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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종로) 독립운동 유적지 찾기(3)
◇ 보성사(普成社) 터 : 종로구 수송동 44번지
- 3·1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 보급한 천도교의 출판사
조계사의 서쪽 수송공원에는 일제강점기 때 1919년 3월 1일 당시 천도교의 출판물을 인쇄하던, 보성사가 있었다.
1919년 3․1운동에 앞서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組版)한 뒤 보성사로 넘어오자,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2만 1,000매를 인쇄하였다. 그런데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보성사 대표 이종일(李鍾一: 1858∼1925) 집으로 옮기는 도중에 일본 경찰에 적발될 뻔하였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모면한 후 2월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인근의 승동교회와 천도교 중앙대교당 인근으로 옮겨져서 학생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포되어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보성사는 천도교 교회서적과 학교 교과서 인쇄 외에도 한국출판 문화 향상에 이바지하여 광문회의 신문관(新文館)과 함께 조선의 인쇄 계를 주도하였다.
현재 수송공원에는 보성사 대표였던 이종일의 동상이 있다.
◇ 김상옥(金相玉) 의거 터 : 종로구 종로2가 8-4번지
- 1932년 1월,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김상옥(金相玉) 의거 터’는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가 일제의 식민 통치 상징이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는 장소이다.
이곳에는 ‘김상옥 의거 터(金相玉義擧址)’라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 표석은 1988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종로경찰서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고증 문제로 200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2016년에 새로운 표석으로 교체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 고문을 하던 악명 높은 곳으로 유명하여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친 곳이었다.
그 당시 종로경찰서는 신신백화점 뒤쪽 대한제국 때의 경무청(警務廳)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는 삭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당시 한성전기회사 사옥) 서편 급사실 앞에서 폭탄을 던졌다. 갑자기 ‘쾅’하는 폭음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졌다. 이에 따라 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지나가던 조선인 행인 7명(매일신보 사원 5명 포함)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일제의 식민지 탄압 기구를 직접 겨냥한 항일투쟁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놀란 일본 경찰은 즉시 거미줄처럼 수사망을 펴고 범인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김상옥 의사는 무사히 후암동에 있는 매부의 집으로 은신할 수 있었다.
원래 김 의사는 서울 태생으로 항일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혁신단(革新團)을 만들어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 의사는 다시 의열단에 가담한 뒤 일제 침략에서 독립하려면 과감한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느껴 은밀히 서울에 들어왔다.
한편, 후암동에 피신해 있던 김 의사는 사이토오 총독이 서울역을 통해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다가 그의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1월 17일 새벽, 수백 명의 일본 경찰은 김상옥 의사가 머무는 후암동 집을 포위하고, 그가 자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깊은 잠을 자지 않던 김 의사는 재빨리 양손에 권총을 잡고 뛰어드는 일본 경찰을 향해 발사했다.
이때 마에 무라(前村) 형사부장과 3명의 경찰이 쓰러지자, 김 의사는 뛰쳐나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총을 발사하니 일본 경찰들은 모두 흩어져 덤비지를 못했다. 이 틈을 타서 김 의사는 남산을 향해 피신하니 경찰은 어두운 탓인지 추격하지 못했다.
동이 트자,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남산을 겹겹이 포위하고 수색에 나섰지만 계속 눈이 내려 김 의사를 찾지 못했다. 가까스로 탈출한 김 의사는 남산 동쪽 기슭을 지나 하왕십리의 안정사에 도착했다. 절에 들어선 김 의사는 주지 스님에게,
“내가 도박을 하다가 그만 경찰에게 쫓겨 이곳까지 왔으니 살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 의사는 여기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스님으로부터 짚신과 장삼을 빌렸다. 그리고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걸어 문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이것은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김 의사는 효제동에 있는 동지 이혜수(李惠受)의 집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어떻게 김 의사의 종적을 찾아냈는지 1월 22일 새벽, 바노(馬野) 경찰부장과 보안과장 지휘 아래의 400여 명 경찰들이 이 집 일대를 포위했다.
