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百丈廣錄 12.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다.
또 물었다.
"지금 사문들은 다들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경(經)·논(論)·율(律)·
선(禪)과 지식(知解)을 낱낱이 배우므로
신도들에게 네 가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들
하는데 정말 받을 만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조하는 작용(照用)으로 볼 때 소리[聲]·색(色)·
냄새[香]·맛과[味]·유(有)·무(無) 모든 법 등 낱낱의
경계에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물들음도 없고,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도 받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무 등 모든 법을 대할(照) 때 6근의 반연을
다 깎아내 털끝만큼도 탐욕과 애착을 다스려 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시주에게 쌀 한 톨 실낱 하나라도 구걸한다면
축생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끌려 다니면서
하나하나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분주하게 부처가 되고자 탐착한다면 모두가 등지는 짓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랫동안 부처를 가까이 하면서도
불성(佛性)을 모른 채 세상을 구제하는 자를 구경할 뿐,
6취(六趣)에 윤회하면서 오랫만에야 부처를 보는 자,
그를 두고 부처 만나기 어렵다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수는 7불의 스승이며 사바세계에서
으뜸가는 보살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부처를 보노라 나는 법을 듣노라 하는
근거없는 생각을 내어 부처님에게 위신력을 받고
두 철위산(鐵圍山)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모든 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고, 후학들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보배 여의주'라 하며,
'보배 꽃으로 발꿈치를 받쳐든다'하는 것이다.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내는 것은 유·무 등으로
보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눈병 난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하며,
'봄에 매임(見纏)', '봄에 덮임(見蓋)' 또는
봄의 재앙(見蘖)이라고도 한다. 이제 생각생각
모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모든 티끌 때를 다 없앤다면
한 티끌 한 색이 온통 한 부처이며 한 생각 일으켰다 하면
그대로 한 부처인데, 3세5음(三世五陰)의 생각 생각이라면
그 숫자를 뉘라서 헤아리겠는가. 이것을
'허공을 가득 메운 부처'라 하며, '분신불(分身佛)',
'보배탑'이라 하니, 그러므로 항상 찬탄하는 것이다.
지금 연명하는 것을 보면
쌀 한 톨과 한 포기 채소에 의지한다.
먹지 못하면 굶어 죽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말라 죽으며,
불을 쬐지 못하면 추워서 죽는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지 못하고,
하루쯤 없다 해도 죽지는 않으나
4대(四大)에 붙들려 여전하지 못하다.
도통한 옛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다. 불에 타고자 하면 탔고,
물에 빠지고자 하면 빠지지 않았다.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렇게 가고 머물음이 자유로우니,
그에게는 자유로울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를 구하거나
보리·열반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부처를 집착하고 구한다면 탐심에 속하며,
탐심이 변하여 병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 병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불법을 헐뜯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의 밥이란 신령하게 알아보는 자기 본성으로서
번뇌 없는 밥(無漏飯)·해탈밥(解脫飯)을 말한다.
이 말은 10지(十地)보살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초발심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모두다 '파계승',
'명자나한(名字羅漢)' 또는 '여우'라 이름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 메아리같이 고르게 소리를 듣고,
바람같이 평등하게 냄새를 맡으면서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허물도 얽어매지 못한다.
위없는 보리·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출가'라고
이름하나 그래도 그것은 삿된 발원이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안다'하면서
세간에서 승부를 다투며 논쟁하는 경우이겠는가.
한 문중을 탐하고 한 제자를 아끼며,
한 안주처에 연연해하고 한 신도와 관계를 맺는다.
옷 한 벌, 밥 한 그릇, 명예 하나, 이익 하나에 다시
'나는 그 모두에 걸림이 없다'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일뿐이다.
자기 5음(五陰)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몸 마디마디가
토막난다 해도 원망하거나 아깝다는 마음이
전혀 없고 번뇌도 없다면,
나아가서는 자기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채찍을 맞고 이상과 같은 낱낱의 일을
당한다 해도 한 생각도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이 없다며,
그래도 한 생각도 없다는 그것을 옳다고 여겨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을 '법 티끌'이라 하니,
10지(十地)에서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권하기를
'삼악도(三惡道)를 두려워하듯 이 법 티끌을
두려워해야만 홀로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열반을 능가하는 어떤 법이 있다 해도
조금도 값지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걸음마다 부처로서 연꽃을 밟을 것도 없이
백억의 몸을 나툰다. 유·무 등 모든 법에 털끝만큼이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이 있다면
연꽃을 밟고 다닌다 해도 마군의 짓과 똑같은 것이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데에
집착하여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이해했다고
자처하는 자는 자연외도(自然外道)에 속하며,
한편 인연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을 이루는 자는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무(無)에 집착하면
단견되도(斷見外道)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는 데
집착하면 변견외도(邊見外道) 또는
우치외도(愚痴外道)에 속한다.
