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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성지순례 아홉째 날 로마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지난밤 묵었던 호텔은 바티칸에서 멀지 않은 한인 신학원 가까이에 있었다. 이제 순례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다. 오늘과 내일 로마 순례를 남겨놓고 있다. 로마는 사도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자신의 목숨을 내어던지는 순교를 통해서 증거해냈던 곳이다. 그 이후 250년간의 긴 박해를 버텨냈던 그 피의 토대 위에 우리의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이고, 그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자유로운 신앙을 그들 덕분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장소다. 첫 순례 일정은 가톨릭의 심장부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는 길이 많은 출근 차량으로 정체현상이 심했다. 가이드에 의하면 로마는 300만 정도의 시민이 살고 있지만 출퇴근엔 로마 외곽에 사는 시민들까지 유동 인구가 600만 명에 달해서 교통 체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거기에다 2025년 희년 준비로 공사 중인 데가 많아서 정체 현상들이 더 심한 편이라고 한다.
순례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초 세기 때 세워진 로마의 주요 4대 성당을 하루 만에 순례하는 전통이 생겼는데, 지금은 차량으로 움직이는 데도 하루 만에 순례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걸어서 다니면 하루 만에 방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거리가 먼 게 아니라 차량이 너무 많아져서 교통 상황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졌다고 한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 중의 하나로 349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훼손되어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재건축이 시작되어 무려 120년의 세월에 걸쳐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 때 완공된다.
베드로 대성당 가까이 오니 건물들 사이로 성당의 돔이 보였다. 베드로 성당의 돔은 베드로의 묘지를 상징한다. 베드로의 묘지 위에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 위에 지어진 돔이다. 새 성당을 지을 때 무려 11명의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거쳐 간다. 그 건축가 중의 한 명인 미켈란젤로가 돔을 설계했다. 건축할 당시 높이 136m, 지름 42.6 m로 로마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켈란젤로가 공사하던 중에 죽어 후임 예술가가 16세기 말에 완성한다. 놀라운 것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대로 돔을 순수한 석재로만 지었는데 무게만 약 14,000톤이다. 철골이 들어가지 않은 구조인데 500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버티고 있는 걸작품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돔
돔이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먼 곳에서도 돔이 보였지만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잘 안 보인다. 성당 주변에 베드로 성당의 돔이 보이는 집과 반대편의 집값이 다르다고 한다. 로마인들에게는 베드로 성당으로 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하늘나라의 입구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베드로 광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순례객이 베드로 성당에 입장하기 위해서 광장 전체를 양쪽 회랑을 따라 줄을 서고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안 검색을 통과해야만 한다. 보안 검색은 비행기 탈 때와 똑같다.
베드로 광장의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교의 포용성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어 온 인류를 끌어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베르니니가 설계를 맡아 완성했는데, 좌우 284개의 거대한 기둥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는 140개의 성인 조각상이 있다.
또 광장 한복판에 높이 25.88m의 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원래는 성 베드로가 순교했던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에 있었던 것인데 여기로 옮겨진 것이다.
광장에서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반가운 것이 눈에 띄었다. 광장에 삼성전자의 옥외 전광판 4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해 9월 초부터 본격 가동된 삼성전자 옥외 전광판은 LED 사이니지 제품으로, 해상도가 뛰어나 햇빛 속에서도 뛰어난 화질을 구현한다고 한다. 교황청이 답례하는 의미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의 가교역할로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교황님을 알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LG나 삼성 등 우리나라 전자제품들이 명품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약 1시간가량 줄을 선 다음에 베드로 대성당에 입장할 수 있었다. 베드로 대성당 내부는 길이 186m, 폭 140m이며 돌기둥으로 3개의 복도로 나눠진 삼랑식 구조를 하고 있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백 년 된 건축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3개의 복도로 나누고 있는 기둥들 위아래에 30명이 넘는 성인 성녀들 석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분들이 우리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 역할을 하는 분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 양쪽에는 11개의 경당들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 회랑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제대는 내년에 올 희년을 준비하느라 보수공사로 막아 놓아 볼 수가 없었다. 원래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만든 중앙 제대가 있고 베드로의 무덤을 엄숙하게 보여주는 4개의 청동 기둥과 무덤의 덮개인 발다키노가 있다. 발다키노는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청동으로 제작된 베르니니의 걸작이다.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하였다고 해서 ‘천개’라고 하는데, 공사로 볼 수 없어 너무나 아쉬웠다.
