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보감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위화도에서 회군하기 전에 잠저(潛邸)가 있는 동리에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에,
서경성 밖에는 불빛이요 / 西京城外火色
안주성 밖에는 연기로세 / 安州城外煙光
그 사이를 왕래하는 이원수여 / 往來其間李元帥
원컨대 백성들을 구제하소서 / 願言救濟黔蒼 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회군하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고려의 수도는 예나저나 하북 청현(대성) 이었음에
지금으로 따지자면 합참의장인 장군 이성계가 묵은 잠저는 분명 개성을 벗어나지 못하였을것이다.
조선태조가 되기전 고려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고려의 난세에 다니던 주요지명이
이 시에 나온다.
바로 安州와 西京이다.
평북안주 박천평야라고 중학고때 외우던 지리명이 나온다고 한반도 평안북도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지명이 개경의 서쪽에 모두 나옴을 어찌하랴.
이성계가 최영을 귀양 보내기전의 기록 ( 태조총서)
태조는 숭인문으로 입성(入城)하여 좌군(左軍)과 앞뒤에서 협격(挾擊)하면서 전진하니, 도성(都城)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飮料)를 가지고 와서 영접 위로하고 군사들이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통하게 하였다. 늙은이와 약한 이는 산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기뻐서 고함을 지르며 뛰고 있었다. 민수(敏修)는 흑색 대기(大旗)를 세우고 태조는 황색 대기(大旗)를 세웠다. 흑색 기가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조금 후에 황색 기가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에 오르니, 최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도망해 갔다. (중략)
우왕은 영비(靈妃)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곽충보(郭忠輔) 등 3, 4인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내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니, 최영은 두 번 절하고 충보(忠輔)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대의(大義)에만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하면서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에 유배(流配)시켰다. (중략)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은 서울에 있는 기로(耆老)와 재신(宰臣)·추신(樞臣)과 함께 태조를 뵈오니, 태조는 이색과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고 전문(殿門) 밖으로 군사를 돌이켰다. 이보다 먼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마을에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그 동요에,
“서경성(西京城) 밖엔 화색(火色)이요,
안주성(安州城) 밖엔 연광(煙光)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李元帥)여,
원컨대 창생(蒼生)을 구제하소서.”
하더니, 얼마 안 가서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킨 일이 있었다.
고려도경이나 송사,요사에 고려의 땅이 남북으로 1000리,동서로 1500리라 기록되어있는데 ,
구당서에도 그 큰 고구려가 남북1000리,동서1500리라고 공식처럼 쓰여져 있으니 글장난에 불과할뿐이라고 생각되는것이다.
실제 고려의 서경으로 비정한 진정(현 정정)에서 개경까지 1500리정도 나오고 개경에서 동쪽 해안까지 500리정도 되니 동서로 2000리쯤 되고 남북으로는 실제 북경남부에서 산동남부까지 이므로 2000여리정도 될것이다.
운영자 심제글.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스크랩 하겠습니다....^&^
요나라에 대해서도 송나라기록을 보니 5천리밖에 안된다고 써있더군요 짱개들 지들 땅은 만리가 넘는다고 하고 지들을 괴롭힌 나라는 축소하고 졸장부의 전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