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있는 풍경 l 선바위(立岩) l 글 김범선
영양군의 남쪽에 위치한 입암면은 동으로는 석보면, 서로는 안동시, 남으로는 청송군과 접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양군 남면과 진보군 북면, 안동군의 일부를 떼어 합하여 입암
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입암은 연당리에 있는 선바위(立岩)를 한자로 뒤쳐서 부른 것으로 두 하
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해 있다. 지명에 영향을 미친 경승지답게, 명소로 손꼽히고 있으며 선바위
에는 남이 장군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명이요, 남이 장군은 어명을 받들라.”
남이(南怡)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남이는 익일 오시까지 편전에 들라”
“전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남이는 엎드려 왕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전하가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파발을 보냈셨을까?”
남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리자 파발꾼이 말했다.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합니다,
한양은 그것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답니다, 장군!”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이놈을!”
남이는 어명을 받들고 선화낭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낭자, 이번에 반군을 토벌하면 우리 혼례를 올립시다!”
총각 남이가 선화 낭자에게 이렇게 다짐을 했다.
“장군님, 적을 물리치시고 꼭 몸성히 돌아오셔야 해요, 저는 저 바위처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선화낭자가 손가락으로 선바위를 가리키며 남이에게 다짐을 했다.
“낭자, 걱정하지 마오, 꼭 반군을 토벌하고 돌아오리다.”
남이는 장검을 빼서 반변천 강물에 씻으며 맹세를 했다.
“장군님!”
“낭자!”
두 사람은 왈칵 껴안았다.
남이는 걸출한 무인으로 일월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연당리 주역(駐易)에 도착했다. 옛날 주역은 역(驛)이 있어
보부상들과 등짐장사들이 물건을 교환하고 머물러 가기도 하던 곳이었다. 청년 남이는 주역에서 하룻밤을 묵고 말
을 타고 길을 가다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절세미모의 규수를 보게 되었다. 남이는 말에서 내려
“낭자, 목이 마르니 물 좀 줄 수 없소?" 하고 말을 걸었다. 처녀는 말없이 절벽 밑 샘터로 갔다. 그리고 오동나무 잎을
접어 그릇을 만들어 한가득 샘물을 떠서 내밀었다. 남이는 그 물을 달게 마셨다. 남이와 선화, 이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남이는 연당에 눌러 앉아 활을 쏘고 장검을 휘두르며 무예를 연마하였고 두 사람은 밤이면 반변천이 흐르는 선바위
밑 강가에서 몰래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선화낭자는 연당(蓮塘)마을 명문 가문 출신으로 미모가 뛰어나고 너무 아름
다워 선화(鮮花)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까지 연당은 생부동(生部洞))이라 불렀고, 조선조 광해군 때 석문(石門) 정영방
(鄭榮邦) 선생이 은거한 후 연당ㆍ임천ㆍ돌배기 일대를 물과 숲이 우거졌다고 임천(林川)이라 하였는데 그 후 지금의
연당에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를 짓고 서석지(瑞石池 민속자료 106 호 지정)를 만들고 못 가운데 부용화(芙蓉花)
를 심어 연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남이(南怡)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로 세조 3년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를 했다. 세조는 남이를 무척
아끼고 총애를 했다. 남이는 한양에 있지 않고 전국의 명산 대첩을 찾아 유람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런데 길주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세조는 총애하던 남이를 급히 한양으로 불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루 속히 장군님이 역적을 토벌하고 돌아오시기를 비나이다.”
선화낭자는 매일 밤 자시에 강가에 나와 선바위 아래 정화수를 떠다놓고 북쪽을 망배하며 남이 장군의 무사귀환을 기도
하였다. 세조의 총애를 받은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을 뿐 아니라 서북변의 건주위(健州衛) 여진을 토벌 할 때도
선봉장이 되어 용맹을 떨쳤다. 이에 남이는 적개공신으로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죽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간신 유자광 일파가 남이를 모함하였다. 어느 날 밤, 궁중에서 수직(守直)을 하던
남이가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하늘의 징조로다.”하고 말했는데 이를 들은 유자광이 예종
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했다. 이에 예종은 옥사를 일으켜 남이와 그 일족을 모두 죽였다. 남이가 옥사로 죽었
다는 소식을 들은 선화낭자는, 밤마다 한양을 향해 망배하는 그 자세로 바위처럼 서 있다가 죽었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선화낭자의 이름을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바위 앞에서 남이가 무예를 연마하며 장검을 씻은 강물을 남이
포(南怡浦) 라고 불렀다.
옛날 안동시 송천에 보나리(보나루, 포진(浦津)라는 지명이 있었다. 부산에서 소금을 실은 배가 낙동강을 타고 올라와서
보나리에서 하역을 하면 등짐장수가 소금을 지게에 지고 안동과 영양, 청송, 봉화 등 이 일대를 돌며 판매하였다.
옛 어른들이 선바위 앞 반변천을 남이포라고 부른 것을 보면 당시에 선바위 앞 강물이 지금 보다 더 깊고 넓어 배가
다니는 보나루((浦)였던 것 같다. 지금도 검은 밤하늘에 은하수가 퍼지게 웃고 푸른 달빛이 남이포 강물을 눈이 부시게
반짝이면 선바우 밑에 서로 포옹을 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간혹 볼 수가 있다고 한다.