이를 눈치챈 김 의사는 근처 김학수 집으로 급히 피신했으나 다시 일본 경찰이 찾아내자 김 의사는 이들과 총격전을 벌여 이 일대는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했다. 3시간이나 버틴 김 의사는 탄환마저 떨어져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항복 권유를 받자,
“내가 자결할지언정 살아서 너희들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하고 외친 다음 남은 총알로 장렬하게 자결하였다.
◇ 태화관(太和館) 터 :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3․1독립선언을 낭독한 명월관 분점
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3․1독립선언을 낭독한 장소로 유명하다. 이날 오후 2시 이곳에서 민족 대표 29인은 한용운(韓龍雲)의 사회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어서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일본 경찰이 밀어닥치자, 민족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자진하여 체포․연행되었다.
원래는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들이 직접 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으나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결국 민족 대표들은 요릿집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현재 이 자리에 태화빌딩이 세워졌고, 건물 앞에 표지석을 세워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태화빌딩이 세워진 곳은 원래 세종의 여덟째아들 영응대군의 사위 능성부원군 구수영(具壽永, 1456~1524)이 살던 집터로 태화정 · 부용당이 있었다. 그의 증손자인 구사맹(具思孟)의 딸이 인헌왕후(선조의 5남 추존 원종의 왕비)가 되어 인조(仁祖)를 낳았다.
인조가 어릴 때 이곳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이 집은 인조의 잠저(潛邸 : 왕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로 알려지게 되었다. 부용당 앞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으므로 영조는 이 연못에 <<잠용지(潛龍池)>>라는 친필 현판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 뒤 이 집은 영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이문 안 대신 김흥근(金興根)의 손에 넘어갔다. 김흥근은 양미간이 넓고,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직언을 잘 하기로 알려졌다.
이 당시 기인으로 유명한 정수동(鄭壽銅)이 김흥근 집의 문객(門客)으로 드나들었다.
어느 날 그 집 하인의 세 살 된 아이가 동전을 삼킨 사고가 일어났다. 마침, 문객으로 와 있던 정수동은 하인에게 “그 먹은 돈이 제 돈이냐, 혹은 남의 돈이냐?”라고 물으니 제 돈이라고 하였다. 정수동은 다시 동전 몇 개를 먹었느냐고 물었다. “동전 한 개를 삼켰다”라고 하니까 정수동이 하는 말이
“아무 염려하지 말아라. 양반들은 2 만 냥을 먹어도 끄떡없는데, 그까짓 동전 한 잎 먹었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
라고 하며 하인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때마침 이 집 주인 김흥근은 남의 돈 2 만 냥을 가로챈 일로 원망을 듣고 있었는데, 정수동의 이 말을 듣고는 크게 깨닫고 2 만 냥을 주인에게 바로 돌려주고 그 후부터는 청빈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일깨워 준 정수동을 무척 좋아했다는 일화(逸話)가 전해온다.
김흥근의 집은 다시 헌종의 후궁 경빈 이 씨의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으로 되었다. 순화궁이 이전한 뒤 빈집으로 남았던 이곳은 경술국치 후 1911년에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소유로 넘어가 그의 별장 겸 친일파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런 어느 날 이 집의 정원에 있던 고목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 당시 이완용의 조카 이항구와 조카 한상룡이 놀라 안방 깊숙이 숨자, 이완용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숨는 아들을 향해 “벼락이 떨어진 후 도망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라고 충고하였다.
이 벼락으로 이완용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당시 장안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에게 하늘이 대신 천벌을 내렸다고 수군거렸다. 충격을 받은 이완용은 이 집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
때마침 대한제국 말의 궁중요리를 담당했던 안순환(安淳煥)이 현재 동아일보 사옥 자리에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을 운영하였는데 1918년에 명월관이 불타버리자, 이 순화궁을 사들였다.