가려진 중앙제대
중앙제대와 발다키노. 4개의 청동기둥은 인간의 영혼이 용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2013년 촬영)
그리고 이 중앙제대에서는 교황님만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지금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대리 추기경님이 미사를 집전하는데 이론상으로는 교황님만 집전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이 중앙제단을 고백의 제단이라고 부르는데 베드로 사도가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듯이 순례자들도 이곳에 와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중앙제단 가까이 오른쪽에 13세기 때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베드로의 청동 좌상이 있다. 발을 유심히 보면 발가락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문드러져 있다. 베드로의 발을 잡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통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순례자들이 베드로의 발을 만지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정말 수많은 신자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더 이상 못 만지게 한다.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25세라는 어린 나이에 만들어낸 걸작이다. 너무나 완벽한 작품이다보니 사람들이 미켈란젤로가 조각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본인도 자랑스러웠는지 성모님의 어깨띠에 ‘피렌체에서 온 미켈란젤로’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이름 하나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모님의 얼굴을 젊게 표현한 것은 세속의 추잡한 때가 티끌만큼도 묻지 않은 동정녀 하느님 어머니로서의 본성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아들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 위에 눕혀 안고 하늘을 향해 왼손 손바닥을 살짝 들어 올려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겠다는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묘사했다.
1972년 한 정신병자에 의해 성모님의 코와 팔이 박살이 난 적이 있어서인지 이곳만 방탄유리로 막아 놓았다.
베드로 대성당에는 희년 때만 열리는 성문이 있다. 평상시엔 성문 내부를 콘크리트로 완전히 봉해놓는다. 희년이 되면 교황님이 망치로 문을 깨서 해체한 후 문을 연다. 그러면 그때부터 한 해 동안 성문을 통과하는 전통이 있다. 성문 위에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모자이크화 되어 있다.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성화들은 그냥 붓으로 그린 그림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대부분 모자이크화이다. 1300여 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성문 내부
성문에서 성 예로니모 경당으로 왔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라틴어(불가타성경)로 번역한 분이다. 경당 제대 뒤의 성화는 죽어가는 예로니모 성인의 마지막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성화에는 예로니모 발치에 머리를 대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이 가시 찔린 사자를 도와 가시를 빼 주자 그 후 사자가 예로니모 성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도메니코 참피에리가 1614년에 그렸는데, 원본은 박물관에 있고 경당의 그림은 모자이크로 복사한 사본이다.
성 예로니모 경당
또 성 예로니모 경당 제대 아래에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유해가 유리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선종 37년 만인 2001년 교황청 지하 묘지에 있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기기 위해 관을 열었는데, 유해가 전혀 썩지 않고 선종 당시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밀납으로 시신의 표면을 처리한 후 예로니모 경당에 모셨다.
요한 23세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2014년 4월 27일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5년도 채 안 된 재임기간 동안 성 요한 23세 교황은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톨릭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의 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했다. 특히 전례 개혁으로 사제가 제단에서 신자들을 등지고 혼자서 라틴어로 미사전례를 거행하던 것을 사제와 신자가 마주 보고 자국 말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신자들이 함께 능동적으로 공동체적인 인식 아래 미사전례에 참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 유해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 제대 아래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무덤이 있다.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의 제대 윗부분을 장식하는 성화에는 3세기 로마제국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로 개종한 후 발각되어 화살형에 처해졌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를 비판해 처형당한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그레고리오 13세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달력(그레고리력)을 만든 분이다.
성녀 헬레나.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유물을 발굴하여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가지고 왔다.
성 론지노.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백인대장이다. 그때의 창은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70년경 그리스에서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그의 유해가 그리스 파트라이에서 1208년 이탈리아의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겨졌고, 15세기에 그의 두개골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옮겨졌다. 1964년 9월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 정교회와 화해를 하고 친교를 나누기 위해 그의 유해를 다시 그리스의 파트라이로 보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안드레아 사도
희년 때만 열리는 베드로 대성당 성문
성 베드로 대성당을 나와 가장 기대하고 만나고 싶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성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베드로 대성당 우측 외부 벽감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는 기쁨과 감격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시아 출신 성인의 성상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된 것은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교회가 성장하였고 또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로마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님이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성상 봉헌 의사를 밝힌 것이 단초가 되어 이루어진 일이다.