부처다 열반이다 하는 등의
견해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된다.
유·무 등 모든 견해가 전혀 없으며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봄(正見)이라 한다.
또한 아무 것도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들음(正聞)이라 하며,
이것을 두고 외도를 꺾었다 하는 것이다.
또한 범부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신통한 주문(大神呪)이며, 보살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높은 주문(無上呪)이며,
나아가 부처라는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견줄 바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다. 중생 아수라를
변화시키고 2승 아수라를 변화시키며,
보살 아수라를 변화시키니, 이렇게 하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유무(有無) 범성(凡聖) 등 모든 법은 광석에 비유되고,
자기의 여여한 이치(如理)는 금(金)에 비유된다.
금과 광석이 분리되면 순금이 드러나니 홀연히
어떤 사람이 돈과 보배를 찾으면 금을 돈으로 만들어
그에게 주는 것이다. 마치 국수 자체는 진정 모든
모래와 진펄이 없어 어떤 사람이 시루떡을 구걸하면
국수를 시루떡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도 같다.
또는 지혜로운 신하가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왕이 행차할 때 선타파(先陀婆)*하고 부르면 즉시
말을 대령하고, 밥 먹을 때 선타파(원래는 소금,
그릇, 물, 말(馬)을 뜻하는 말,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총명한 신하가 제 때 제 때 알아서
이것들을 바친데서 유래하여,
지혜로운 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하고 부르면 즉시
소금을 바치는 것과도 같다. 이상은 현묘한 종지를
공부하는 사람이 잘 통달하여 어김없이 기연에
응함을 비유 한 것이며, 또는 육절사자
(六絶獅子:6근·6진을 끊은 사람)라고도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에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고 하였다.
10지(十地)보살은 주리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태우려 해도 태울 수 없으니,
일정한 테두리(量數)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만,
타려하면 타고 빠지려 하면 빠진다.
바람·물 등 4대를 자유롭게 부리므로
모든 색이 부처님 색이며, 모든 소리가 부처님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인 변하는 자기 마음이
다하여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야 이 말을 할 수 있다.
청정한 보살 제자는 매우 밝아서 무슨 말을 하든지
유무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작용(照用)에 있어서도 청탁에 구애되지 않는다.
병이 있는데도 약을 멱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병이 없는데 약을 먹으면 성문(聲聞)이다.
한 가지 법을 단정적으로
집착하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며,
그저 많이 듣기만 하면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이다.
또한 남을 알면 유학성문(有學聲聞)이며,
공정(空寂)에 빠지고 자기를 알면 무학성문(無學聲聞)이다.
탐·진·치 등은 독이며 12분교(十二分敎)는 약이니,
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약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병 없이 약을 먹으면 약이 도리어 병이 되어,
병이 없어져도 약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은 무상(無常)의 의미이다.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약한 욕심이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이에워 싸주었으면 하는 욕심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내 문도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성인이나
아라한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또한「가섭경(迦葉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는 미래의 부처님을 뵈었으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셋째는 찰리(刹利)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넷째는 바라문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약한 욕심부터 먼저 끊어야 한다.
집착하고 물들어 요동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악한 욕심'이라 하는데,
모두가 6욕천(六欲天)에 들어가
파순(波旬)에게 부림을 당할 것이다."
********원오당 한소리********
이 법문역시 스님의 방편적 자설이지만
여기서 스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어떤 유위적인 것을 다 벗어나지 못함을 들어
3구 사구밖으로 벗어나지 않고서는 다 인과에 매여
파순의 부름을 벗어날 길이 없음으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진정한 대해탈을 이룰 수 없음을
설파하고 계신것이다.
[또 물었다.
"지금 사문들은 다들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경(經)·논(論)·율(律)·
선(禪)과 지식(知解)을 낱낱이 배우므로
신도들에게 네 가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들
하는데 정말 받을 만합니까?"]
이 물음은 계정혜 3학을 닦고 선정을 이룰려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공양을 받을 만 한지를 물었다.
즉 행위적인 계를 지키고 불공도 올려주고 예불과
제계를 지키며 참선수행까지 하고 있는
작금의 스님들의 일상을 그대로 들어 물었다고
보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조하는 작용(照用)으로 볼 때 소리[聲]·색(色)·
냄새[香]·맛과[味]·유(有)·무(無) 모든 법 등 낱낱의
경계에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물들음도 없고,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도 받아 먹을 수 있다.]라고 하셨다.
