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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큰 이름 우당 이회영 지다
산하의 오역
1932년 11월 17일 우당 이회영 그 큰 이름 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 늑약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로 대한은 망하였다. 이 일을 어찌 하는가. " 분노한 군중들이 종로를 메웠고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다. 어떤 이들은 도끼를 떠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을사오적을 죽이라 호소하기도 했다. 그때 실로 귀티가 나는 서른 여덟의 남자가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회영.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그 가문에서 정승판서가 수두룩했던 '삼한갑족'의 후예였고 명동성당 아래 일대의 땅을 몽땅 보유했던 거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살려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을사오적을 죽일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무위에 그쳤고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제안하고 그 신임장을 몰래 빼돌려 간도의 이상설에게 전달했지만 밀사들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했다.
대한이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황제가 '이왕'이 되고 3천리 강토가 일본의 치세에 들어갔던 1910년 12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면서 잰걸음을 하던 그들은 바로 이회영의 가족들이었다. 이회영과 그 형 둘, 그리고 왕년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요 과거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동생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족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형제들이 지닌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나라를 회복할 무장 항쟁의 군자금으로 그 재산을 쓸 요량이었다.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 하는 심사였으리라. 일행 중에는 가족 아닌 왕년의 이씨 가문의 노비들도 끼어 있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옛 주인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노비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는 주인들이 큰일을 한다는데 어찌 우리가 따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뜻밖의 후한 배삯을 치른다. 뱃사공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자 이회영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이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건너게 해 주시오.” 뱃사공은 이 약속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렇게 건너간 만주에서 그들은 가지고 나온 재산을 털어 '경학사'를 세운다. 밭 갈면서 공부한다는 그 뜻처럼 구국계몽운동 이념에 입각한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그 부설기관으로서 '신흥강습소'를 건립하는데 경학사는 곧 문을 닫지만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외 모든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그 밑빠진 독에 퍼부어진 물은 모두 이씨 가문의 재산이었다. 일본과 그 압력을 받은 만주 군벌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옮긴다. 그의 집은 그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전진기지이자 휴식처이자 사랑방이자 회의 장소였다. 독립운동가, 또는 그런 뜻을 지니고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은 예외없이 이회회영의 집을 찾았다. 그 가운데에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도 있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이회영의 모습은 사뭇 눈물겹다.
"두 달 만에야 식비가 와서 나는 우당 (이회영의 호) 댁을 떠나 동단패루에 있는 공우로 갔다. 허구헌날 돼지기름에 들볶아 주는 음식에 비위가 뒤집혀서 조반을 그대로 내보낸 어느날 아침이었다. 뜻밖에 양털을 받친 마괘를 입고 모발이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양차를 타고 와서 나를 심방하였다.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한달음에 뛰어 나가서 벽돌 바닥에 두 손을 집고 공손지 조선 절을 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손수 들고 오시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 노인은 우당 선생이셨고 내 손에 옮겨들린 조그마한 항아리에는 시큰한 통김치 냄새가 끼쳤다." (이덕일 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중)
중국 음식에 비위가 역하여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해 통김치를 손수 들고 왔던 노인. 이회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북경행 이후 그의 형제들에게는 잇단 비극이 닥쳐 왔다. 한때 손에 물 안묻히고 살았을 이씨 가문 며느리들은 삯바느질로 연명해야 했고 아이들을 제대로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이씨 형제의 재산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즉 일찌기 고관 댁의 양자로 들어가 그 재산을 상속받았던 둘째 형 이석영은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굶어죽었고
그 아들은 의열단원으로서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다가 20대의 나이에 병을 얻어 죽었다. 동생 철영은 애초 만주 신흥무관학교 시절 죽었고, 맏형 건영의 가문도 대가 끊겼다. 막내 호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중 소식이 끊겨 버렸다. 여섯 형제 가운데 살아남아 해방을 본 것은 다섯째 시영이 유일했다.
이회영은 예순 여섯의 나이에 다시 만주로 향한다. 만주 군벌 장학량에게 무기를 구하려 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해 갔다고도 하는데 주위에서 고령을 이유로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늙은 사람이 텁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내가 먼저 가서 준비 공작을 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연락을 하거든 2진, 3진으로 뒤따라오라." 그러나 그의 출발은 밀정에 의해 일제에 낱낱이 전달되고 있었다.
요동반도 끝 대련에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1932년 11월 17일 하필이면 을사늑약 체결 27년을 맞던 그날 세상을 떠난다. 일본 경찰은 그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얼굴에 유혈이 낭자했다는 전언으로 비추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도 유력하다.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온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풍찬노숙의 망명길로 떠났던 이회영은 그렇게 평생을 바치고 쏟기만 하다가 죽어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독립된 나라의 상을 그렸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80년 전에 꾼 독립국가의 꿈을 아직 우리는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또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을 치루었던 그의 기념관은 국고 아닌 사비로 조성되었고, 지금도 국고의 지원은 1년에 기백만원에 그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우당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뭘 바랐다면 그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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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2016.04.28 (목) 12:50
전재산 600억(당시 40만원)을 순전히 독립운동하는데 에만 바쳐,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
그러나 현실은 중국땅에서 객사하거나 행방불명
통일신라,고려,조선에서 최고의 벼슬을 한 집안 - 영의 정 9명 배출, 오성과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천년동 안 양반인집안.
