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에세이
귀향, 그 이후
조봉익
봄이다.
그런데 왜 설레는 걸까?
이미 한참이나 지났지만 설레는 기분은 여전하다. 훌쩍 자란 풀들로
가득 차버린 마당. 나비 한 쌍이 어우러져 춤을 춘다. 영산홍의 붉은 볼
이 뜨겁다. 산사나무와 배꽃의 하얀 미소가 귀엽다. 제비들의 경쾌한 비
행이 소리 없이 하늘을 휘젓는다.
정적을 깨는 트랙터 소리.
아는 체를 하자 손만 흔들고 휑하니 지나 가버린다. 다시 정적. 작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컹컹 짖는다. 종일 온 마을을 쏘다니는 개로 나만
보면 짖는다. 김남주 시인의 「나그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제는 돌아와 고향에
황토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
선뜻 강 건너 마을로 들어서지 못하고
바위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아직은 나그네다. 지금까지 40년 이상을 서울에 살면서도 우리 동네하면 이곳이라 여겼는데 토박이 개의 텃세를 실감한다. 개는 제 갈 길이 있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귀향을 한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47년이 지나 다시 시작한 농촌생활이다. 아직은 도시의 생활이 더 익숙하다. 제대로 정리를 못하는 살림살이. 서울에서 가져온 짐은 헛간에 쌓여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넓어도 정리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시골집이다. 익숙한 것 같지만 이미 낯설어진 공간이 되어버렸다. 본채와 떨어진 사랑채의 이용이 왜 이리 불편한지 모르겠다.
집을 수리할까 새로 지을까 망설이다 일 년이 지났다. 주위의 의견도 왜 고택을 헐려고 하느냐는 의견들과 헌집은 고쳐도 헌집이니 새로 지어 편하게 살라는 의견들로 나뉜다. 가만히 누워서 부쉈다 지었다를 수
도 없이 반복하였다. 현재는 황토방 2칸을 증축하고 대대적인 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봄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풀과의 전쟁이다. 이미 무릎까지 커버린 풀들이 무성하다. 인력으로는 당할 수 없으니 제초제를 뿌릴 수밖에 없다. 이쪽 풀을 매고 나면 저쪽 풀이 우거지고 저쪽 풀을 매고 나면 이쪽 풀이 우거진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이제야 실감이 간다. 찾아오는 불효와 후회. 마당을 콘크리트로 포장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또 갈등한다.
애당초 농사를 지을 예정이었다.
전답이 있고, 중학교 시절까지는 농사일을 거들었기에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고샅이나 쏘다니는 놈팽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농사짓는 방법이 그렇게나 크게 변하였을 줄은 미처 몰랐다. 특히 농사는 사람이짓는 게 아니라 기계가 짓는 세상이 되었다. 품팔이를 다니는 일꾼이 없다. 품앗이도 없다. 자기 농사는 자기가 짓는다. 거금을 들여 기계들을 장만하기도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는다.
농촌생활에서 가장 뼈저린 것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지금까지 무엇을 배웠는지 한심할 뿐이다.
못 하나 박지 못하여 손가락이나 깨고 수도꼭지를 교체하지 못하여 멀리 소재지에서 하루 인건비를 주고 인부를 데려와야 한다. 인부는 일이 많든 적든 하루 일당을 준다. 잘도 붙는 시멘트가 내가 붙이면 왜 붙지 않고 그냥 흘러내리는지 모르겠다.
물가도 비싼 농촌이다. 공산품은 물론 농산품도 서울보다 비싸다. 적게 팔리니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독점적이다 보니 바가지가 심하다. 시골 노인들을 상대로 몰염치한 영업인도 많단다. 가스를 시키면서 연결하는 호스가 낡아 교체를 의뢰하였을 때, 호스 3m 정도에 2만 원(대략 10m 가격), 호스의 연결부위를 조이는 부품 2개와 고정하는 나사못을 비롯한 부속 5개를 합친 부품대 1만 원(많아야 오백 원 이내로 짐작), 20분 남짓한 시간의 인건비 1만5천 원을 합하여 4만5천 원을 청구하여도, 비싸면 뜯어가겠다는 엄포에 꼼짝을 못한다.