조각가 한진섭이 카라라산 흰색 대리석을 사용해 2023년 8월 3.77m 높이로 갓과 도포 등 한국 전통 의상을 입고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습으로 제작했다. 2022년 8월부터 2023년 1월까지 대리석의 고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Carrara) 지역에서 5개월 동안 돌을 찾았으며, 1년여 간의 모형 제작 기간과 돌 조각을 한 기간을 합하면 작업 기간은 총 2년이다. 우리는 베드로 성당의 어느 곳에서보다 더 뜻깊게 관람할 수 있었다.
베드로 대성당의 수많은 위대한 예술품들을 보며 사람들이 왜 르네상스 문화예술의 정수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로마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을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멋지고 위대하고 성스러운 작품들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의 정신이 느껴졌다.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하느님을 향한 예술가적 열망이 그저 존경스러웠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상 순례를 마지막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순례를 마치고 이어서 사도 바오로가 순교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증거했던 장소 성 바오로 트라폰타네 성당(세 분수 성당)으로 이동을 했다.
세 분수 성당 입구
성 바오로 트레폰타네 성당은 바오로 사도가 목이 잘려 순교한 장소이다. 유대인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형이 아니라 고통이 적고 깔끔한 참수형을 당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이 칼에 의해 떨어지자마자 그의 머리가 세 번 튀어 올랐다. 사도의 목이 튀어 오른 곳마다 물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사도의 넋이 떨어진 자리마다 우리의 영혼을 씻어주려는 듯이 샘이 솟아올랐다고 해서 세 분수라는 뜻의 트레폰타네라고 부른다.
성 바오로 트레폰타네(세 분수) 성당 정문
트레폰타네 성지는 베네딕토회 전통을 따르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관리 하고 있다. 성지 입구에는 베네딕토 성인 상이 순례자들을 맞이해주고 있다. 성지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편에 성 아나스타시오와 성 빈첸조 성당이 있고, 오른쪽에 스칼라 첼리(천국의 계단)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박해시대에 만 이백여 명에 달하는 로마 병사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일시에 순교를 당했던 장소이다.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곳에서 교황님과 함께 장례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만 이백여 명이 넘는 영혼들이 천사들과 함께 계단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환시를 보게 되고, 그곳에 천국의 계단 성당을 지어 놓았다. 그리고 성당의 지하 경당에 바오로 사도가 순교 당하기 전 감금당했던 감옥이라고 불리는 동굴이 있다. 지하 경당의 제단 오른쪽 작은 창 안이 바오로 사도가 갇혀있던 감옥이다.
오른쪽 건물이 천국의 계단 성당
지하 경당. 제단 오른쪽 작은 창 안이 바오로 사도가 갇혀있던 감옥이다.
바오로 사도가 감금당했던 감옥
천국의 계단 성당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바오로 사도의 순교 터인 트레폰타네 성당으로 갔다. 순교 터로 가는 길에는 바오로 사도께서 순교하시기 위해 걸어가셨던 촘촘한 4각형의 돌로 깔리어진 아피아가도 일부가 순교 터 앞에 놓여져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 참수를 당하기 위해 끌려가셨던 그 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길이다.
바오로 사도의 순교터인 트레폰타네 성당
트레폰타네 성당 내부 오른편에 바오로 사도 참수 현장과 세 개의 샘이 자리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잘려진 머리가 세 번 튀면서 샘이 솟은 자리마다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기념비마다 바오로 사도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트레폰타네 성당 내부
세 개의 샘과 기념비
성당 오른쪽 모서리에 바오로 사도가 참수 당하기 위해 목을 얹었던 기둥이 아직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기둥에 묶여있는 채로 머리가 잘려 순교하였다고 한다. 참수당한 기둥 오른쪽 경당에는 바오로 사도의 참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참수당한 기둥
바오로 사도가 참수 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경당
주님을 따라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순교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자신도 부활한 바오로 사도의 삶을 통해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장임을 생각하며 성 알퐁소 성당으로 미사를 봉헌하러 갔다.