안순환은 이 집에 태화정이란 정자가 있었으므로 태화관(泰和館)이라 명명하고, 명월관의 분점으로 운영하였다. 태화관은 2층 건물이었는데 크고 작은 방이 많아 당시 장안의 부호와 총독부 관리들이 즐겨 찾았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체포․연행된 뒤에 태화관은 궁정 양악대 출신들이 조직한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가 자주 출연하였으나 이 건물을 헐고, 기독교 감리교 여자 교육기관인 태화회관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 서울시에서 공평지구 재개발 사업의 시행으로 태화회관은 헐리고, 현재 12층의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지금 태화빌딩 서쪽에는 1997년 3월 1일에 감리회 사회복지관재단에서 「삼일독립선언 유적지」라고 큰 바위에 쓴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여기에 적힌 글을 소개하면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 처로 사용되더니 삼일 독립운동 때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 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분점 태화관에서 대한 독립식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남 감리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 기독교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8·15광복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라고 되어 있다.
◇ 승동교회(勝洞敎會) :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유형문화유산 제130호)
- 3·1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 중의 하나로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붙은 교회
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소속의 승동교회(勝洞敎會)는 1893년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 사무엘 무어(S. F. Moore)가 곤당골 교회에서 분할받은 16명의 교인으로 중앙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현 롯데호텔 부근에 있었던 이 교회는 몇 차례 옮겨 다니다가 1902년 11월 9일, 현재의 인사동으로 이전하여 1934년에 승동교회로 고쳤고, 헌당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 교회는 동네 이름이 승동(承洞)이므로 ‘이을 승’자의 승동교회였으나 1907년 길선주 목사가 이곳에서 연합사경회를 가지면서 바로 앞 동네의 이름이 절골[寺洞]이니 불교에 맞서 예수교가 이겨야 한다는 뜻에서 승자를 ‘이길 승[勝]’자로 해야 한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승동(勝洞)교회로 표기한다는 일화가 있다.
승동교회는 초창기에 백정들이 많이 출석하게 되어 한 때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3․1운동 거사를 앞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에 김원벽(金元壁)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모여 제1회 학생 지도자 회의가 열렸다.
거사 직전에는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매가 학생 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독립 만세운동의 본거지 중의 하나로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지금, 이 교회 건물 앞에는 서울시가 3․1독립운동을 기념한 터로서 「승동예배당」라는 표석을 세워놓고 “3․1독립운동거사(獨立運動擧事)를 위해 학생 대표들이 모의(謀議)하였던 곳”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 교회는 1939년 일제에 의해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가 폐교되자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신학교(후일 한국신학대학의 모체)를 개교하였다. 이어 차상진 목사 외 11인의 동지들은 12인의 장서(長書)를 총독부에 올렸다가 체포,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993년에 이 교회 마당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워 당시 학생운동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6․25전쟁 직후만 해도 본당 외에 교회 관리 집사(執事)들의 사택인 부속 건물이 본당 동쪽으로 줄지어 있었고, 본당 마당을 사이에 두고 큰 한옥은 목사 사택이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전 직전에는 이 교회 마당에 동민을 자주 소집하여 소방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6․25전쟁 당시 서울이 북한 공산군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교회 청년들이 여럿이 이 교회에 숨어 있으면서 당시 동네 반장과 긴밀한 연락으로 납치의 변을 면할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역사를 품고 있다.
1969년 10월에 예배실 증축 공사가 있었고, 1972년과 1977년 및 1978년에 교회 대지를 확장해서 이곳에 교육관을 건축하였다. 서울시는 2001년에 이 교회 건물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탑골공원 : 종로구 종로2가 38번지(사적 354호, 원각사지 10층석탑 : 보물 제3호)
- 1919년 3월 1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역사적인 장소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라는 3·1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던 역사적인 장소가 탑골공원이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하였으므로 이 공원은 3·1 운동 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시내 남녀 중학생 이상의 학생이 4∼5,000명 모였다. 학생들은 이미 강기덕과 김원벽의 연락을 받고 오전 수업을 마친 후 학교 단위로 모였으며, 경성의전(京城醫專) 학생들은 이날 아침부터 전원 결석하고, 그 시각에 모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날 새벽 서울의 거리에는 각종 격문과 독립운동의 정확한 소식을 알리기 위한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제1호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함께 민중에게 배포되었다. 또 이날 새벽 동대문과 남대문 등 큰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어 있었다.