관조하는 작용면에서 본다면 오온육식을 차별심과 분별심을
떠나 어떤 집착이나 물들음이 없고 그기에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앗다는 생각마져 없다면 이라고 하신것은
3구밖으로 벗어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그 기준은 오직 모든 법집에서 벗어난느냐 아직 법집이나
인집 인연에 매여있는지가 기준이지 그 행위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난 스님이라면 무엇을 받는다
안받는다는 어떤 형상이나 공덕이나 인연이 어찌 통하겠는가.
받아도 받음이 아닐 것이요 안받아도 안받은 것이 아님으로
불계에서는 그 어떤 흔적조차 없는데 하물며
황금을 받는다, 돈을 받았다는 것이 통하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유·무 등 모든 법을 대할(照) 때 6근의 반연을
다 깎아내 털끝만큼도 탐욕과 애착을 다스려 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시주에게 쌀 한 톨 실낱 하나라도 구걸한다면
축생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끌려 다니면서
하나하나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에서 단 하나라도 탐욕과 애착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인과의 도리에 맞추어 얻어 먹었으면 갚아야 하고,
받았으니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하시어.
인연에따라 행하지만 그 행한 것이 어떤 성품속에서
이루어 졌다면 다 허망한 것이 되고
다시 본향으로 향할려면 그것이 짐이 되니 다시 갚아야 함으로
이것이 병통이 되고 다시 그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할까?
[그것은 부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분주하게 부처가 되고자
탐착한다면 모두가 등지는 짓이다.]
라고 하시여 지금 여기서 내가 스스로 감각(鑑覺)된
이 자기부처를 등지고 밖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은
원래없는 토끼뿔을 찾는 꼴이 되는 것임으로
스님은 이것은 다 자기 부처를 등지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랫동안 부처를 가까이 하면서도
불성(佛性)을 모른 채 세상을 구제하는 자를 구경할 뿐,
6취(六趣)에 윤회하면서 오랫만에야 부처를 보는 자,
그를 두고 부처 만나기 어렵다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자기 부처는 언제나 자기와 함께하는데도
밖으로 치달려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보살이다 부처다
하면서 찾아 다니지만 그러다 문득 자기가 스스로 비추어
깨달음이 부처인줄 안다면 그런 사람이 만에하나
찾기가 어려움으로 '그를 두고 부처 만나기 어렵다한다'
고 하시면서 자기부처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움을
들어 말씀을 하고 계신다.
[문수는 7불의 스승이며 사바세계에서
으뜸가는 보살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부처를 보노라 나는 법을 듣노라 하는
근거없는 생각을 내어 부처님에게 위신력을 받고
두 철위산(鐵圍山)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문수사리보살은 석존의 제자였고, 지혜제일인 첫
스승인데도 여기 사바세계에서는 제일의 변재와
지혜를 갖추었다고 존경하는 보살이나.
어찌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고 두 철위산이란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이 말씀은 문수보살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설하고 계신다.
'나는 부처를 보노라. 나는 법을 듣노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 말은 나도 변이요 부처도 변이며 법도 변이다
듣는다도 한 변(邊)인 것이다.
그래서 분별심과 차별심이며 유무이며. 생사와 같은
말이다.그래서 양변에 떨어졌다는 말씀을
'두 철위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라고 하셨다.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모든 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고, 후학들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시어
비유를 들어 설하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 내 설법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나 후인들이 잘못 알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그 어떤 것이든 양변에 치우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한. 3구밖으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3계육도의 유전상속을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보배 여의주'라 하며,
'보배 꽃으로 발꿈치를 받쳐든다'하는 것이다.]
그렇개 때문에 모든 유위적 욕심이나 집착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즉 미세번뇌라도 남아 있다면 이것이 법집이되고
이로 인하여 육도유전으로 윤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서 3구 밖으로 벗어나라는 것이다.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내는 것은 유·무 등으로
보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눈병 난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하며,
'봄에 매임(見纏)', '봄에 덮임(見蓋)' 또는
봄의 재앙(見蘖)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부처도 변이요 법도 변이다 어떤 견해이든
내였다 하면 변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무생사, 고저장단. 이 모든 것이 다
내 집착에서 하는 말이지 부처의 경지는 이 모든
것을 벗어난 경지임으로.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생각으로 본다면 이런 것을 일러
''봄에 매임(見纏)', '봄에 덮임(見蓋)' 또는
봄의 재앙(見蘖)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신다.