순교 터인 트레폰타네 성당 앞에 놓여져 있는 아피아가도.
성 알퐁소 성당에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콘 원화가 모셔져 있다.
성 알퐁소 성당
로마의 구속주회 성 알퐁소성당 중앙 제대 위에 모셔진 "영원한 도움의 성모"이콘 원화는 41cm×53cm 크기의 목판으로 14세기경에 그려진 것이다. 이 성화는 기적의 성모, 길의 인도자, 영원한 도움을 주는 성모님 등으로 불리며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로 부터 공경을 받아왔다. 성모님은 스스로 자신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라 밝히고 성 마태오 성당에 안치되기를 원하신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성화는 약 300년 동안 마태오 성당에 모셔져 공경을 받아왔고, 많은 신자들이 그 앞에서 도움을 간청하며 기도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이콘 원화
그런데 1798년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시민군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하고 30여 개의 성당이 파괴되었는데, 이때 성 마태오 성당도 파괴되었다. 그 와중에 성당을 관리하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이 탈출하면서 이 성화를 로마 근처의 수도원으로 옮겼고 후에 1866년까지 테베레 강변 포스테룰라의 성 마리아 성당에 모셔졌다. 그러는 동안 구속주회 수사들에 의해 성 마태오 성당 자리에 성 알퐁소 성당이 세워졌고, 1866년 4월 26일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화는 장엄한 행렬과 함께 원래 성모님께서 원하셨던 장소인 성 알퐁소 성당에 모셔졌다.
성 알퐁소 성당 내부
알퐁소 성당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깔끔하고 고요하며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언제나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을 우리 도움의 원천으로 알고 사랑하며 살아왔는데, 중앙 제대 위에 모셔진 이콘 속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을 직접 뵈니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도움을 주고 계심에 새삼 위로와 힘이 되었다. 우리는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거룩한 미사를 봉헌했다.
김승호 요셉 신부님 강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나도 그들 안에 있겠다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가 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내어주는 사랑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참았는데' 라는 생각에 빠져서 그만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인간적인 나약함에 모든 관점과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은 끝이 없다. 아버지를 욕되게 해도 아버지는 그저 웃고 참아주시며 사랑으로 기다려주고 계신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인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 안에 머무르지 말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치유되고 성화되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는 삶이 되도록 해야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 안에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 명분으로 우리가 하나 되고 사랑의 삶에 온전히 기쁨으로 동참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미사 후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성당 중 하나이다. 이 성당은 박해가 끝난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궁전과 함께 성당을 건축하여(318년 혹은 324년) 교회에 기증함으로써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성당과 교황청이 탄생 되었다. 이후 1309년도에 교황청 아비뇽 유수 사건으로 인해서 아비뇽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교황청이 소재했던 장소다. 오늘날에도 로마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요한 사도와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되어 성 요한 성당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 건너편 광장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당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 청동상이 있다. 성인과 동료들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수도회를 허가해 주기를 청하러 먼 길을 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허가를 내줄리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교황의 꿈에 교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이 쓰러져 가고 있었다. 성당이 거의 땅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 한 작은 거지가 뛰어나와 쓰러져 가는 성당을 자신의 어깨로 받치고 있는 꿈을 꾸게 된다. 그 거지가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회를 인준한다.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 건너편 광장 왼쪽에 웅대한 성벽이 있다. 3세기 초에 완성된 로마시대 때 성벽이다. 그 당시 황제의 이름을 붙여서 아우렐리안 성벽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우렐리안 성벽
라테란 성당 입구에는 ‘로마와 온 세상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인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Sacrosancta Lateranensis ecclesia 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 )’ 이라고 적혀있다. 박해시대를 끝내고 공식적으로 첫 번째 성당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로마에 남아있는 로마 시대 때의 청동문 3개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라테란 성당 입구 회랑 중앙에 있다. 2000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청동문은 고대 로마 시대 때의 유적지인 로만 포럼에 있는 원로원 회당에 있던 중앙문을 1660년도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까지 장식을 하고 있다. 로마사회에는 원로원이 정치적 결정과 종교권을 행사했는데, 이제 교회가 중심인 시대에는 이곳 라테란 성당이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로마 시대 때의 청동문
로마의 4대 성당에는 희년 때만 열리는 성문이 있는데, 라테란 성당의 성문은 입구 회랑 맨 오른쪽에 있다. 성문에는 십자가 아래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님이 부조되어 있다. 아기 예수님의 발을 얼마나 많은 순례객들이 만졌는지 벗겨져서 반들반들하다. 아기 예수님의 발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성문을 비롯해서 로마의 4대 성당 성문은 2000년 대희년을 기념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당시에 새로 제작한 문이다. 희년에 성문을 열고 통과하게 하는 것은 “나는 문이다” 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이 성문은 바로 하느님 자비와 구원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문
성문 내부. 콘크리트로 봉해놓았다.
