받았고 귀국후 꾸준히 교육 공화당 건설을 위하여 노력을 했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이 문제를 위하여 정성을 기울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