[이제 생각생각 모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모든 티끌 때를 다 없앤다면 한 티끌 한 색이
온통 한 부처이며, 한 생각 일으켰다 하면
그대로 한 부처인데, 3세5음(三世五陰)의 생각 생각이라면
그 숫자를 뉘라서 헤아리겠는가.]라고 하시어
이모든 견문각지와 모든 법집에서 벗어난다면
그 경지에서는 온통 부처의 경계가 아닌 것이 없다.
한 생각 일으키면 그대로 부처라는 것은
다 반야지혜가 되는 것이며 그 반야지혜가
삼세로 나누고 오온식심의 그 모두가 자우자재하니
그 숫자를 누구라서 혜아리겠는가라고 하시어
처처(處處)가 불상(佛狀)이요 사사(事事)가
불사(佛事)아닌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을 '허공을 가득 메운 부처'라 하며, '분신불(分身佛)',
'보배탑'이라 하니, 그러므로 항상 찬탄하는 것이다.]
라고 하시여 이 부처의 세계 즉 불계에서 본다면
부처아님이 없고 부처님 일 아님이 없으니
그대로 화장세계요, 보배탑이 되는 것이니.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 우러러 찬탄한다고
하시였다. 그러나 불계에서는 불계라는 말조차 없다.
[지금 연명하는 것을 보면
쌀 한 톨과 한 포기 채소에 의지한다.
먹지 못하면 굶어 죽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말라 죽으며,
불을 쬐지 못하면 추워서 죽는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지 못하고,
하루쯤 없다 해도 죽지는 않으나
4대(四大)에 붙들려 여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스님은 지금 욕계의 모든 중생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은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추우면 불을 쬐야 하고,
공기를 마셔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니 이 4대를 떠나 어떻게 존재성을 드러내겠는가.
라고 묻고 있다.
이 사대가 자연이며 이것을 행하는 것이 자연서러움이다.
숨을 쉬지 않으면 못살아가니 공기가 있어야 하고,
내가 설곳이 있어야 하고 먹어야 하니 땅이 있어야 하고,
목이 마르니 물이 있어야 하고, 해빛이 있어야
만물이 생장하고 추위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4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육신이 살아가는데는 이 4대가 필수이며
이보다 값진 것이 없다.
그러나 이 4대는 원래부터 그렇게 있엇고 지금도 있다.
이것을 떠나 어떤 생존도 가능하지 않고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 4대에 대하여 불공을 올리고 감사하다고
해 본적이 스스로 생각하여 얼마나 있든가?
이것이 곧 나의 생명이요. 혈육보다 더 값진 보배인데
우리 인류가 이 지구상에 태어나 이 4대를 벗어난
그 어떤 것을 발견은 할지언정 발명을 한 것이 있으며
없든 것을 단 한개라도 만들어 낸 것이 있던가.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했다는 것인가 한 번 내여놔
보아라. 다 이것과 저것을 썩고 변하게 만들어
그 형상과 모양을 변하게 할지언정
물 한 방울도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하며 없앨 수도
없는 것이며. 우주에 없는 그 어떤 것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말하면 우주 불변의 법칙이다.
우리는 무엇이던 변화하는 것만 의식으로 분별한다.
원래 그렇게 되여 있는 것은 자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본래 마음역시 본래 있었음으로
그리고 변화도 없고 형상도 없으니 어떻게
스스로 자각할 수가 있겠는가?
단 한 번이라도 근본으로 돌아가 그 원천을 밝혀 보려는
마음을 낸다면 이것이 바로 발심일 것이다.
근래에 왔어 과학자들이 선진종교라하여
유물론 적인 기독교를 많이 믿는다.
왜 그럴까 물질을 바탕으로
모든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과학적으로 자연상테를
관찰하고 관찰하여 하다 보니 그 실체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냈다. 어떤 물질이라는 것이 있는 줄 알고 매달렸는데
그 물질이라는 것이 실상이 없음을 알아냈고.
그 실상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일까?
아인스타인은 기독교 신자다.
그가 바로 석존의 3000년 비밀을 과학적으로 알아낸
첫 과학자이며 그것이 바로 양지이론이다.