대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첫 번째 왼쪽 기둥에 조토의 그림이 있다. 1300년도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곳 라테란 성당 교황 발코니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장면이다.
희년을 선포하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라테란 대성당 내부는 5개의 복도로 나눠진 5 랑식 구조이다. 길이 130m, 높이 약 30m, 폭 55.6m이다. 중앙 회랑 양쪽에는 사도들의 모습이 거대한 크기로 조각되어 있다.
라테란 대성당 내부
성 마태오 조각상
라테란 성당은 4세기 때 처음 지어지고 난 이후에 오랜 세월을 거쳐서 여러 번 쇠락과 복원의 시기를 거치는데 현재 보이는 모습은 17세기 때 설계되어 복원된 모습이다.
성 요한 라테란 대성당이 4대 성당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함께 교황만이 공식적으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교황의 제단이 있는 성당이다. 그리고 그 중앙 제단을 감싸고 있는 발다키노가 있다.
중앙 제단과 발다키노
중앙 제대 뒤편 대성당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앱스는 18세기 때 새로 복원 되었다. 앱스 안쪽에 보면 아주 화려하게 장식이 된 흰 대리석 의자가 있는데 주교님의 의자다. 이 성당이 로마의 주교좌 즉 ‘교황좌 성당’임을 의미한다. 이 공간은 교황님이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할 때 사용한다.
흰 대리석 의자가 주교님 의자다.
또 앱스 윗 부분 둥근 천장에는 아주 중요한 모자이크가 있다. 1291년 ‘야코포 토리티’라는 프란치스칸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리지널 작품이다. 작품을 주문했던 교황은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이다.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은 우리 교회사에서 최초의 프란치스칸 교황이다. 모자이크에 등장하는 인물이 왼쪽부터 성 바오로 사도, 성 베드로 사도, 성 프란치스코, 니콜라우스 4세, 성모님, 예수님, 성 안토니오, 성 요한 사도, 성 요한 세례자이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프란치스칸인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겸손하게 조금 작게 그려 넣었고, 성모님과 성 프란치스코 사이 아래쪽에 붉은색 망토를 입고 주교관을 쓰고 있는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은 아주 작은 크기로 등장시켰다. 작품을 주문했던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며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에 작은 크기의 붉은색 망토를 입고 주교관을 쓰고 있는 니콜라우스 4세 교황
또 대성당 안에는 성체를 모셔놓은 성체 경당이 있다. 이 성체 경당은 굉장히 웅장한 모습으로 장식이 되어 있다. 가운데 감실을 중심으로 4개의 녹색 돌기둥이 과거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 만들어졌던 최초의 성당 안에 있었던 실제 돌기둥을 그대로 재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양 바깥쪽으로 있는 황금색의 청동 기둥은 로마의 카피톨리니 언덕에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제우스 신전을 장식했던 청동을 녹여서 여기에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감실 위쪽에 최후의 만찬 장면이 황금색 부조로 되어 있는데, 부조 뒤쪽 편으로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이 식탁으로 사용했던 나무의 일부분이 현재 보관되어 있다.
성체경당
다음은 성 요한 라테란 성당 바로 왼쪽 길 건너편에 있는 성 계단 성당으로 갔다. 옛날에는 성 요한 라테란 성당 지역 일대 전체가 교황청이었다. 아비뇽 유수 때문에 교황청이 프랑스로 옮겨 가면서 이곳이 오랫동안 방치되었었다. 1589년에 식스토 5세 교황이 이곳을 정리하면서 예전 교황청에 있었던 교황궁을 새로 복원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성 계단 성당이다.