게다가 일할 때마다의 연장이 다르다.
연장의 종류도 참 많다.
웬만한 일은 연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일 못하는 사람이 연장 탓을 한다고 들었는데 못하는 일이라면 연장 탓을 하여도 무방한 세상이다.
몇 년 앞서 귀향한 초등학교 동창이 있다. 그를 찾는 사람들은 많다.보일러가 고장나거나 부서진 곳이 있으면 그를 찾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그를 찾는다. 수입도 제법 쏠쏠한 모양이다. 나를 찾는 사람은 없다. 내게 무언가를 묻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묻고 다니기 일쑤다. 고추를 심을 시기가 되면, 감나무에 흰 반점이 생기면, 배추 심을 때가 되면, 지나는 동네 분들을 붙잡고 묻는다. 지금까지 배워 온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농촌생활의 현실이다.
게다가 게으르기까지 한 몫 거든다. 마당에 심어진 감나무를 베어내고 땅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때가 작년인데 아직도 베어내지 못하고 있다. 기계톱이 없기 때문이다. 기계톱의 편리함이 떠올라 베어내지를 못한다. 기계톱은 두어 시간이면 족하지만 손으로 베면 하루 이상 걸린다. 그리고 이튿날이면 어깨가 아플 것이 뻔하다. 기계톱을 다뤄본 적이 없어 쉽사리 구매의 용기도 내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사람. 농촌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는 놈팽이다.
그래도 고향이어서 다행이다.
최소한 물으면 가르쳐 준다. 나아가 자청하여 함께 해결해 준다. 모르는 사람도 없다. 어르신들도 붙잡고 얘기하기를 즐긴다. 부모님들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분들이 많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한밤중에도 달려와 보살펴 준다. 사실은 모두 토박이로 인정을 하고 있다. 남보다 좋은 조건이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농촌생활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를 못한 것이다. 건달농부다.
없는 밭 한 귀퉁이 잘라서
잘 매보라고 했더니
밭 가생이만 살살 긁다가
화장실 간다고 들어가면 감감무소식
삼십 분 일하고 두 시간 쉬고
전화 오면 삼십 분 수다
씨 뿌릴 때 손가락 세 마디 깊이여야 움이 잘 튼다고 해도
한 줄 긋고 줄뿌림하고
것도 모자라 공중에 쫙!
움트기 시작하면 잡초도 등 기대 자란다고 해도
잡초인지 움인지, 어찌 알고 움만 잘도 뽑아내는지
봄볕인지
여름 볕인지
용케도 비 내리는 전날 물 주다가
- 박경희, 「건달농부」중에서.
나그네가 사는 땅에도 봄은 온다. 이미 익숙해진 계절이 먼저 아는 체를 해주기 때문이다. 저렴한 생활비를 기대하다 비싼 물가에 자금 사정이 약간 빗나갔지만 그래도 낯설지 않은 땅이다.
퇴직을 하면, 더구나 시골에서 생활한다면, 취미생활이 원활할 줄 알았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 멀리 조계산의 운무와, 해와 달이 아미산에서 떠오르고 운월산으로 지는 정경을 기대하였다. 기대는 무너지고 앞으로 어떤 시행착오가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좋다. 매사에 재미가 있다. 뿌옇치 않고 환한 산들에 둘러싸인 눈이 맑아 좋다. 내일은 고사리를 끊으러 갈 예정이다. 길목에서 찔레순도 따먹을 것이다. 해질 무렵이면 냇가에서 고기들이 뛴다는 소식도 들었다. 파란 다슬기 국물이 생각난다.
댁호도 받았다.
마을로 들어온 지 30년이 넘은 사람도 받지 못한 댁호가 이름을 대신하여 불리고 있다.
화사한 박태기나무에서 벌들의 분주한 날갯짓이 따스한 햇살에 녹아 한가롭다. 민들레가 바람을 기다리다 담장에 기대어 졸고 있다. 전화가 울린다. 며칠 전 근황을 알게 된 여자 후배의 전화번호다. 맑은 산들이 이미 초록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운 봄.
많은 색깔과 함께 다가와 설레게 한다.
ㅡ『우리詩』2017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