그래서 그가 알아낸 것은
'창조주가 만들었다는 어떤 세계도 존재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여기서 정신적 변형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 전해져온 마음이란 것으로 관심을
가지고 마음 공부를 하는 과학자들이 그 수를 혜아릴
수 없이 많아졌고 물질 만능주위의 서양에서
마음을 중시하는 명상이나 선에 도취되어 가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작금의 우리를 보자 3000년을 이어온 불교를
미신으로 취급하고 서양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우리들이 지금 믿고 있는 저 유물론적 종교인들을
볼때 정말 겹인가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동양의 선은 진리중에 진리인 것이다.
철학이다, 종교라는 차원을 벗어난 영원한 참진리인 것이다.
그래도 공부 안하겠다면 말해 무엇하겟는가?
[도통한 옛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다. 불에 타고자 하면 탔고,
물에 빠지고자 하면 빠졌다.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렇게 가고 머물음이 자유로우니,
그에게는 자유로울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참으로 이해가 안될 것이다.
모든 것을 벗어난 것이 부처의 경지이고 불계라고
여태 하였는데 여기서 도통한 옛사람은 정말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을까
그럼 다음말을 더 들어보자.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 말에서 기미을 잡아야 할 것이다.
한번 더 들어 설명하신다.
죽고 삶이 자유자재하니 그에게는 이렇게
자유로운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경계에 물들지 않고 욕심이나 탐심이 하나 없어
3구 밖으로 벗어나야 불지이며 부처라 했다.
그러니 어찌 물이다. 불이다. 산다. 죽는다.라는
그런 생각이나 형상이나 양변이 붙을 곳이 있겠는가?
내 스스로 마음에서 작용면에서 지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형상적 변은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무색계에만 해도 모든 색이 다 사라져 오직
수상행식만 존재하는데 어디서 형상인 물과 불.
생과 사라는 양변이 존재 하겠는가.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를 구하거나
보리·열반을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부처를 집착하고 구한다면 탐심에 속하며,
탐심이 변하여 병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 병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수많은 방편을 들어 설하고 또 설했다.
그러나 아직 부처라는 것이 어떤 형태나 부처가
사는 불지가 실지로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고
그쪽으로 가려하거나 그런 경지를 얻어려고 한다면
착각 중에 착각이다.
아직도 무엇을 말하는지 기미를 잡지 못했다면.
정말 부처병에 걸린 사람일 것이다.
설사병에 걸리면 설사가 그치는 약을 필요하고.
변비에 걸리면 변이 잘 나오게 하는 약이 필요하다.
그럼 아무렇지도 않을때도 무슨 약을 찾겟는가?
그 아무렇지도 않는 평상심 그대로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소로 소로!
[불법을 헐뜯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의 밥이란 신령하게 알아보는 자기 본성으로서
번뇌 없는 밥(無漏飯)·해탈밥(解脫飯)을 말한다.]
라고 스님은 참 친절하게도 또 가리켜 주신다.
참 백장스님은 너무 친절해서 후인들의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이 납승도 밥얻어 먹기는 걸렸다.
이렇게 손에 꼭 쥐어 주니고맙다고 할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값진 것은 다 공짜이니까. 시리 시리!
[이 말은 10지(十地)보살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초발심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모두다 '파계승',
'명자나한(名字羅漢)' 또는 '여우'라 이름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제야 스님이 한 방 소리를 내셨다.
천둥번개가 치고 천지가 개벽을 한다.
보검중에 활인검을 이제야 빼어 들었다.
천하에 스님들을 한칼에 다 베어벼렸다.
살아남은 자가 어디 있는가?
아직도 무얼 구하고 찾고 이루려 하시는가?
그렇게 파계승이되고 싶고, 명자나한이 되어
여우라는 말을 듣고서도
3구밖으로 도망가지 않으려는가?
시리시리 소로소로 사바하!
[지금 메아리같이 고르게 소리를 듣고,
바람같이 평등하게 냄새를 맡으면서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허물도 얽어매지 못한다.]
이제 3구밖으로 다 벗어나고 보니
메아리가 들리고 바람소리도 들리고 냄새도 맡으면서
인연이 오면 오는데로 알고 가면 가는데로 알아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어떤 틀도 가지고 있지않으니
어디에 걸리며 매이겠는가.
그야말로 천하태평이고 모든 것이 일미평등하여
있는 그대로 영원한 자유를 누릴 뿐이다.
[위없는 보리·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출가'라고
이름하나 그래도 그것은 삿된 발원이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안다'하면서
세간에서 승부를 다투며 논쟁하는 경우이겠는가.]
이제 설할 것이 없는데 또 설을 하신다.
백장스님에 대자대비는 끝간데가 없다.
부처님이 항상 법을 설하실때 세번을 설하신다.
