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이 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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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심낙원 출간. |
수입이 거의 없어서 가재도구와 아내의 패물들이 팔려 나갔다. 자식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할 지경이었다.
간간이 글을 써서 받는 고료가 수입의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초근목피라는 말이 연상되던 어느 봄날이었다. 반가운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 영어판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한국어로 번역해주시기 바랍니다. 번역료로 500달러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 1955년 3월 15일.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
작년까지 광주교구장 서리로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사목했던 주교였다. 1953년 5월 31일에 현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산정동본당에 레지오 마리애 남성, 여성, 혼성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말하자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산파역이었다. 번역 의뢰는 모든 걸 나눠주고 떠난 나를 위한 배려였다. 아니,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혜였다.
나는 곧바로 번역에 착수해 이듬해 유월에 「레지오 마리애 직무 수첩」을 냈다. 그것이 한국 교회에 레지오 마리애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나는 미국 예수회의 주간지 「아카데미」에 실린 서평을 보고 꼭 번역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우징숑(吳經熊)의 「동서의 피안」이었다. 저자는 사상 편력 끝에 느지막이 가톨릭에 귀의한 중국의 법리학자였다.
그 책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말씀을 비교하며 진리를 찾고 있었다. 동서양의 종교 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동서를 초월한 피안의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임을 제시했다.
일종의 자기 신앙고백서였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던 우징숑 박사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 저는 일본과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불교 등을 섭렵하다 가톨릭에 귀의했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길을 걷다 가톨릭에 입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귀중한 책을 번역해 한국의 지식인들이 영적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 형이 영세하신 것이 저와 같은 해이기는 하지만, 주님께 나아가기를 저보다 두 달이나 먼저 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뜻이기에 마땅히 형으로 모시겠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저자였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 그는 나를 영적인 형으로 불렀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나는 그 책을 번역하는 데 꼬박 7년이란 세월을 들였다. 영어판 책을 적당히 의역하고 싶지 않았다.
한문으로 쓰인 원문을 꼼꼼히 대조하며 번역해나갔다. 미심쩍은 대목이 있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인 신부와 교수들을 찾아가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1961년 12월에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판이 나왔다. 지식인들은 동서고금을 아우른 걸작에 환호했다.
나는 여세를 몰아 우징숑의 또 다른 신심 서적인 「내심낙원」 번역에 착수했다. 저자는 그 책에서도 동양 철학을 통해 그리스도교 사상을 탐구했다.
극기, 온유, 박애, 평화, 기쁨을 통해 사랑의 발아, 개화, 결실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저자의 삶과 견해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수록 더욱 신중하게 번역에 임했다.
1966년 4월, 성바오로출판사에서 소포가 도착했다. 드디어 「내심낙원」 번역본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소포를 뜯는 순간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알이 쏟아질 것 같이 흔들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앞이 희미하게 보였다. 안과 의사의 목소리가 근엄했다.
“왼쪽 눈은 완전 실명! 오른쪽 눈은 망탈(網脫), 안저생혈(眼底生血)입니다.”
신경과로로 인한 고혈압 때문이었다. 번역을 위해 일 년 동안 객지에서 주야로 과로한 탓이었다.
나는 이미 「동서의 피안」 번역에 몰두하던 6년 전에 왼쪽 눈을 실명한 처지였다. 그때도 신경과로가 원인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쪽 눈마저 그리되었다니…….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눈이 아파 글을 통 쓸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따지기도 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때 어두움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은 게 있었다. 시력을 잃어 고생하고 있는 건 회심에 필요한 주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게 진정한 통회의 생활을 하라는 계시였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묵상 기도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세속에서 멀리 떠나 내심의 낙원을 더욱 절실히 맛보아라!”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는 고통의 은혜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내 통회와 보속이 끝나는 날 건강을 되돌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문서 전교에 힘을 쏟으리라 다짐했다.
내 영적 지도자이자 동반자인 오기선 신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셋째 딸 화영이를 지팡이 삼아 사제관을 방문하자 오 신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허! 큰일 났군요. 두 눈이 저렇게 어두워서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내 주보이신 오상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봉사가 돼 세상을 마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눈을 잘 못 보는 것까지도 그분을 닮으렵니다.”
1967년 초겨울, 아내와 나는 대구 대명동에 있는 대지 40평에 건평 15평의 시멘트블록 집으로 이사했다. 가르멜 수도원 근처였다. 나는 매일 2㎞를 걸어가 수도원 성당에서 성체조배와 묵상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느님에게 의탁하는 시간이었다. 텅 빈 껍데기에 밝은 빛이 넘치도록 가득 차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하루에 한 시간씩 노인들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목소리를 길게 빼기도 하고 떨기도 하며 천천히 시조를 읊조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마음이 유쾌해졌다. 뿐만 아니라 심호흡을 하면서 내장 운동을 하게 돼 소화에도 도움이 됐다.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여백의 미를 즐겼다. 날이 갈수록 지치고 힘들었지만, 지나온 날을 성찰하며 지복직관의 희망을 꿈꾸었다.
“아버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화영이의 목소리에 빛바랜 사진첩이 스르르 닫힌다. 애련한 음성이 찻집 분위기와 어울린다. 은은한 차향이 감미롭다. 비발디의 ‘사계’가 대미로 치닫고 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내 선종 준비로 눈병을 허락하신 게 틀림없구나. 난 삼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오신 날 떠나고 싶어.”
수녀가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친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래 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세요.” 나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약속한다. “우리 수녀님이 원하면 그러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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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미사. |
난 그날 화영이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 달 뒤인 1969년 12월 29일에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64세 되던 1970년 1월 6일에 눈을 감았다.
삼왕내조축일(지금의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다. 인자한 주님이 내 소원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일본과 중국 유학을 하며 진리를 찾아 방황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 가톨릭을 알게 됐다.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
그 뒤 가진 걸 나누고 봉사하며 빛과 소금처럼 살고자 애썼다. 평생 지니고 다녔던 곰방대와 만년필만 남겼다.
나를 인도한 맨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긴 한 건가. 후세의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나와 같은 평신도가 이 땅에 살다갔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길까. 아니, 기억이나 해줄까.
내 장례 미사는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다.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덕분에 범물동 성당묘지의 묘비명이 참 길다.
‘天主公敎會友方濟各安東金公益鎭之墓(천주공교회우방제각안동김공익진지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