「희(噫)라! 아(我) 동포여, 군수(君讐)를 쾌설(快雪)하고 국권을 회복할 기회가 왔다.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써 대사(大事)를 공제(共濟)함을 요한다. 」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는 10년 만에 태극기가 내걸려 모인 군중들의 감격과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드디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의식이 개막되었다.
이 식전에 33인의 민족 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鄭在鎔)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날 무렵 군중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탑골공원에는 서울 시민과 고종 황제의 국장을 보러 올라온 지방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군중들은 공원 문을 나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행진 대열은 학생 · 신사 · 상인 · 농민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담하여 서울시가를 누비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것은 민족 대표들의 예상대로 국장(國葬)으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수십만 민중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또 서울 시민이 만세 시위 행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경성부윤(京城府尹)과 경무국(警務局)의 보고에 의한 이날의 시위운동을 보면 종로통(鐘路通)에서 군중은 중심체인 학생시위대의 분열에 따라 여러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져 일대는 2열 종대로 종로에서 광교, 경성부청 앞, 남대문 등을 거쳐 남대문 정거장(서울역)을 돌아 의주통(의주로)으로 꺾어 프랑스공사관으로 행진하였다.
다른 일대는 종로에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중의 일부는 제지하는 일본 군경을 물리치고 대한문 안에 들어가 고종 황제의 영전에 조례(弔禮)를 행하고 나왔다.
그 후 대한문 앞 광장에서 독립 연설회를 가진 다음 구리개(현 을지로)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갈린 일파는 미국영사관 앞으로 행진하고, 일파는 종로에서 지금의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앞에 집합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다른 일파는 창덕궁 앞으로 행진하였으며, 다른 일파는 일제의 조선보병사령부(朝鮮步兵司令部) 앞으로 행진하여 영내까지 들어가려 하였다.
그 밖에도 한 일파는 소공동을 거쳐 총독부 쪽으로 향하려고 진고개(현 충무로)로 행진하였다. 좁은 골목에는 일제의 기록으로도 6천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어 제지하는 일본 군경의 저지선을 두 번이나 뚫었다고 한다.
이 만세 시위행진 중에 미국영사관 앞에서는 한 학생이 '조선 독립'이라고 쓴 혈서를 들고 시위하다가 미국 영사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또 서울에서 가장 넓은 육조 앞(현 세종로) 거리도 만세 시위 군중으로 메워졌다. 이때 군중 속으로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던 일본인 경기도지사(京畿道知事)가 군중들의 강요로 모자를 벗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는 웃지 못할 장면도 벌어졌다.
만세 시위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시가지에서 교외로 번져나가 오후 8시경에는 마포 전차 종점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이 시위하였고,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는 학생들이 오후 11시경까지 해산하지 않고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이날 서울에서의 독립 만세 시위는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수십만 명의 군중이 활동하였는데도 단 1건의 폭력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 민족이 가장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 의지를 표시하려는 것이 3․1운동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일제는 군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어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 이외에도 용산에 있는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동원해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빈손일망정 결사적으로 전진하는 시위 행렬은 막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진고개에서의 시위 행렬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 군중을 체포하였고, 태화관에서의 민족 대표 29명을 포함하여 약 13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날의 시위운동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었다.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와 평북의 의주 선천, 함남의 원산 등지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비슷한 시각에 독립선언식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서울과 이북 6개 도시의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운동은 거족적인 3․1운동의 전체로 볼 때 그 첫 봉화에 불과하였다.