처음에는 핵심을 들어 이야기 하시고는,
그래도 못알아들엇실까봐 비유를 들어 설하시고,
마지막으로 게송을 들어 설하시듯이
우리스님도 참 변재가 다재다능하시어 설법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하시고 있는 것도 다 제행무상을 또 설하신다.
모든 함은 다 유위적 구함이나 얻어려는 욕심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법이나 부처란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얻어려는 마음만
내려 놓으면 원래부터 그렇게 있어니
오직 구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물들지만 말고
집착이나 제행만 내려 놓으라고 당부 하신다.
[한 문중을 탐하고 한 제자를 아끼며,
한 안주처에 연연해하고 한 신도와 관계를 맺는다.
옷 한 벌, 밥 한 그릇, 명예 하나, 이익 하나에 다시
'나는 그 모두에 걸림이 없다'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일뿐이다.]라고 하시어
또 한번 승가를 질타하고 계신다.
그때 뿐이였겠는가? 지금은 어떻한가?
둘러보고 살펴가야 할 대목인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자유롭다고 할 스님이 어디 계신가?
누가 이런 스님을 좀 아리켜 주면 등에 업고 춤을 추련만
납승이 덕이 부족하여 아직 시절인연을 만나지 못함이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글자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승이라면 스스로 돌아볼 뿐이다.
[자기 5음(五陰)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몸 마디마디가
토막난다 해도 원망하거나 아깝다는 마음이
전혀 없고 번뇌도 없다면,
나아가서는 자기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채찍을 맞고 이상과 같은 낱낱의 일을
당한다 해도 한 생각도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이 없다며,
그래도 한 생각도 없다는 그것을 옳다고 여겨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을 '법 티끌'이라 하니,
10지(十地)에서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하시어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똑 같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좌상을 다 벗어나야 하며
벗어났다는 생각도 하지 말며,
생각을 짓지 않았다는 것 조차 떠난 3구를 벗어나야
진정한 납승이며 대자유인이며 대 해탈의 경지를 이루어
생사의 경계를 벗어나고 삼계윤회를 하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른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권하기를
'삼악도(三惡道)를 두려워하듯 이 법 티끌을
두려워해야만 홀로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열반을 능가하는 어떤 법이 있다 해도
조금도 값지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걸음마다 부처로서 연꽃을 밟을 것도 없이
백억의 몸을 나툰다.]
라고 하시여 법티끌이란 바로 모든 번뇌망상이 곧 제법이므로
이것을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어떤 법의 티끌이라도 걸리면 장애가 됨으로
이것을 유위하고 살펴 삼악도을 두려워하듯이
모든 제법에 물들지 말것을 당부하시고 이런 사람은
연꽃을 밟지 않고도 천백역의 몸을 나툰 저
석가모니처럼 된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번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들어 설하고 계신다.
[유·무 등 모든 법에 털끝만큼이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이 있다면 연꽃을 밟고 다닌다
해도 마군의 짓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하시어
그때의 많은 스님들이 형상과 법에 매이어
참진리를 등지는 것을 안타까워 이렇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하나 하나 예를 들어 설하고 계신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데에
집착하여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이해했다고
자처하는 자는 자연외도(自然外道)에 속하며,]
라고 하시어 본래불이며 천진불이라는 말에 또 집착하여
자연그대로가 진리이다라고 하든가.
태어나면서 이미 부처인데 무슨 하면서 스스로 부처라고
자처 한다면 이를 일러 자연외도(自然外道)라하시고.
[한편 인연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을 이루는 자는
인연외도(因緣外道)에,]라고 하시는 것은
유위적 행위에 위하여 시절인연이 닿아 선지식을 만나
그 스승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을 일러 인연외도(因緣外道)라고 하시고,
[무(無)에 집착하면 단견외도(斷見外道)에,]
주위에서도 다 뭐가 있어 다 없는 것이야.
다 부질없어 쓸데없는 짓이야 다 없는데 무엇을
얻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는 것이냐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어 하면서 다 없으니 이제
대자유인이다라고 하고 다니는 자들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무란 유무의 편견이므로 이것을
단견외도(斷見外道)라는 말로 표현하고 계신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는 데
집착하면 변견외도(邊見外道) 또는
우치외도(愚痴外道)에 속한다.]
라고 하시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는 것은
있음과 없음을 상호상입하여 서로 비추어 드러난
중도정견을 말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양쪽을 다 비방해 버리면 이것은 잘못안 것이라하여
변견외도(邊見外道) 라고 질타하시고 있다.
