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여 년간 시행… 책 읽으러 떠나시오, 독서당으로
조선시대 독서 휴가 제도
세종,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 주며 출근 말고 마음껏 책 읽도록 해
성종, 세조 때 사라진 휴가제 되살려 '독서당' 지어주며 제도 활성화
정조 전까지 문신 320명 휴가 받아
종이 신문과 책을 읽으면 좋은 학교·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질 뿐 아니라, 한 나라의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몇년 전 사회 곳곳에서 독서 열기가 확산되었던 기억이 있어요. 지난 2016년에 서울교육청은 '독서 골든타임(독서로 인한 뇌 발달이 매우 효과적인 시기)'인 어린 학생들을 위해 초등학교 교장·교감 선생님 400명을 대상으로 '조회 시간 등을 활용해 책 읽어주기' 연수를 하기도 했지요.
독서를 사회적으로 장려하는 분위기는 오늘날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있었다고 해요. 젊고 재주가 뛰어난 문신들을 뽑아 독서를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고, 집에서 독서하면 친구들이 찾아올까봐 전용 건물을 지어주기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이들이 어떻게 독서를 했는지 살펴볼까요?
◇ 독서 위해 휴가 받은 집현전 학자들
1426년 12월, 세종대왕은 권채, 신석견, 남수문을 불러들였어요. 임금 앞에 서게 된 관리들은 5품 이하의 젊은 집현전 학사들로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이 바르다는 평가를 듣는 인물들이었어요.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이라는 관직을 내린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글을 읽혀 실력이 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세 명의 신하들은 왕께서 무슨 명령을 내릴지 궁금해하며 긴장하고 있었어요. 혹시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지요.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열심히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거라.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대제학 변계량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기쁜 표정을 지으며 임금 앞에서 물러났어요. 그날 뒤로 이 세 명은 궁궐에 있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않고 각자 집에서 독서에만 열중하였지요. 이처럼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서 독서에 몰두할 수 있게 한 제도를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선사하여 독서하게 함)라고 불러요. 사가독서제에 선발된 문신에게는 최소 1~3개월의 휴가가 주어졌다고 해요. 기간을 따로 기록하진 않았지만, 필요할 땐 이보다 긴 '장가(長暇·긴 휴가)'를 내줄 때도 있었고요.
세종대왕은 1442년에도 신숙주·성삼문 등 여섯 명의 신하에게 독서 휴가를 주었어요. 이번부터는 집이 아닌 진관사(서울 은평구 북한산국립공원 내부에 있는 사찰)에서 독서를 하게 했어요.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절에 올라가서 독서하게 함)라고 불렀지요. 집에서 독서를 하다 보면 손님들이 찾아와 방해받을 수 있으니, 책에만 열중할 수 있는 절에 들어가게 한 거죠.
◇ 독서에만 집중할 공간을 만들어주다
1451년 문종은 11명에게, 1453년 단종은 4명에게, 1455년 즉위한 세조는 14명에게 상사독서 휴가를 주었어요. 하지만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자 세조가 1456년 집현전을 없애면서, 사가독서제도도 잠시 폐지됐답니다.
1476년 6월, 성종은 7명의 관리에게 독서 휴가를 주면서 사가독서제를 부활시켰어요. 그 후 성종은 사가독서제를 더욱 활성화시킬 계기를 만들었어요. 아무래도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학자들이 쓴 책을 읽는 젊은 선비들을 사찰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종은 이러한 명령을 내렸어요. "성 밖에 좋은 땅을 골라 건물을 지어 독서할 장소를 만들라." 오늘날로 치자면 국무총리실에 해당하는 의정부는 용산의 한 암자가 관청에 소속된 채 버려져 있으니, 잘 고쳐 쓴다면 앞이 확 트이고 그윽하며 넓어 독서하고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가 될 것이라고 성종 임금께 아뢰었어요.
1492년 성종 임금은 이곳을 중축해 최초의 독서당(讀書堂)을 짓게 했어요. 이 독서당의 크기는 20여 칸(기둥과 기둥 사이, 네 기둥이 둘러싼 공간) 정도로 당시 평민의 집이 보통 5칸, 잘사는 양반의 경우 99칸까지 지었음을 감안해볼 때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다고 해요. 그러나 시원한 대청마루와 따뜻한 온돌방이 모두 갖춰져 있어 글을 읽기에 꽤 좋은 환경이었답니다.
1517년 중종도 현재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인 두모포에 새로 독서당을 짓게 했어요. 이때부터 용산의 독서당을 '남호 독서당' 두모포의 독서당을 '동호 독서당'이라고 불렀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용산 방면의 남쪽 한강을 남호(南湖), 옥수동 방면의 동쪽 한강을 동호(東湖)라고 불렀거든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6년 세종 때부터 1773년 영조 때까지 총 48차에 걸쳐서 320명이 선발되어 독서 휴가를 받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