서울은 3․1운동의 전국적인 진원지이므로 3월 1일의 수십만 명의 대시위에 이어, 2일 이후에도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4월 초까지 1개월간에 걸쳐 매일 계속되다시피 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의 주도층은 각 종교단체 신도, 각급 학교 학생, 노동자와 지방에서 고종황제 국장을 보고 참배하러 상경한 사람까지 참여한 각계각층과 각 지역인의 통합으로써 전국적인 운동의 축소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울의 운동 규모는 3월 1일의 수십만 명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소규모로 변하였다. 서울의 시위 상황을 살펴보면 3월 2일에는 주요 시가지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를 불렀던 인파로 뒤덮였으며, 종로 거리에는 노동자와 학생이 중심이 된 약 400 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방면으로 시위하였다. 이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20명이 체포되었다.
3월 3일에는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훈련원에서 거행되었으므로 민중들은 조례(弔禮)를 표하느라고 시위가 중단되었으나 밤에는 신정(新町, 묵정동) 쪽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군중 속에는 서양인이 4, 5명이 끼어 있어 일본 경찰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기도 했다.
한편, 종로 보신각 앞은 서울의 만세 시위운동 중심지로서 3월 1일부터 계속 일어난 만세 시위는 거의 이곳이 중심이 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보신각종도 울렸으며, 2차 대규모 시위인 3월 5일의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대로 나누어졌던 모든 시위대는 정오경에 모두 이곳에 집결하여 일본 군경과 충돌하면서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3월 5일의 시위 후 며칠간은 대 운동을 기획하는 학생과 일반인을 일본 군경이 대대적으로 검색하였기 때문에 서울 중심가에서는 시위가 크게 벌어지지 못하였다. 3월 9일부터는 서울의 상인들이 일제히 동맹하여 철시(撤市)하였다. 4월 초까지 1개월간 계속된 철시의 동맹공약서(同盟公約書)는 다음과 같다.
「 9일 일체 폐점(閉店)할 것.
시위에 가담할 것. 단 폭행은 하지 말 것.
위약(違約)한 상점은 용사(容赦) 없이 처분할 것.」
일본 군경은 이 동맹을 철회, 개점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였다. 심지어 총구를 들이대고 개점(開店)을 강요하였으므로 상인들은 마지못하여 개점할 경우 그들만 돌아서면 다시 상점의 문을 닫고, 또한 경성부청, 경찰서 등에서 상인을 불러서 개점을 강요하면 운동으로 구속된 자를 석방하면 개점하겠다는 등의 대담한 요구로 일제를 곤란하게 하였다.
상인들의 철시와 아울러 8일부터는 각종 공장 직공이 파업 저항과 집단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같은 행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은 총독부 경영의 용산 인쇄소 직공들이었다. 8일 밤 야간작업을 하던 직공 200여 명은 갑자기 일을 중단하고 뛰어나와 만세 시위를 벌이자, 부근의 일반 민중이 이에 가담하였다. 일본 군경과 소방대가 동원되어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동자로 보이는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그 후 철도국(鐵道局) 직공, 연초회사(煙草會社) 직공들의 시위가 있었고, 10일부터는 전차 운전사(電車運轉士)가 가담하여 서울 시내의 전차는 모두 운행되지 않았다. 이 저항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운행한 전차는 시위 군중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 경찰의 3월 15일자 보고에 의하면 이 같은 파업이 성행하여 서울시내의 대부분의 공장은 직공이 10% 정도밖에 취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3월 1일에 시작하여 4월 초까지의 서울의 총시위 횟수는 64회이며, 여기에 참가한 인원은 약 57만 명에 이르고, 피살자가 5명, 부상자는 69명, 체포된 자는 12,000명에 달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의 통계 숫자는 발표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당시 3․1운동의 행동대원으로서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계층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3․1운동의 중앙지도층 인사들이 투옥되어 투쟁의 대열에서 멀어져 민중에게로 넘겨지자, 당시의 유일한 조직 세력이었으며, 실천력 있는 행동으로써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울을 뒤덮었던 그 목소리와 함성, 두렵지만 단단했던 그 외침을, 평생을 살아도 감히 헤아리기 힘들 것 같은 나라를 빼앗긴 그 심정을, 하루라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사적 354호)이다. 당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이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 대원각사비․ 독립 기념 선언탑 등이 있어서 그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공원은 처음에 탑이 있다고 해서 <<파고다공원>>이었다. 1919년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광복 이후에는 삼일절 · 광복절 기념행사의 터로서 후손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는 장소가 되었다.