[부처다 열반이다 하는 등의
견해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그 어떤 편견에도 집착함이 없이 스스로
관조하여 상호원융한 도리가 스스로 현전할때라야
되는 것이지 무엇이든 조작과 시비와 갈등이 없어며
성인과 범부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 도라고 하신 마조스님의 뜻을 새기고 있다.
[유·무 등 모든 견해가 전혀 없으며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봄(正見)이라 한다.
또한 아무 것도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들음(正聞)이라 하며,
이것을 두고 외도를 꺾었다 하는 것이다.
또한 범부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신통한 주문(大神呪)이며, 보살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높은 주문(無上呪)이며,
나아가 부처라는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견줄 바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다. 중생 아수라를
변화시키고 2승 아수라를 변화시키며,
보살 아수라를 변화시키니, 이렇게 하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라고 하시어 예를 들어 유무. 라고 하였지만
여기엔 생사, 고저, 장단, 시비, 등 모든 양변을 다 벗어나고
그 벗어났다는 생각도 없고 없었다는 마음마져 없다면
즉 3구를 벗어나면 이것이 보면 정견이요.
들어면 정문(正聞)이며 행하면 정행일 것이다.
이 곳에는 그 어떤 것도 붙을 것이 없으면 매이고
택하고 시비가 사라진 경지 임으로
사바세계라고 해도 극락정토가 될 것이요.
삼천대천 세계가 바로 연화장 세계가 될 것이며,
이 모두가 비로자나불의 청정국토가 되는 것이므로
이를 일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유무(有無) 범성(凡聖) 등 모든 법은 광석에 비유되고,
자기의 여여한 이치(如理)는 금(金)에 비유된다.
금과 광석이 분리되면 순금이 드러나니 홀연히
어떤 사람이 돈과 보배를 찾으면 금을 돈으로 만들어
그에게 주는 것이다. 마치 국수 자체는 진정 모든
모래와 진펄이 없어 어떤 사람이 시루떡을 구걸하면
국수를 시루떡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도 같다.]
라고 하시어 양변이 사라진 중도정견으로 보면
다 그대로 혼합되어 있지만 있는 그대로 차별적
관계가 사라졌어 금이라하나 돈이라 하나 그것은
다 일미 평등하여 시루떡으로 다시 국수를 만들 수
있는 것같아 자유자재함을 들어 설하고 계신 부분이다.
[또는 지혜로운 신하가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왕이 행차할 때 선타파(先陀婆)*하고 부르면 즉시
말을 대령하고, 밥 먹을 때 선타파(원래는 소금,
그릇, 물, 말(馬)을 뜻하는 말,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총명한 신하가 제 때 제 때 알아서
이것들을 바친데서 유래하여,
지혜로운 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하고 부르면 즉시
소금을 바치는 것과도 같다.]
이것도 분별지가 사라진 경계에서는 서로 상입하여
무엇이든 너무나 자연스러우면 걸림이 없어서
선타파 하면서 부르면 바로 뭣땜에 부르는지를
알아서 소금을 받치는 것 같이 상호 원융하다는 것을
들어 예를 들어 보여주고 계신 부분이다.
즉 흙을 보고 토질을 알고,
잎을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상은 현묘한 종지를
공부하는 사람이 잘 통달하여 어김없이 기연에
응함을 비유 한 것이며, 또는 육절사자
(六絶獅子:6근·6진을 끊은 사람)라고도 한다.]
라고 하시어 이런 자연서러움이 바로 천진성이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여 이심전심의 경지를 이룬다는
뜻으로 예를 들고 계신다.
도에 이른 사람은 너무나 평범해진다고 하였으며
달마대사가 성인도 아니요 범부도 아님이 부처라고
한 말씀을 새겨보면 이 이치를 알 것이다.
[지공(誌公)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에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고 하였다.
10지(十地)보살은 주리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태우려 해도 태울 수 없으니,
일정한 테두리(量數)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만,
타려하면 타고 빠지려 하면 빠진다.]
지공화상은 바로 달마대사을 양무제에게 소개한
그 지공화상을 말한다.
사람을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 하는 것은
방편을 베풀어 그 병에 따라 약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생의 근심걱정이 어디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도 그 병에 따라 약을 쓰다보니
팔만 사천 방편문이 서게 되였던 것처럼
병이 없다면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형상을 짓지 않으면 탈것도 빠질 것도 없다.
오직 그 형상은 스스로 그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일체가 유심조가 스스로 짓는데로
경계도 만들어 지고 삼천대천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옴마니반메훔!
