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창설된 예수교장로회대한노회가 5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의 회장은 선교사들(1회 마포삼열 2회 기일 3회 원두우 4회 기일 5회 이눌서)뿐이었다.
1912년 9월 평양신학교에서 창설한 총회는 3회까지 선교사들이 회장(1회 원두우 2회 왕길지 3회 배유지)을 맡았으며 1915년 9월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4회 총회 때 비로소 김필수(金弼秀 1872~1948) 목사가 한국인 최초의 총회장이 되었다.
김목사는 1872년 7월 경기도 안성군 삼죽(三竹)면 죽산리의 윤택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 왔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의 지도자인 박영효 등과의 교분관계로 일본 고베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뒤 언더우드 목사의 추천으로 선교사 레이놀즈(W.D.Reynolds)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어 전주에 머물렀다. 이후 상경하여 1903년 황성기독교 청년회가 창립될 때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12명의 창립이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다시 전주에 내려가 완산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9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회)했으며 진안, 무주, 장수 등지와 군산에 개척전도사로 파송된 후 군산 개복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기독교백과 3~30쪽).
1915년 장ㆍ감 두 교파가 연합하여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 편집인이 되었고 1919년 3ㆍ1 운동 당시에는 <기독신보>의 주필로서 또한 YMCA의 지도자로서 언론 및 강연 등으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일제 말기 완전히 은퇴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 30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