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 대신 주는 귀족지위 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 대부분 양반들 일제에 타협.
급하게 처분했어도 600~800억원(현재가치)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6형제가 모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 식솔60여명이 이동, 신분 해방된 노비들 일부도 주인들을 따라감.
※ 염가처분이어서 600~800억이지 실제 가치는 2조원 정도 되었다고
*신흥무관학교 설립 , 공짜로 먹이고 가르쳐 수천명 독립군 배출 - 이밖에도 헤이그밀사 파견지원, 고종황제 중국망명계획등 독립활동.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해서 반지가 안들어갈 정도. - 육형제 모두 강냉이와 풀죽으로 연명, 단군이래 가장 덕망있는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최후
첫째 [첫째(이건영),이건영의 둘째아들(이규면)은 신흥학교 졸업 뒤 머나먼 중국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
이건영의 셋째아들(이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뒤 귀국, 국군 공군대위로 복무중 한국전쟁때 실종.]
둘째 [가장많은돈을 보탠 둘째(이석영)는 중국빈민가를 80의 나이에 떠돌다 굶어죽음,
이석영의 장남(이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이해 명과 함께 밀정 김달하 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
셋째 [셋째(이철영)는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
넷째 [모든계획에 중심에섰던 넷째(이회영)는 일흔이 다되어 가는 나이에 독립활동하다 걸려 모진고문끝에 숨짐.
이회영의 둘째아들(이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꼐 밀정 암살가담.
이회영의 셋째아들(이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고 광복뒤 석방.]
다섯째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을 본 다섯째(이시영)는 독립후 김구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대부통령이 됨.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 학살사건등 이해할수없는 1인 천하 독재만행에 항거 부통령직 사임 .]
막내 [막내(이호영)는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3 년 소식이 끊김.
이호영의아들 이규황,이규준도 함께 실종 ( 몰살당한걸로 추정 )]
-이회영선생은 나라를 지키기위해 임시정부를 만들면 또 그안에서 분열된다 하여 임시정부를 참여안하시는등 양반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것자체가 엄청나게 진보적.
-세계적으로 육형제가 독립운동한건 유래가 없는일.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따르면“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꺾지 는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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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은 몇 년 동안 한족연합회 구성 등의 일에 분주하다가 1930년 한때 천진에서 심한 가난 속에 은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어 상해에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던 그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려고 비밀리에 만주로 가는 길에 대련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가 잡힌 것은 조카가 낀 한인 밀정의 정보 때문이었다 하니 의지에 찬 독립투사에게 깃든 가정적 비극이었다. 해방 이후 이회영의 이름을 아는 이가 적다. 일제는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가장 탄압했다. 8·15 이후 이승만 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써먹은 것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그를 민족주의자로 추앙하기 이전에 무정부주의자로만 덤터기를 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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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일화
그때 만주로 간 우당 6형제는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 ~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등이다. 이때 만주로 가던 이회영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배로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자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고종의 망명 계획 실패 이후, 이회영 일가는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게 된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기가 일쑤였으며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옷까지 팔아 겨우 연명할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 하나 바깥으로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우당은 생활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 상하이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21년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며 분열된 임시정부의 단합을 위해 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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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보다 못한 현대 노블리스 오블리제 09.11.01 19:31신고
현 대통령의 사돈기업, 조효준 사장의 ‘효성그룹’이 비리게이트에 빠졌다. 경제 대국 미국도 휘청거리는 엄청난 경제 불황에서 300억 부당 배당, 비자금 조성, 콘도와 같은 엄청난 양의 부동산을 취득한 사실이 들어나면서 엄청난 비리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또한 효성 그룹의 비리를 통해 또 다른 대기업의 비리가 연신 터져 나오면서 대형 비리게이트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기업들의 비리. 대기업의 비리는 살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목이 흩어지면 다시 엄청난 비리를 만들어내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비리와 고위인사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현주소를 찾아본다.
대기업들의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초 큰 파장을 불러온 'BBK 사건‘과 삼성 SDI비리, 비자금, 에버랜드 환매채권 비리, 노무현 대통령을 자살로 까지 몰고 간 박연차 게이트까지 쉴 새 없는 비리는 대기업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었다. 또한 흔히 말하는 ’떡값‘’뒷돈‘의 액수가 너무나도 많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도 남을 많은 돈이 모두 대기업의 잇속을 채우기 위한 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유한양행의 유일한 사장은 모든 유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사장의 딸인 유채라씨도 1991년 숨을 거둘 때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이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기업도 있다. 왜 우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 아직 기업은 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등 가진 자들이 짊어 지어야할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해 생각과 실천이 부족한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자리 잡게 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일까? 아니다. 가능한 일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이 계속하여 감시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교육을 하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방법 일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고대 로마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사회고위층에게 요구되는 수준 높은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이렇듯 대기업이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지금 대기업뿐만 아니라 공직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높은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하며, 우리 일반 국민들도 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고귀한 의무를 후손들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종거리 할배 때문에 그저 꿀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