[바람·물 등 4대를 자유롭게 부리므로
모든 색이 부처님 색이며, 모든 소리가 부처님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인 변하는 자기 마음이
다하여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야 이 말을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모든 경계와 형상과 분별에서 벗어나야
만이 모든 사대에도 자유롭고 색이면 색데로
소리면 소리데로 다 쓰면 쓰고 쓰지 않으면 안쓰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스스로 일으킨 마음의 작용이니
그 작용에 집착하면 병이 되지만
걸리지 않으면 자유자재하고 무애자재한 것이다.
[청정한 보살 제자는 매우 밝아서 무슨 말을 하든지
유무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작용(照用)에 있어서도
청탁에 구애되지 않는다.
병이 있는데도 약을 멱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병이 없는데 약을 먹으면 성문(聲聞)이다.
한 가지 법을 단정적으로 집착하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며,
그저 많이 듣기만 하면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이다.
또한 남을 알면 유학성문(有學聲聞)이며,
공정(空寂)에 빠지고 자기를 알면 무학성문(無學聲聞)이다.]
이 대목에서도 모든 집착이 얼마나 큰 별인지를
예를 들어 설하고 있는 부문이다.
[탐·진·치 등은 독이며 12분교(十二分敎)는 약이니,
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약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병 없이 약을 먹으면 약이 도리어 병이 되어,
병이 없어져도 약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은 무상(無常)의 의미이다.]
참 설함이 끝이 없다. 왜 이렇게 계속 같은 말을
하고 계실까. 이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보살심을 내시어 대자비를 베풀고 있음이다.
이렇게 간절하게 설하고 또 설하고 또 설하신다.
얼마나 우리의 삼독심이 지독하면 이렇게
벗어나라고 설하실까.
욕계중생이 욕심을 떠나면 무엇이 남을까.
사실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다.
오직 이 삼독심을 마음으로 삼고 함을 근본으로 삼아
밖으로 치달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 하나
손에 쥐어주듯이 설하고 계시지만.
그 뚜꺼운 식심을 깨뜨리기란 그리 슆지가 않다.
그래서 석존이후 그 많은 선지식이 그렇게 설법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말법시대을 예견이라도 하신듯 이렇게
상세히 설하고 쥐어주고 계신것이다.
그래서 '한번만 죽어면 영원히 산다'라고 하였고
'예수께서도 하늘나라는 살아서는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들은 이 사대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잘못알고 있는 이 식심(識心)
즉 번뇌와 망상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천리 만리가 그대로 하늘이듯이.
눈앞에 색안경을 벗어면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가
펼쳐질 것인데..... 그 무엇이 안타까워
벗어던지지를 못하는지.....아제 아제 바라아제...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약한 욕심이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이에워 싸주었으면 하는 욕심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내 문도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성인이나
아라한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라고 열반경을 들어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계신다.
그러나 정작 작금의 세태를 한 번 보라.
가능한 것이 겠는가.
지금의 저 석존의 제자들이며,
조계산 후손들이 하고 있는 지금 그대로를 말하고 계신다.
이미 1800년전에 지금을 보았는 것 처럼
이래서 선어록은 몇천년이 지나도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하든 조사가 말하던 똑 같은 말이며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백장스님도 다 보고 예견하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고정연하게 들려 주고 계신 것이다.
경계하고 경계할 지로다. 모짜모지 사다야 사바하.
[또한「가섭경(迦葉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는 미래의 부처님을 뵈었으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셋째는 찰리(刹利)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넷째는 바라문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약한 욕심부터 먼저 끊어야 한다.]
라고 하시어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나 승속이나 바라고 원하는 바는 동일 할 것이며
이것이 욕계중생의 근본 욕심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자리에 앉아 계시기 위해서 온 정성을
다 하고 있을뿐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들어 보아라.
왜냐하면 내일의 과보를 알지 못하니
이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집착하고 물들어 요동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악한 욕심'이라 하는데,
모두가 6욕천(六欲天)에 들어가
파순(波旬)에게 부림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후구를 날리시어 모든 것은 지은데로 받을 것이니
그 누구도 인과의 도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파순이란 6욕천의 최고봉인 타화자제천에 계신
왕을 일러 파순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욕심의 최고 뿌리인 근본 욕심과 탐심을 일어 말한다.
그러니 이 마음속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다 파순의 자손이며 부처님의 자손이 아님으로
죽어서 파순의 권속으로 일끌리어 다시 삼계 육도로
끌려 들어갈 갈 것이라고 경계하신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
모지 사바하!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무명 납승 원오스님 합장***
첫댓글 감사합니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소서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 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