이 공원은 번잡한 서울의 중심에 있는 휴식 공간이라는 점에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특히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다. 정부는 1991년에 공식 명칭을 탑골공원으로 바꿨다.
또 이 공원의 중심에 있는 팔각정은 1989년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73호로 지정되었는데 대한제국 때 황실 음악연주소의 시설이 있었지만 3․1운동의 발원지로 더 유명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훙복사(興福寺)가 있었는데 이 절이 폐허가 되자 조선 초에 세조가 1464년에 효령대군과 신숙주를 시켜 이곳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게 하였다.
원각사는 조선 초 태조 때는 조계사(曹溪寺) 본사(本寺)로 지정되는 큰 절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이후로 성종까지는 큰 규모 큰 법회(法會)가 원각사에서 있었다. 국가에서는 날이 몹시 가물 때에는 많은 스님을 모아 기우제를 지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년)에 왕에 아첨하는 무리와 유생들의 불교 배척 운동, 그리고 연산군의 향락적인 생활이 극대화하면서 성균관을 원각사로 옮기더니 마침내 성균관과 더불어 원각사를 폐찰(廢刹)하였다. 원각사는 연산군이 기녀(妓女)들을 모아 연방원(聯芳院)을 설치함으로써 유흥장으로 변하였다.
그 후 조선 초 중종 2년(1507)에 대비 정현왕후의 전교(傳敎)로 원각사를 다시 세우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원각사 건물은 중종 9년(1514)까지는 비어 있었다가 명종 9년(1554)에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조선말 광무 1년(1897)에 총세무사(總稅務司)의 고문으로 와있던 영국인 브라운(Jhon Mcleavy Brown : 柏卓安)이 정부에 건의하여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탑골공원 내에는 국보 제2호인 높이 12미터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전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최우수 걸작으로 꼽히는 이 탑은 원래 1464년에 창건된 원각사 경내에 있었다. 연산군, 중종 이래 원각사가 폐지되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10층 옥개석까지 복원되어 남아 있다.
이 탑은 세조 13년(1467) 4월 8일에 완성된 것으로 3층 기단에 탑신(塔身)은 10층으로 된 대리석의 사리탑(舍利塔)으로 분신사리(分身舍利)와 원각경(圓覺經)을 탑신에 간직하고 있는 중요 문화재로 국보 제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의 기단부(基壇部)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4방으로 구름용과 사자들이 연꽃, 연잎, 모란들에 싸여 있다.
2층에는 서유기에 보이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용마들이 보이는 삼장법사 현장(玄裝)의 천축(天竺)법상이 조각되어 있다.
3층에는 도력 높은 나한들의 여러 모습이 세밀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탑신부(塔身部)에도 각 층마다 각 면석(面石)에 부처, 보살, 천인상 등 석가설법상(釋迦說法相)이 조각되어 있다.
1층~4층까지는 법회(法會) 장면이, 5층~10층까지는 연화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불상들이 양각되어 있어서 조선 초기 석조 미술의 진수(眞髓)를 볼 수 있다.
탑골공원 내에는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대리석으로 만든 대원각사비가 있다. 높이 3.94m, 폭 1.3m, 귀부 길이 3.5m의 이 비석은 1471년에 만들어져 현재 보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귀부(龜趺)는 둔중한 몸체로 일반적인 육각형의 거북이 무늬 대신 사다리꼴 평행의 가는 선을 새겼으며, 연잎 모양의 비좌(碑座)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나 다리가 특이하다. 이 거북이를 받치고 있는 비신(碑身)에는 앞면에 김수온, 성임, 뒷면에는 서거정, 정난종이 썼는데 그 내용은 《속동문선》에 실려 전한다.(*)
*자료 : 서울 역사 여행 가볼 만한 곳 제106주년 3·1절 독립운동 유적지 투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