성 계단 성당
성 계단 성당 뒷면
성 계단 성당에는 예수님께서 본시오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기 위해 총독 관저의 대리석 돌계단을 밟으며 오르내리신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성 계단은 326년경에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 순례를 가서 빌라도 총독 관저 앞에 있었던 28개의 계단을 떼어왔다. 그러다가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가 현 성 계단 성당을 만들면서 옛 라테란 교황궁 안에 보관되었던 성 계단을 이곳에 설치한다. 성 계단은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시고 고통 중에 올라가신 계단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감히 편하게 서서 걸어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함께한다는 의미로 무릎으로 한 계단 한 계단 기도하며 올라가는 전통이 지금까지 살아있다.
성 계단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세 개의 계단이 있는데, 중앙의 계단이 성 계단이고 양쪽으로는 일반 계단이다. 성 계단은 덧신을 신은 채 무릎과 손으로만 오를 수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오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신심 좋은 우리 일행 몇 명도 함께 계단을 오르며 기도했다. 많은 순례자들로 인해서 계단이 패이고 마모되어 보호하기 위해서 교황 인노첸시오 13세가 돌처럼 견고한 호두나무로 덮개를 만들어 씌웠다. 호두나무 덮개 또한 닳아서 교황청이 2019년에 낡은 호두나무 덮개를 교체했다.
기도하며 성 계단을 오르는 일행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오르면 정면에 쇠창살로 되어 있는 창들이 보인다. 창 너머에 작은 경당이 있는데, 이곳이 교황청으로 사용되었던 시절에 교황을 위한 개인 성당이었다. 이 경당은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이 경당 제단 아래에는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궤가 철창으로 보호되어 있다. 4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이 제단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말구유, 아기 예수의 성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두개골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물을 보관했던 장소였기 때문에 이 경당을 ‘거룩한 곳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인 ‘산타 산토룸’이라고 불렀다. (경당 사진들은 퍼옴)
‘산타 산토룸’ 경당
또 제단 위에는 액자 같은 것이 화려하게 비잔틴풍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얼굴 부분만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을 “아케로피타(Acheropita)”라고 부른다. 아케로피타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란 뜻이다. 당시 교회에서는 이 성화를 천사들이 그렸다는 전승도 있고 루카 사도가 그렸다는 전승도 있다.
“아케로피타(Acheropita)”
산타 산토룸 경당 입구 맞은편 벽면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사도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앉아 계셨다고 전해지는 나무 의자의 일부분이 액자 안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성당은 예수고난회가 관리하고 있다.
이어서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은 32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로마에 위치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루살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로마 안의 예루살렘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바로크 양식의 전면적인 개축은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 때에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
성당의 앱스에는 복음서를 펼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헬레나 성녀가 십자가를 찾아 들고 오는 일화를 담고 있는 프레스코화가 1492년 안토니오쪼 로마노에 의해 그려졌다.
중앙 제대 왼쪽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이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롯한 중요한 성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유물 경당이 나온다.
유물 경당
유물 경당 유리관 안의 가운데에 금은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십자 모양의 유물함 안에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의 조각들이 담겨있다.
십자가의 조각들이 담겨있는 유물함
또 유리관 안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세 개의 못 중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달렸던 나무 명패의 일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본 토마스 사도의 손가락 뼈, 베들레헴 동굴과 무덤 동굴의 파편 조각,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졌던 가시관 중 두 개의 가시가 보관되어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못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달렸던 나무 명패의 일부
토마스 사도의 손가락 뼈
베들레헴 동굴과 무덤 동굴의 파편 조각
가시관 중 두 개의 가시
또 소성당 오른쪽 방에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 수의 복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진품은 이탈리아 토리노의 주교좌성당인 성 요한 세례자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는데, 피와 땀에 의해서 수의에 찍힌 예수님의 모습이 남아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못을 눈으로 직접 보니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데다 끝이 뾰족하지 않고 무디었다. 예수님께서 이 무디고 굵은 못이 손과 발에 박힐 때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참혹한 고통을 세 시간 동안이나 겪으셨다. 인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해결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로마에서의 첫날 성지순례는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 여섯 번째 방문지인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을 끝으로 아홉째 날 순례 일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